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불멸주의자 -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죽음의 사회심리학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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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두고 흔히 "필멸의 존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저항하려고 듭니다. 이 책의 제목 일부에는 "불멸주의자"라는 개념이 쓰이고 있는데요. "~주의자"가 있다면 "~주의"도 이미 정립된 용어가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서 분명한 출처 제시와 함께 쓰인 용례로는, 우리가 잘 아는 앨런 해링턴의 <불멸주의자>가 있을 뿐이고, 워낙 광범위한 출전과 실증 연구 결과들을 인용하는 이 책의 부지런한 태도가 꼭 아니었다고 해도, 다른 쓰임새나 맥락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불멸주의자"는 해링턴의 그 함의, 혹은 명시적인 정의에 따라 이해하면 충분하겠고요. 해링턴의 그 책이 다소 난해한 것과는 달리 이 책은 너무도 재미있게 쓰여져 있습니다. 어찌나 재미있는지, 이 책에서 아무리 설득력있는 결론을 제시한다고 해도, 우리가 필멸의 존재라는 그 사실이 조금도 극복되거나 부정되지 않는다는 냉혹한 진리를 잠시 잊을 만큼입니다. "필멸이 필멸인 줄 깨달음으로써 오히려 필멸의 비극성을 잊는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기에 충분한데, 아닌게아니라 이 책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가 이 대목을 재미있게 짚는 것이기도 합니다.


책의 첫 부(部)가 "공포 관리"라는 주제라고 나와서 이게 대체 어떤 내용을 다루는 건가 궁금했었는데요. 여기서의 "공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킵니다. 생존을 위해 구비된 강한 체력, 치명적 살상력, 회복 능력 등을 가진 동물과는 달리, 우리 인간은 육체적 자질로만 따지만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이라서인지, 다른 동물에게는 과연 그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이라도 있을지 의심스러운 "죽음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존재하고, 일상에서건 특별한 위기 상황에서건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통제할 필요가 존재했다는 거죠.

어떻게 하면 "나의 육신이 사멸하고, 그에 따라 나의 정신까지도 완전히 없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잘 달랠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조상들뿐 아니라 그 조상들이 체득해 지금의 우리들에게 전수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저자들은 일단 "자존감"을 꼽습니다. 이런 자존감은, "나에게는 연약한 육신 외에 그 무엇이 있음"을 스스로에게 강렬히 납득시켜, 죽음 그 자체, 혹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다른 위협, 다른 생명체 앞에서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다만, 책에서는 특별히 첼리스트 요요마의 예를 들어, 진정한 자존감이 잘 형성된 인간은 딱히 거만하지도, 딱히 비굴하지도 않은, 자신 내면의 평안을 유지할 정도로만 긍지를 가진 유형임을 역설합니다. 무작정 허장성세를 벌이고 거짓말을 지어내는 식으로 과잉행동을 벌이는 인간은, 자존감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었기에 이 같은 특성을 보인다는 거죠. 감정의 통제를 수단으로 "죽음에의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을 개발했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혹 미심쩍어하는 분들은, 우리가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 우리의 연약한 운명"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는 우리의 내면이 과연 무엇 덕분에 그럴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보시면 납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 자존감만으로는 이런 공포를 완전히 떨치기에 불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유한한 개체의 숙명을 넘어 더 긴 단위의 생존과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상징적 불멸성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데에까지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인간은 먹고사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기 이전에도, 사후 세계의 이미지를 애써 그려낸다거나, 죽은 동료나 조상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의식(儀式)을 행했다는 뜻입니다. 본격적인 도시 시설의 정립보다, 죽은 자를 기리는 사당들의 건립이 먼저라는 고고학적 증거는 우리에게 많을 것을 시사합니다. 동물들이 당장의 허기를 면하는 일 외에 어떤 다른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모습을 보신 적 있습니까? 인간은 이 "죽음에의 공포"가 어떤 식으로건 마음 속에서 진정되지 않으면 다른 일을 못하는 그런 존재였던 겁니다. 여기에서 종교, 예술 등 문화의 상당 부문이 파생하고, 예컨대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대사를 앞두고서도 군사 훈련보다 제의에 더 신경 쓰는 특이한 풍습이 생긴 거죠. "내가 내일 싸움에서 죽어도, 나는 그저 죽어 사라지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것이다!"

내가 죽고 나서도 존재가 사멸하지 않고, 천국이나 그 어떤 피안에서 복락을 누릴 수 있으려니 하는 믿음만으로는 그러나 뭔가 부족합니다. "자존감"이란 외모의 아름다움, 성격이나 자질의 긍지 등에서 유래하는데, 외모란 나이가 들면 시들게 마련이고, 다른 정신적 특질은 (때로는 생존 경쟁에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을) 타인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확고한 근거를 갖기 힘들죠. 물론 참된 자존감은 내적인 잔잔한 확신이지 타인의 인정 여부에 달린 게 아니긴 합니다만 여튼 이것만으로는 유한한 존재의 숙명에 대한 절망감을 완전히 떨치기 힘듭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신념, 살면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 따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추상적이긴 하나 때로는 구체적 사물보다 더 강렬한 위력을 발휘하는 이런 가치관상의 여러 이념들은, 인간이라는 종(種)이 지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지속되는 게 당연합니다. 불멸의 신념, 가치를 위해 살다 죽은 이들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이런 기억 속의 칭송이 육체적 삶의 짧은 수명을 보상해 주는 것으로 여기기에 이릅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하지 말라!"

책에서는 그런 까닭에, 어떤 인간(들)이 경우에 따라 다른 신념,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대하는 동기가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아메리카 대륙(뿐 아니라 여느 다른 식민의 예에서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에 처음 정착한 유럽인들은, 그들을 환대하고 아무 생존에의 위협이 되지 않았으며 지극히 선량한 품성을 지닌 원주민을(모두가 다 그랬다는 게 아니라 특히 그런 특성을 지닌 종족까지도) 잔인하게 학살하고, 학살하면서 쾌감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이 책의 태도에 따르자면, 자신들이 소중히 믿고 받들어온 가치에 반하는 삶(그것이 더 우월하고 더 성숙한 것임에도)을 사는 타인들이, 이제 자신들의 가치관을 우습게 여길 수 있다는 사실이, 직접 생명에의 위협을 가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분노를 자아내었다는 겁니다. 중근세 유럽이나 인도, 중동에서 왜 아직도 종교로 인한 생사에의 분쟁이 잦은지도 이것으로 설명이 가능한 게, "죽음에의 공포"를 떨치는 수단이 그들에게는 종교 외에 딱히 마련된 바 없었다는 뜻입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으니 죽자고 싸움이 날 밖에요. 이런 이론이라면, 상대가 자신의 신상을 위협한 것도 아니고 감정상의 상처를 줬을 뿐(?)인데도 죽기살기로 칼부림이 나는 이유도 다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숙명적으로 "슬픈 불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될 수만 있다면 전혀 슬퍼할 이유도 없거니와 노력을 쏟는 매 순간이 환희로 가득찰 것인데, 이 생의 기쁨이 그저 유한할 뿐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도 슬픈 것입니다. (책에 이런 말은 나오지 않지만) 이 생에서의 삶이 기쁘면 기쁠수록 그에게는 더 근원적 절망을 안겨 줄 수도 있습니다. 미인이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며 더 큰 한숨을 짓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싯다르타 역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존귀한 신분이 가져다 준 너무나도 큰 행운 때문에, 그에 비례하여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절망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의 절망이 너무나도 컸기에, 그 절망의 크기에 비례하여 그가 얻어낸 깨달음의 크기도 실로 위대했던 거죠.

이 책에서는 다양한 연구자,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인용되지만, 특히 오토 랭크의 여러 재치 있는 표현과 함축적인 금언이 인상깊습니다. "상징적 불멸을 취득"했다든가 하는 문장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게 억울해서, 상징적으로 뭘 만들어 내어서라도 영원히 살 것처럼, 혹은 "이것만 해 내면 영원히 사는 거나 마찬가지임!"을 인간들끼리 합의하곤 근원적 슬픔을 떨쳐 내려 했던 그 발버둥.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은 공개된 자리에서 성행위를 하지 않는데, 이 역시 종의 신체적 특질에 기인했다기보다는, 후손을 남기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물의 모습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한 정신적, 후천적 동기라는 설명이 그럴 듯합니다(확실히 다큐에서 야생 동물의 교미 장면을 보면 뭔가 슬퍼지는 느낌이 들긴 하죠). 이는 어디까지나 문화적 요인의 학습에 기인한 것으로서, 대낮의 공개 성교가 묵인되는 일부 종족도 있다는 반증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럼 공개된 자리에서의 식사는 왜 금기시되지 않는가?" 제 생각에는 인간의 양분 섭취는 날것을 그대로 뜯는 게 아니라 "요리"라는 문화적 프로세스를 거치는 행위이며, 이 때문에 부끄러움은커녕 오히려 존재의 위신을 과시하는 의미까지 갖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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