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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치하야 아카네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あとかた, 한자로는 跡形(적형)이라 쓰는데, 우리말로는 "흔적 "정도와 뜻이 통하겠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얕은 연계로나마 이어지고, 접근 방법이 다르긴 합니다만 여튼 여섯 개의 도막들이 같은 주제를 부각하고 있어서 전체를 하나의 장편으로 보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고요. 불꽃-손자국-반지 까지는 앞 장의 의미 심장한 소재가 뒤의 장 제목으로 바톤을 릴레이하는 식입니다. 넷째 장 "화상" 부터는 이 공식(?)이 관철되지 않을 뿐 아니라, 투신 자살한 차장님이 어렴풋한 배경으로만 언급될 뿐 사실상 단절된 스토리라서 그 부분이 좀 아쉬웠습니다. 저처럼 이런 느낌이 드셨던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그저 옴니버스 연작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불꽃". 여직원인 나는 "지인"의 소개(좀 모호하죠)로 연상인 유부남을 만나게 됩니다. 좀 있으면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와 결혼까지 할 예정인데도 그렇습니다. 혼인이 정말, 흔한 말처럼 "인생의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겁이 났는지 아니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앞두고 모든 게 권태와 싫증의 더께가 씌어 보이기라도 하는지, 우리들 독자에게는 대단히 낯선 어조로 그녀는 이렇게 내뱉습니다. "결혼을 앞둔 때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않을 남자였다." 제가 책에서 그대로 인용한 문장이며, 혹시 정반대로 말해야 할 걸 잘못 쓴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녀에게 이상한 동조를 보내게 됩니다. 버젓이 약혼자가 있는 그녀가 별 생각 없이 기어이 몸까지, 그것도 여러 번, 섞게 된 건 이 중년남성이 풍겨 대는 지독한 회의와 불안과 달관과 체념과 애처로운 몸부림 때문입니다.
"손자국"은 바로 앞 사연 "불꽃"에서, 관계 중 뚜렷이 남은 손자국을 암시하기도 하고, 투신자살한 그 "풀네임이 누구에게도 기억 나지 않는 차장님"이 난간에 남긴 흔적이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꼭지에서 주인공은 예의 그 죽은 차장에 심각히 공감하는, 혹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바로 다음 사연에 잘 나오듯 일류대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니는 모범생의 전형인 인생입니다. 아내는 자신보다 학벌이나 조건이 좋은 편이 못 되지만, 모든 면에서 평균치는 해 주는 무난한 여성입니다. 자신 같은 남편을 만나 행복하다고도 한 것 같은데, 아이를 낳고 일상에 길들여져 갈수록 무엇엔가 단단히 화가 난 듯합니다. 어떤 때는 결혼 반지를 빼놓고도 다니는군요. 외도하는 여성이라면 본인이 거꾸로 화를 낼 일은 없을 텐데, 육아가 힘들어서일 수도 있고 이유 없는 권태와 우울이 찾아와서일 수도 있습니다. 정작 걱정되는 건 동안에 걸맞는 철없는 성품의 아내가 아니라 바로 자신입니다. 점점 가정과 일상이 지겨워지고, 남들 보기에 이유도 없이 목숨을 끊은 차장님이 불길하게도 성큼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반지"는 예의 그 반지, 아내가 정말 집에 빼놓고 다닌 그 반지이기도 하고, 사연의 끝에 갑자기 드러나듯 "다른 반지"이기도 합니다(스포일러일 수 있어 생략). 전혀 아닐 것 같았는데 아내도 어느 남자, 그것도 젊은 총각을 만나고, 달콤하면서도 슬프며 여전히 목마른 육체 관계에 무시로 빠져드는 사이입니다. 사실 반지는 빼놓고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게, 상대 남자는 그녀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 원숙함에 대한 기대가 관계의 진척에 불을 댕긴 셈이었으니 말입니다. 남편과는 모든 면에서 반대입니다. 탄탄하고 매끈한 몸에, 인생에 아무 전망도 없는 하루살이 니트족, 그러면서도 상대의 감정과 느낌의 동선을 두어 발 앞서 파악하는, 솔직하고 거리낄 게 없는 영혼이기 때문이죠. 어느 날 수유 증 젖꼭지를 세게 물어 놀라움과 아픔을 안긴 자신의 갓난아들이 타인처럼 느껴진 후, 그녀는 나의 왜곡된 의식, 나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관계와 시선, 생계와 장래를 위한 걱정 모두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집니다. 나를 절실하게 만들고 나의 모든 걸 점유할 자격이 있는 건 내 머리가 아니라 내 몸입니다. 사람은 몸이 시키는 길을 갈 때 전적인 몰입이 가능하고, 때로 진정한 행복을 찾습니다. 이 점을 거의 완전히 이해해 주는 상대를 지금 만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녀가 모르는 게 있다면, 남편 요헤이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라는 거죠.
"화상- 비늘- 음악"은 스무 살을 갓 넘긴 방황하는 청춘들이, 아직 관계의 강박과 공연한 가식에 찌들 염려가 없으면서도 그 나름의 상처와 아픔과 불안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그러면서도 현재의 제약에 자발적으로 길들여져 가는 사연이 (앞 세 도막보다는) 긴밀히 이어진 구성입니다. 소녀는 얼굴 윤곽이 또렷한, 매우 아름다운 용모이지만 이 때문에 상처를 더 깊이 더 넓게 받으며 커 온 불행한 인생입니다. 혼혈이면서 사생아인 그녀는 이기적인 생부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넉넉히 받았지만 어느 집단이건 환경에건 넉넉히 소속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평판 좋은 사립학교에 유년 시절부터 다니긴 했으나 본인의 부적응으로 기회를 다 놓쳤고, 얼굴만 간신히 알고 지내던 존재감 0의 범생이와 예기치 않던 동거(아닌 동거)에 들어갑니다. 이 범생이가 살던 자취방이 저 위에 나온 다른 인물들과 같은 건물에 속했기에, 아주 약한 물적 연계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거죠.
생계를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지만 여튼 관계에 주린 그녀는 불필요한 푼돈 알바도 하고, 몸을 파는 것도 아니면서(마음만 먹으면 인기가 좋을 텐데) 지카게 씨의 가게에도 들락거립니다. 지카게 씨는 아무 연고도 없는 세계의 재난지역, 빈곤지대를 찾아 자원 봉사도 나서고 의사 선생과 열애에도 빠지는 등 그 나름 멋지게 사는 인생이지만 역시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에 몸을 떠는 "in need"의 상태지요. 여자에게 아주 큰 매력도 안 느껴지는 외모인데 자신이 게이라는 고백을 듣고 난 후에야 그 소년이 요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어느 새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직한 느낌이며 어디서부터가 그간 자신을 거쳐 온(흔적을 남긴) 남자들의 시선인지도 모를 만큼, 편안하고 익숙한 혼란에 빠져 드는 그녀. 인생이란 참 묘한 게, 퍼즐의 절실하게 어긋난 부분을 맞추고 나면 다른 부분이 반드시 흐트러져 있습니다. 감정에 충실하면 현실이 위태로워지고, 현실에 어렵사리 적응하면 내 감정은 나를 타인처럼 멀리하며 보듬어달라고 아픈 흔적을 들이밉니다. 적당한 상대와의, 다른 것 안 보고 체온만 나누며 체액만 교환, 공유하는 섹스가 이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다면 인생의 비의는 이미 오래 전에 풀렸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