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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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만큼 같은 종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태어나며 성장하다 사멸하는 동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애써 발전시킨 나만의 특성과 물질적인 풍요와 정성들여 가꾼 관계를 뒤로 하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점도 슬프지만, 생의 근원적 아픔은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 혹 내가 누구인지 어렵사리 알아낸 후에도 이를 주위의 요구와 상황에 힘들게 맞추거나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그의 정체성 자체가 그를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들은, 교활한 의도와 서투른 표현으로 자신의 출신과 현재의 신분을 어리석게 거짓으로 꾸며 대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만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죠. 물론, 아주 드물게는, 시대가 빚은 비극 속에 자신의 여러 정신적 코드가 절묘히 조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아픔과 역사의 상처를 함께 추스르고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연약한(대체로는) 일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과제일까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아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을 이끌면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모어를 잊지 않는다면 감옥에 갇혀서도 그 감옥의 열쇠를 갖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남깁니다. 언어는 그저 일상의 욕구나 파편적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그 개인의 지난 삶, 추억, 존엄한 개성, 소중한 깨달음, 심지어 그의 조상과 겨레가 속한 집단 무의식과 문화 유산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거대한 도서관과도 같습니다. 러시아 남성과 결혼하여 먼 이국까지 옮겨와 살아가다 뜻밖에 역사의 격류에 휘말려 온갖 몹쓸 일을 다 당한 샤를롯이란 프랑스 여인에게, "프랑스어"는 그저 처음으로 배운 언어라는 의의 외에 엄청난 무게와 집착과 존재의 근원으로 작용했습니다.

한 여성이 어떤 남성에게 끌려 백년해로의 연을 맺음은 그저 생물학적 충동이 빚은 우연의 산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가시버시로 공동의 삶을 일구고 살아가다 후손을 같이 만들고, 그들에게 소중한 추억과 애정을 공유하거나 물려주며 온전한 개체를 성숙시켜 가는 과정은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구태여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의 작업만큼이나 숭고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배워 입과 몸에 익은 모국어(러시아어) 말고도, 자신의 정체성과 교양과 아련한 기억을 형성하는 질료인 프랑스어를 가르쳤습니다. 프랑스어로 된 옛날 이야기, 프랑스어 가사가 붙은 노래, 프랑스어로 쓰여진 절정기, 원숙기의 문화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문학,... 어머니에게 이국의 문화, 그 중에서도 세계인의 동경 대상이 될 만한 선진 문화의 핵심을 배울 수 있는 아이들이란 얼마나 행복한 존재들이겠습니까.

볼셰비키 혁명은 분명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상당수의 노동자들에게 해방이라는 환희를 안겨다 준 세계사적 사건이었겠습니다. 스탈린의 리더십 역시 저개발의 수렁에 허덕이던 상당수 러시아인들에게 산업화의 혜택을 가져다 주었으며,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야수적이고 능률적인 이민족의 침공이었던 나치의 미친 시도를 퇴치한 공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시 많은 수의 인민들, 특히 이 책의 저자이자 사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안드레이 마킨의 가족들에게는, 공산당의 붉은 혁명이 소중한 인생과 영혼의 연속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긴 끔찍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은 파리에 방문했던 니콜라이 2세에 대한 기억을 급우들 앞에서 자세히, 진실되게 말해 주다 공산당 당국의 지목을 받아 가족 전체가 큰 고초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잖아도 부르주아 출신에다 배우자가 외국인(자본주의 국가인 프랑스인)이란 사실 때문에 새로운 국가 체제에서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없던 처지였으니, 이들에게 닥친 끔찍한 운명은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도 상상이 되고 남습니다.

망명자 신분으로 프랑스에 체제하는 시간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나 조선족, 혹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느낄 만한, 그리고 겪을 만한 소외감이나 직접적인 고통, 불편과 비슷하겠죠. 아이는 그의 신분, 출신이 학교 급우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내내 국외자로 겉도는 신세입니다. 그는 분명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고, 대화에 끼기 위해 열심히 화제를 익히며, 서툴지만 열심히 프랑스어를 말하고 씁니다. 외할머니가 가르쳐 준 지식, 그녀와 함께한 추억 위에 기반한 소중한 발성, 문법, 기능이지만 텃세 강한 원어민들이 보기엔 여전히 낯선 이방인의 발버둥에 지나지 않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혈통 속의 프랑스성이 문제가 되어 축출된 아픈 과거가, 이제 외할머니의 모국인 프랑스에서는 자신과 부모, 가족들의 러시아 연고가 차별의 표징으로 작용합니다. 마치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는 자이니치로 지문 등록 대상이 되며 경원시되고, 한국에 건너와서는 반쪽발이라며 멸시받던 슬픈 운명과 비슷하다고나 하겠습니다. 중간에 낀 자의 영원한 주변인 지위가 부르는 비극은 세계 어디서나 공통입니다.

역자 이재형 교수께서 적절히 지적한 바처럼, "의식과 시선, 자아의 이중 분열"이야말로 이 자전적 소설의 핵심을 관통하는 몸부림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얻은 이는 무엇을 보건 어떤 감정을 느끼건 그 일관성과 전일성(wholeness)을 유지합니다. 한 번은 이렇게 느껴지다, 다른 한 번은 전혀 이질적이고 생경한 감성에 압도당하곤 하는 혼란이 그를 비껴갑니다. 반면, 주인공처럼 색과 결이 판이하게 다른 동과 서의 두 문화적 유산이 핏줄 속에 뇌리에 자리잡은 자아는, 매 순간 두 번의 필터와 프레임과 수용체가 정신을 교차하는 기묘한 체험을 겪어야 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무엇을 수용해야 참다운 자신을 안심할 수 있을까요.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몽상가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특질이 이중적으로 형성된 탓이 컸겠죠. 그는 제정 러시아가 멸망하기 20년 전 프랑스를 방문한 "로마노프 가의 마지막 황제 부처(夫妻)"의 장엄한 행렬, 가극 <르 시드>를 관람하는 장면(외할머니의 기억) 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20년 후 그들과 그의 일족이 혁명군에 의해 비참하게 처형당하는 장면(부모와 자신이 들은 간접 전언) 등을 교차시킵니다. 소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시제(tense)입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력처럼 행위자를 붙들어매고 자유를 빼앗는 접착물"이 바로 시간입니다. 이 품위 있고 고귀한 혈통을 지닌 황제는, 서로 적대적인 과거와 미래 속에 붙들려 사지가 찢길 게 아니라, 주인공의 몽상 속에서 화해하는 과거와 대과거 속에서 다시 예전의 평온과 위엄을 찾습니다. 물론 마땅히 있어야 할 조화와 온유함 속에서 가장 큰 안정을 찾는 건 주인공자신이겠습니다. 3대에 걸친 그의 가족들이, 비정상적인 역사의 격동 속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도 컸고, 그런 모진 운명을 겪을 만한 죄야 저지른 적 없었으니 어떤 식으로건 사면과 치유가 필요했겠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19세기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펠리스 포르, 예의 그 차르 니콜라이 2세(이 책에서는 프랑스식으로 "니콜라스"로 표기됩니다), 늘어지는 특유의 저음으로 전쟁 독려 방송을 했던 스탈린(사실 그도 프랑스어가 서투른 마킨만큼이나 러시아어가 서투른 그루지야인이었죠), 소름끼치는 독재자의 주구 베리아(그가 모스크바 전체를 자신의 하렘으로 삼고 차를 타고 다니며 여인들을 헌팅했다는 일화도 목격자의 생생함으로 낭독됩니다)까지, 역사의 부조리와 질곡 탓에 모진 운명을 겪었던 주인공의 육성에 담김직한 여러 실존 거물들이 거명됩니다. 역사란, 사회란, 평온하고 선량하게 자신의 공간에서 조용한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개인들의 삶에까지 이처럼 짙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것인지요. 혹은, 참된 소속감과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고뇌하고 방황하는 게 어디 망명자들만 겪는 아픔과 상실의 산물일지요. 이 소설은 특수 상황에 놓인 개인의 회고담을 가장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근원적 고뇌의 몸부림을 정직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목의 "프랑스 유언"은 프랑스식 유언이란 뜻도 되고, 물질 아닌 무형의 언어를 통해 묵직한 유산을 물려 주려 했던, 죽은 외할머니의 소중한 말들 정도로 새길 수 있습니다. 아틀란티스가 결국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에 대한 고대인들의 간절한 희구가 빚은 상상이었듯, 주인공에게 프랑스 땅이 갖는 의미도 환멸과 원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아들지 않는 동경과 희망 등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겠습니다. "선(善)에도 끝이 없고, 악에도 한계가 없는(정말 절묘한 표현이죠. 도스토예프스키도 그 숱한 명작 중에서 자신의 조국에 대해 결국 저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요)" 말 그대로 애증이 교차하는 러시아 역시, 과거의 상처를 거대한 암흑과 죽음의 눈밭에 덮어둘 저주 받은 헛간이 결코 아님도 명백합니다. 하나도 버거운 조국을 둘씩이나 둔 저자의 육성을 많은 분들이 귀기울여 들어 보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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