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오브 카드 3
마이클 돕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푸른숲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정말 최고의 필력과 최고의 상상력입니다. 구절구절이 명언이고 배경이 영국을 벗어나는 대목에서도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 실사가 바탕된 사연이 이어지는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놀랍니다.

<하우스 오브 카드>는 드라마 포맷도 정말 재미나게 만들었지만, 그 진미와 진수를 접하기 위해서는 원작 소설을 읽는 게 필수입니다 정말. 만약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 일시적 센세이션이나 동시대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감적 특권 등 거품이 일절 걷히고 나도, 이 <하우스 오브 카드> 시리즈는 불멸의 걸작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저 정치 풍자 소설(풍자라곤 하지만 경박한 유머 코드에 의존하는 바도 별로 없고요) 영역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세련되고 기발한 대사(이 매력이 가장 크죠), 소설가(작가가 전업 소설가 출신이 아니지만)가 가장 들여다 보기 힘든 정계의 초(超) 엘리트들의 생활상을 세밀하고 핍진하게 묘사한 그 성취, 런던의 정가에만 그 초점이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 정치, 나아가 어느 나라에나 두루 적용될 범속하고 타락한 세태에의 비판 등이 심오하고 보편 타당한 주제에까지 발전하는 그 속 깊은 구조.... 이 정도면 반 밀레니엄 전에 나온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비겨도 어디 떨어질 것 없습니다.

정치 엘리트들(대부분 신분상으로도 귀족 출신이죠. 물론 그 부자-피트 등 몇만 빼고)의 그 소피스티케이티드한 말투와 사고 방식은 평범한 작가가 쉽게 상상, 모방, 구현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특별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특별한 사고방식을 갖췄고, 대개는 우월한 부모에게서 특별한 두뇌까지 물려받았기에 발상 자체가 남들보다 다른 게 보통이죠. 평범한 두뇌가 비범한 이들의 행동, 생각에 접근한다는 게 어렵고, 그래서 이런 특별히 선택받은 계층과 집단의 생활상은 그들을 가까이서 접해 본, 본인도 그들과 출신성분, 정서, 가치를 공유하는 작가만이 허구의 세계 속에서 재창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선택받은 특수 계급의 잘나가는, 아름다운, 우아한, 남이 넘볼 수 없는 이야기만 가득하다면 오히려 독자들에게 반감이나 사기 딱 좋았겠지만, 다들 아는 것처럼 이 소설은 이들 선택받은 정치인들과 그들의 축복받은 가족들이 얼마나 범속하고, 평범한 이들보다 모럴이 더 타락했으며, 일초일각을 치사한 계산에 매달려 지내는지를 신랄하게 드러내고 풍자합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다우닝가와 웨스트민스터의 터줏대감(나이 불문)들이 찌들고 이기적이며 교활한 부류는 아닙니다. 사람인 이상 그렇게 남 보여주기에 몰두하며 거짓을 늘어놓고 매스컬레이드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튼 한때 정가에서 촉망받는 장래를 보장 받았다가 한순간에 몰락을 맛본 작가는, 어느 정도는 분풀이삼아, 어느 정도는 "나라(나아가 세계)가 이런 식으로 가선 안 되겠다"는 우국충정의 발로에서(?), 또 어느 정도는 "이게 진짜 나의 적성!"이라는 각성에서 이 멋진 장편을, 완성도의 희생 없이, 이어갑니다.

이 3권은 다소 뜬금없이, 수십 년 전 아직 영국 통치 하에 놓여 있던 키프로스로 배경이 옮아갑니다. 프랜시스 어카트가 아직 새파란 장교 시절의 과거가 잠시 독자들 앞에 제시되는 거죠. 서유럽에서는 귀족의 자제들이 장교 신분으로 군에서 복무하는 게 특권 중 하나입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왜 저렇게 능력 좋은 인력이 고작 부사관(NCO)에 머무나 하고 의아할 때가 있는데, 그게 다 출신 계급이 나빠서입니다. 이 앞부분에서도 청년 장교 어카트와 그에 항명하는 병장의 이야기가 잠시 나오죠. "영국놈들 물러가라! 키프로스 독립 만세!"를 외치는 꼬마 둘이서 위험한 화기를 갖고 숲 속에서 영국군 소대와 대치하는데, 냉혹한 귀족의 피가 흐르는 우리 프랜시스께서는 "숲에 불을 질러 애 둘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사병들은 "애들이나 죽이라고 내가 군에 들어와서 총을 잡은 건 아니다"고 반발하지만, 지혜나 용기가 탁월하진 않아도 상황의 정치적 수습에는 (벌써 그 시절부터) 발군의 수완을 보였던 프랜시스는, 망설임 없이 (비교적 쉬운) 군사적 행동으로 손수 후환의 빌미를 제거하고 동시에 현장에 있던 사병들과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할 손씀을 통해) 이후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는 진실의 은폐를 위한 타협에 성공합니다. 이럴 경우를 두고 "될 성 싶은 나무는.. "이란 속담을 쓰는 거죠?

세월은 흘러흘러 무대는 이미 그가 다우닝가 관저의 주인으로 십 년째 권좌에 머무는 현재로 옮겨옵니다. 근본 없이 얄팍한 처세술만으로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오른 자는 결정적 단계에서 몸에 배지 않은 센스의 결핍으로 자기 신상과 자기 집단 전체에 누를 끼칠 과오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제프리 부자-피트(Geoffrey Booza-Pitt)라는 젊은 장관이 바로 그인데, 이 이름에서 "부자"는 富者나 父子도 아니고 강부자 김부자도 아니며 영미권에서 흔히 착각하는 것처럼 미들네임도 아니고, 성씨의 일부분입니다. 이 푸른숲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은 적절하게도 하이픈을 다 살려 표기하고 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번역본은 셰익스피어의 출생지(이 소설에서 중요한 배경 구실을 하는, 당연히 그 연극 상연 전용 극장 소재지이기도 한) 스트랫퍼드온어펀에이번 같은 지명을 띄어쓰기 없이 다 붙여쓴다든가 하는 적절한 태도를 줄곧 유지합니다.

야, 일국의 수상(총리)를 해먹으려면 이처럼, 순간의 재치로 여러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수완이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독자로 하여금 절로 들게, 프랜시스는 젊은 시절 그 능구렁이 같은 정치술이 어디 가지 않아, 저 서투른 부자-피트가 지역당협 위원장(우리식으로 따지면요)의 아내(아마 트로피 와이프겠죠?)와 저지른 부정을 무마해 주고, 동시에 이 부자-피트의 정치생명을 한번에 끝장낼 "자술서"를 챙깁니다. 세상 사는 데 거저가 어디 있겠으며, 지금껏 근본도 없는 놈을 그 자리까지 끌여올려준 은덕이 또 얼만데 이 정도는 받아내야죠.

본래 저렇게 성씨에 하이픈이 붙으면, 부계 모계 어느 쪽이든 성씨에서 떨굴 수 없는 명문 집안 간의 결합이며, 대개 한사(限嗣) 상속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하기 위한 창씨일 수 있습니다. "피트"라고 하면 옛 잉글랜드 귀족 가문의 방계 같은 느낌이고, "부자"는 모르긴해도 남아프리카에서 보난자로 한몫잡아 큰 부를 일군 보어인(아프리카너) 가문 같은 느낌도 주지요. 족보가 너무 분명하면 위조한 게 들통날 테고 해서 저런 식으로 출신 성분을 조작하는 건데, 근본 없는 이들이 자신의 구린 과거를 감추는 흔한 수법이라 하겠습니다.

지은 원죄의 끈덕진 응보가 어디 안 간다고, 수십 년이 흘러 버젓이 일국의 수상 직위에까지 오른 지금, 다시 키프로스. 지중해 어디나 다 있으나 유독 여기만 빼고 매장된 석유가 기를 쓰고 비켜간 그 키프로스에, 왜 대체 석유가 (그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매장되어 있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드디어 밝혀지는데, 이런 미공개 정보는 먼저 발견한 자에게 엄청 유리한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대통령님, 설마 여기에 관심이 없진 않죠?" 그 대통령(북키프로스)은 다시 영국의 수상에게 의사를 타진합니다. "관심 있으시죠?" 정치가 부패라는 악령과 손을 끊을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엄청 돈되는" 미공개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직위이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이 물러가니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 종전보다 더한 지옥상을 연출하는 한심한 작태도 이 소설 속에서 또한번 조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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