-
-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만화, 가능성을 사유하다
닉 수재니스 지음, 배충효 옮김, 송요한 감수 / 책세상 / 2016년 9월
평점 :
unflatten이란
말은 영어 정식 어휘 속에 완전히 자리잡던 항목은 아닙니다. 모든 단어에 반대를 뜻하는 접두사 un-만을 붙였다고 일일이 새
의미가 생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말은 (영미권 화자들의) 일상에서 점점 쓰임새가 넓어져가며
여태 없던 지지를 획득해가는 중인 듯 보입니다. 그리고... 혹시 이 멋진 책을 통해, "기존의 통념을 깨부수고 나태한 습관에서
벗어나며 창의적 도약을 이루다" 같은 뜻으로 새롭게 코인되는 계기를 마련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플랫랜드"라는 가상의 세계, 그 안에 사는 가상의 종족 이야기를 책의 서두에서 꺼냄으로써 발상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프랑스어권 철학자,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저작에서 종종 시도하듯, 단어나 개념 하나를 주인공 삼아 끝도 없는 담론을 펼치는 모습은
우리가 매우 자주 봐 왔는데 그것과 비슷하다고 여기면 되겠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책이 만화 형식을 빌리고 있다는 건데요,
이처럼 친근한 포맷 속에서 주제가 펼쳐지기 때문에 이질감, 거부감이 덜할 뿐 아니라, (난해하지는 않아도) 추상적인 주제가 독자와
더 생동감 있는 소통을 시도한다는 게 확실한 장점입니다.

"플랫랜드"는
환경이 2차원 평면으로 구성되어, 그 속에 사는 이들까지 모두 납작납작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나머지는 우리들과
우리들이 사는 세계와 같습니다...만 우리들은 몸서리치며 그 사실을 부인하려 들 것입니다. 우린 엄연히 입체적이고 자랑스러운
3차원의 사람들 아니냐, 저런 불쌍한 한계에 갇혀 있는, 편협하고 어리석으며 불우한 이들과 어떻게 나란히 놓일 수 있느냐, 등등의
반응이 예상되죠. 하지만 만약 4, 5, ..n차원 세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이런 말조차 차원의 질곡에 묶인 불쌍한 정신의
습관이자 어법입니다. 아마 +1[혹은 그 이상]차원의 거주자들은, 다른 어휘[이 역시 우리의 상상이 못 미치는]를 써서 연민과
경멸을 표현하겠죠)면? 그들 역시 우리의 느낌과 비슷한(차원이 다를 테니ㅋ 이런 추측밖에 할 수 없습니다) 반응을 보이며,
저차원의 감옥에서 탈출하던 그때의 쾌감을 회고하고, 현재의 자신에 크게 안도할 것입니다...

인간은
돌이켜보면, 지옥 같은 과거로부터 탈출해 온 도약의 체험을, 언제나까지는 아니라도 손으로 꼽을 만큼 겪어 왔습니다. 그 당사자,
개척자, 선구자들은 그 숨이 멎을 듯한 감격을 (자신만 못한) 동료들과 공유하며 존재의 무한 영속 불가능을 다만 한탄했을
터입니다. 문제는 그런 감격적인, 존재의 엘리베이션을 세대는 물론 개체조차도 지속화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그게 가능했으면 그
후손들인 우리는 모두 붓다가 되었을 겁니다). 앞 문단에서 그 고차원의 거주자들이, 우리(저주받은 3차원쟁이들)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연민이나 안도(특히 이 후자가 나쁜데요) 같은 반응에 머문다면, 결국 무사안일, 퇴행이란 나쁜 트랙에 떠밀린다는 이유에서
우리보다 나을 것도 별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궁극적으론 타락, 소멸)
플랫랜드의
거주자들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위"와 "북쪽"을 구분 못 합니다(하긴 플랫랜드 전체가 저자의 상상이니 특정 표현 하나를
빌리고 어쩌구 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들의 제약 가득한 처지에선 효용도 상상도 필요 없는 경지이지만(아마 거기 이런 걸 꿈꾸는
녀석이 있다면 원로들에게 혼쭐깨나 나겠죠?), 혹 눈을 뜨고 여태 못 보던 그 시야를 넓혀 동족들에게까지 그 심원한 비의를 전달해
주는 개체가 출현한다면, 그들의 삶은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몇 배는 행복해질 것입니다. 신석기 농경 혁명의 성과를 갓
맛본 세대의 어린 자식들이 "농사 안 지을 때는 어떻게 먹고 살아서 여기까지 왔어?"를 몇 번이고 제 부모들에게 물어 보듯
말입니다. 인터넷이 뭔지 모르던 세대와 나면서부터 웹 서핑이 네이티브의 습성이 된 세대가 공존하는 지금은 그만큼이나 희귀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플랫랜드의
장래 전망은 느닷 3차원의 가능성을 지목하고 나온 이단적 개체에게, 나머지 집단 성원들이 이를 어떤 태도로 맞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H G 웰즈의 단편 <눈먼 자들의 나라>(몇 달 전에 나온 <마술가게>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를
보면, 눈이 먼 이들이 오히려 눈을 뜨고 세상의 참모습(에 그나마 가까운)을 보는 외부인을, 기를 쓰고 자신들의 협소한 질서에
순치시키려 드는 설정이 나옵니다. 뭐 어쩌면 기존의 질서가 급격히 붕괴하는 결과보다는 그 편이 (단기적으론) 바람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문제는 "안 보이는 눈이 정상이고 도덕적이며, 눈이 보인다는 건 개인에게도 질병이며 불행이다!"를 필사적으로
세뇌하는 끔찍한 몸부림입니다. 눈이 안 보인다는 끔찍한 한계도 이처럼이나 합리화할 수 있는데, 하물며 "여태 큰 문제도 없던
루틴과 습성"에 대해선 우리가 얼마나 끼고살며 과잉보호하려 들겠습니까? 플랫랜드니 남미의 오지(웰스의 설정)니 하는 게, 결국은
우리가 그토록 헛된 자긍을 느끼며 사는 바로 이 세계입니다. 2차원도 2차원의 눈으로 보면 그게 2차원이 아니며 우주의 전부일
뿐이죠.

저자는
특이하게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우리가 현재의 저차원성을 절감하고 다른 단계로의 도약 가능성이 열리는 건 (유감스럽게도) 어떤
강렬한 충격(대체로는 불쾌한)을 받았을 때이다." 지금 이 세상은 특이점(커즈와일이 쓴 맥락에서의)이 열렸다고도 하고, 4차
산업혁명 덕분에 종전의 사고방식으로는 모두 큰 곤경을 맞을 시점이라고도 합니다. 어딜 가나 창의력, 창의력 하는 게 그만큼 존재
혁신의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뜻도 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무슨 자계서의 교훈을 낭독하는 착각도 들겠습니다만, 이 책은 아직 젊은
저자가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과정을 통과한 학위 논문 거의 원본 그대로를 단행본으로 펴낸 내용입니다. 최초로 만화 형식의
디서테이션이 된 영예를 간직한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포맷이 만화이기에 그 자체로 "플랫랜드"이기도 한, 자기지시적(형식과 내용이
일치) 존재태로 독자와 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특이한 운명, 혹은 사명을 띠기도 하네요.


우리는
누구나 만화를 읽으면서 자신의 상상력과 독해 능력을 똑같이 2차원에 머물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실에서보다도 더
열심히 차원의 한계에 도전하며, 그 밋밋하고 평평한 세계를 우리의 차원에 맞춰 주려 작가만큼이나 재생과 재해석에 애정을
쏟습니다(딴 걸 그렇게 열심히 하지). 김화백(ㅋ)의 온갖 삽질과 과오에다 과대의미부여를 해 가며 성실하게도 놀고 있는 모습이 다
뭐겠습니까? 김화백이 우리에게 알려 준 중요한 메시지가 있죠. "(워딩과는 달리) 병원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마이신만큼이나
한계가 뚜렷하다." 헌데도 현실의 성과(그게 적지 않다 해도)에 안주하는 이들은, 정말로 병원이 모든 상처와 위기를 간편히 넘겨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그리고 죽습니다). 상황에 떠밀려서 다른 차원을 절박한 마음으로 엿보기보다, 만화를 읽는 자발적
쾌감으로 우리의 상상력과 포텐을 즐거이 끌어내는 편이, 그 객관적 성과나 주관적 희열 양면에서 훨씬 바람직한 결과이지 않을까요.
저자 닉 수재니스는 김화백보다는 좀 더 진지한 모드로 이 자명했으나 낯선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웁니다. 플랫은 곧 추함, 어리석음,
그리고 노예 상태와 죽음이며, "언플랫"은 그와 반대되는 모든 가능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