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독 :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자서전
필 나이트 지음, 안세민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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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용품, 의류 등이 그저 전문인의 영역이나 전유물에 머물지 않고 평범한 이들의 일상까지 속속 침투해 들어온 모습이, 아마도 나이키 이전이라면 그리 당연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여가 활동의 일환으로 운동을 즐기는 풍속이 생긴 건 현대인이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후의 현상이지만, 선을 넘지 않는 사치와 자기 만족적 소비를 위해 특정 스포츠 브랜드에 돈을 쓰는 풍경이 이처럼이나 일반화한 것, "새로 나온 나이키 용품 하나를 사기 위해 조금 더 열심히 일해 보자"라고 마음먹는 이들의 모습이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뚜렷한 트렌드의 일환으로 눈에 띄는 건 차라리 놀랍기까지 한 현상입니다. 이제 나이키는 이른바 사물인터넷(만물인터넷)의 플랫폼 구축에까지 큰 포부를 품고, 전혀 다른 섹터에서 표준 지위를 얻으려는 경쟁 기업들을 바짝 긴장시킨다고 하니, 일개 "신발 제조업체"가 이만큼이나 큰 영향을 가질 줄은 반 세기 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겁니다.

반 세기 전이라고 하면, 이 자서전의 주인공이자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가, 지금 같은 엄청난 글로벌 다국적 기업을 만들리라고는 자신도 채 내다보지 못하면서(이 책을 완독하고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저 신발에 대한 열정과 사랑 하나로, 자신이 직접 메이커로 나선 것도 아닌, 일본 오니쓰카 社의 미국 판매권(그것도 서부)을 얻어내려 동분서주하던 시절을 가리킵니다. 보통 하는 말로 "그 시작은 미미했어도 끝은 창대하다"고도 하지만, 만약 이 소심하고 확신이 부족했으며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만으로 청춘의 영혼을 채웠던 젊은이가 행여 무슨 변이라도 당하거나 그 부친의 조언을 좇아 다른 길을 걸었다면, 오늘날의 나이키 같은 굴지의 기업은 아예 존재도 하지 않았겠으며, 세계의 모습은 또 얼마나 바뀌었을지 상상만 해도 흥미롭습니다. 이 책에 드러난 창업주의 젊은 시절은, 척박한 시장을 개척하고 라이벌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해 내는 기업가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너무도 큰 거리를 둔 그림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미 나이키가 그 존재도 채 알리기 전 아디다스라는 굴지의 메이커가 존재했으나, 모르긴 해도 나이키의 분전이 없었으면 아디다스도 오늘의 아디다스는 아니었으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혁혁한 창업의 공을 이룬 기업가들도 특히 미국 같은 나라에 기반을 둔 업체라면 완전 무일푼으로 일어서기는 어렵습니다. 필 나이트 같은 경우 말그대로 개천에서 용난 경우는 아니고, 그 부친은 여러 업종을 거치다 지역 신문사의 성공적 영위로 중산층 정도의 생활 기반은 확실히 다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친은 그야말로 빈손에서 출발한 인생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자식들에게 번듯한 학벌을 갖출 것을 꽤나 요구하는, "건전한 속물 근성"을 갖는 경향이 있죠.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필 나이트도 지역 명문인 오레곤 대에 다니고, 이후 몇 군데의 학교를 더 거치며 자격증과 학위도 여럿 갖게 되었습니다.

오레곤이란 지역적 배경에 대해, 그는 "이곳까지 (동부로부터) 도달하려면 엄청 끈기가 있어야 하며, 길이란 길은 처음 개척해야만 했을 것이다. 오레곤은 오솔길이 아름다운 까닭에 그곳에서 나고자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같은 회고를 합니다. 사실 오레곤은 미국 전역에서 그리 뚜렷한 인지도가 있는 곳은 아니며, 동부 출신들에게는 촌구석으로 하대받는 경향마저 있죠. 좀 뒤에 나오듯 그는 막 사업이 잘 풀려 급속도로 확장하던 시절, 단 두 군데밖에 없던(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은행에서 그나마 한 군데 퇴짜를 맞은 후 필사적으로 창구에 매달려 자신의 사업 전망을 설득하던 시절도 털어 놓습니다.

외모만 보면 상상이 안 가지만 그는 육상 선수이기도 했고, 대학 초년생 시절 학교 육상부에서 대표로 뛰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보다 우월한 기량을 지닌 동료를 한 번도 추월하지 못했고, 이는 그의 자존감 형성에 나쁜 쪽으로 영향을 끼쳤지요. 2인자, 루저 심리란 특히 필 나이트처럼 소심한 청년에게는 지속적으로 그늘을 남길 수 있는데, 본인이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그는 엉뚱하게도 "운동화"에 대한 열정으로 이를 극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사 빌 바우어만(아버지 다음가는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코치를 든든한 인맥으로 알게 되어, 이후 사업 확장 과정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기반으로 의지합니다.

보통 이 정도 성공을 거둔 이(가 아니라 훨씬 못한 수준이라 쳐도)들은, 자서전 속에서 잔뜩 자기 자랑을 늘어놓거나, 이 단계의 이런 체험이 나에게 이런 영향을 주었다며 스스로 의미 부여에 열심인 예가 많습니다. 그러나 필 나이트는 이 책 내내, 자신의 정직한 느낌과 추억의 재생에만 열중할 뿐 어떤 주관적 평가를 삼가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혹 "교훈"을 얻고자 이 책을 통독하는 이라면(책을 꼭 그렇게 읽어야 할 이유는 성인에게 없지만), 그가 치러낸 여러 소소하거나 큼직한 체험들에 대해 독자 스스로가 의미 부여를 해 가며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부도 그닥 잘하지는 못했고(나중에 회계학 조교수 노릇을 하며 자격증 지도도 한 걸 보면 분명 공부머리로도 평균은 훨씬 넘습니다), 운동에서도 2인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자신의 아버지에게나 스승에게나 뚜렷한 인정을 받지도 못했던 그는, 이상하게도 "신발"을 다루는 동안만은 무한히 행복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가장 아끼는 신발을 소비자에게 보급하는 일을 해 보기로 합니다.

명시적으로 강조하진 않지만 그는 세상에 부대끼고 다양한 사람들을 접촉하는 그 자체를 즐기는 타입 같아 보입니다. 이런 유형 중에는 두뇌 싸움 중에서 벌어지는 스릴을 즐기고, 상대와의 대결에서 이겨 승자의 쾌감을 맛보며, 타인을 결국 자기 뜻대로 장악하는 맛과 사업의 성취를 함께 누리는 이들이 많죠.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이 대개 또 그렇기도 합니다만 이분은 그런 타입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런 대결적인 면보다는, 자신의 열정을 남에게 전파하는 그 순간을 남달리 애호한다고나 할지. 이분은 대학생 시절 백과사전부터 해서 여러 물건을 파는 외판원 노릇도 했다는군요.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런 고생을 사서 벌이는 아들을 두고, 그 아버지(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가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겼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외판원 생활 중 단 한 번도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던 청년이,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화를 취급하게 되자 그 자신도 놀랄 만큼 큰 매상고를 올렸다는 사실이죠.

오니쓰카 운동화의 유통권을 얻어 막 사업을 시작할 때, 어느 청년(나이트가 이 책에서 묘사한 대로라면 "상체는 빈약하나 하체 근육만 이상하게 발달하고선, 뭔가 켕기는 듯한 표정으로 찾아와")이 "벅(필 나이트의 아명)이란 분 여기 계신가요?"하고 집(아버지와 함께 살 때)에 찾아와서까지 신발을 사 가더라는 겁니다. 그 청년은 아마도 필 나이트 자신과 매우 닮은 타입이었을 겁니다. 사람이 그 가진 열정이 뚜렷하면 이처럼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법이겠는데, 오니쓰카의 중역들을 만나 새파란 대학생이 유통권을 따 낼 때도 오직 그 열정 하나가 눈에 띄어 일이 성사가 된 거겠죠. 그는 학생 때도 세계 일주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부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도 않고(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말로 보아 중산층 이상이 아니었나 봅니다. 더군다나 생활 터전이 오레곤임을 감안하면 뭐) 기어이 여행 자금을 마련, 세계 구석구석(말 그대로더군요)을 돌다 이런 일까지 연이 닿은 거죠.

후지산 등정 과정에서 첫번째 여인을 만났는데, 자신과는 달리 동부에서 엄청 몀문가 출신인데다 인문 교양에 밝은 처녀였다고 하는군요. 부티나는 차림이었으나 왠지 "부활절 달걀" 같은 차림이라 웃음이 나기도 한 "남친 같아 보이는 청년"과 함께 있었는데, 자신을 덜 따분하게, 더 재미있게 해 줄 만한 필에게 갑자기 끌렸는지 둘은 급속히 친해집니다. 이 새러라는 처녀를 집에도 데려가고 부모님께 소개도 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 서로 안 맞는다는 걸 알고 편지 몇 번 왕래 끝에 헤어졌다고 하네요. 이런 체험을 털어놓는 모습이랄까 문체도 실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 솔직하고 소심해서 어떤 실감이 느껴졌습니다. 이분은 나중에 모 대학 조교수 생활을 하며 두번째 여자(팍스)를 만나는데, 대체 이런 분이 어떻게 사업을 할까 싶을 만큼 숫기 없는 태도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습니다.

이런 그이지만 사업을 확장하고 기존의 인맥을 활용하여 내부 조직을 다지는 과정에선 얄짤없이 냉혹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게 드러나서 다소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본래 그런 성격이라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과업을 이루는 대목에선 정(情)보다 일이 우선이라는 거겠죠. 특히 "내가 (부하인) 아무개를 대하는 것처럼 그가 XX를 대하는 게 아닌가에 생각이 미치니 매우 서운해졌다"고 털어놓는 대목에선, 솔직한 건 좋지만 나중에 이 회고록을 읽을 수도 있는 그 당사자(실명이 나옵니다)는 뭐가 되는 건지 좀 난감해지더군요. "모두가 반항아를 자처하던 시절 나처럼 유순한 청년이 있다는 게.."를 회고하는 그이지만, 회사 안에서 자신에 반기를 드는 세력에겐 단호히, 혹은 티 안 나게 진압을 시도하는 걸 보면 기업이나 기업가는 어디서나 다 비슷하다는 점을 확인하게도 되었습니다.

초일류 브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나이키가 2인자, 혹은 그보다 훨씬 못한 브랜드로서 이만큼이나 미미한 출발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요. 딱히 유리한 출발점이 아니었는데도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분야에 쏟는 열정만으로 그 많은 난관을 헤치고 간 과정에서, 어떤 비틀린 욕심이나 거짓이 드러나지 않는, 정직한 기업가의 단면이 엿보인 점도 좋았습니다. 책에 표현된 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으나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려는 젊은이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에 접근해야 하는지는 절실한 교훈을 알려 주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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