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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평전 - 독립운동의 선구자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6년 12월
평점 :
보재 이상설 선생의 존함은 교과서나 성장기 필독서 위인전 등에 자주 나옵니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고종이 파견했을 때, 세 분의 특사 중 한 분이기 때문이죠. 현지에서 순국한 분은 이준 열사이지만, 보재는 회의장에 참석하여 불법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하기 직전이던 우리 민족의 입장을 성명으로 표현하려 했던 역할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양반 집안의 후손인 그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일찌감치 벼슬길에 접어들었습니다만, 하필 시국이 망국으로 치닫던 판이니 젊은 엘리트가 편안히 청운의 꿈을 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방관으로 임용되는 경로보다는 주로 학예의 부문에서 자신의 기량을 펼쳤던 그는 공맹의 법도도 법도지만 거대한 서세동점을 이끄는 제국주의 세력의 배후 실력을 이루는 문명의 힘이 무엇인지에도 관심을 끈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자질이 총명했던 그는 낯선 서양 문물을 소개한 책들을 어렵사리 구해 읽고 무엇이 요체인지 곧 깨달아 이를 후학들에 교습 전파하는 데 역량을 쏟았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적성은 행정이나 실무 보다는 순수 학문의 연구 쪽이었기 때문이겠습니다.
보재의 선구자적인 면, 혹은 지행합일의 인격자적 측면은 여기서 잘 드러나는데요. 시국이 극도의 난맥상에 빠지고 일제의 한반도 우세가 시시각각 현실로 굳어지는 판에, 명분도 실리도 없는 관직을 더 이상 쥐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민족과 대의명분에 헌신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영의정직까지 올랐던 그이지만, 망국의 설움이 현실이 되어가는 정국을 보고 따뜻한 아랫목만 보전할 생각이 그에게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기 전, 이미 그는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한 후, 이의 공개 파기를 황제에게 권했습니다. 성격이 곧고 단호한 그의 일면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부분인데요. 이런 행동은 일제의 눈에 크게 거슬러 일신상의 위험도 당할 수 있는 행동이고, 무엇보다 고종에게 부담을 안기는(그러나 타당한) 신하로서의 충언 충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신으로 확정된 바를 거리낌없이 행동으로 옮기고 일단 과단성 있는 행동이 이뤄진 후에는 추호의 후회도 품지 않는 그의 면모는, 우리가 동양 고전에서 익히 읽어 오던 지사, 열사, 충신, 의사 들의 행적과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는 공맹 이래 유가의 지식인이 걷곤 했던 노선에서 조금도 이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바가 인격의 화체, 실제의 행동으로 이처럼 그대로 옮겨지는 그의 풍모는, 국권 상실 후 자연스럽게 뜻있는 이들이 그의 휘하에 모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이후 주로 노령에서 그의 주된 기반을 잡고 애국 활동을 전개했는데요. 아무래도 그의 배경이 배경이니만치 "애국 계몽 운동"적 노선이 주된 모습이지만, 임시 정부에 가까운 공권적 단체를 결성하여 "멀지 않는 장래에 국내 진공"을 목표로 삼은 그의 모습에선 종합적 우국 지사의 다양한 면모가 고루 드러납니다.
저자는 그런 평가를 내립니다. "해방공간에서 보재 같은 이가 정치활동의 중심에 섰다면 우리의 정치사는 사뭇 다른 방향을 틀었을 것이다." 이는 연륜으로 보나 거친 관직의 높이로 보나 보재 정도의 배경을 가진 지도자(사실 이승만보다 6,7년 연상이므로 물리적 생존이나 정력적인 활동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지만)라면 민족 정기를 보다 중시하는 진영이 큰 동력과 구심점을 가졌으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3. 1운동에 2년 앞서 서거했는데요. 그 최후의 모습도 면암 최익현이나 기타 충의지사가 자발적으로 맞이하던 양상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빼어난 자질과 단심을 지닌 지도자들이 항일 국면에서 이처럼 빨리 사라진 것도 우리 민족과 국운을 위해서 안타까운 요소였다고 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