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이야기 - 역사를 바꾼 은밀한 무역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사이먼 하비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밀수라는 주제가 이렇게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긴 역사를 가졌을까? 이런 궁금증이 드는 분들이라면,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의 탄탄한 공적(公的) 사회 구조가 얼마나 개개인에 큰 혜택을 제공하는지 잠시 잊었을 수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무역의 역사는 곧 밀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내가 사는 고장에서 나지 않는 산물인데, 어쩌다 운이 좋아 한번 구해 써 보니 그렇게 요긴할 수가 없더라, 뭐 이런 반응이 퍼지면, 그래서 그 물산을 갖고자 하는(수요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모험심 강한 이들은 멀리라도 가서 물량을 확보한 후 고향 사람들에게 풀어 놓고 한몫 크게 잡자는 생각을 품을 만합니다. 그 타향에서 이 물자가 발에 채일 만큼 흔하다면 더 이문이 크겠음은 말할 것도 없겠고요.

헌데 국가는 이런 장사치들의 행태에 늘 주목합니다. 농업처럼 수지 구조가 빤한 산업에도 세금을 일일이 물리는 게 나라인데, 하물며 장사치들의 이런 크게 이익이 남는 경제 활동에 눈을 감을 수는 없죠. 한편으로 풍토병 등의 유입 가능성은 관리들의 개입에 좋은 구실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국경을 넘는 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단 나라에서 들춰 봐야 법도에 맞다고 법으로 정해 버립니다. 들춰 보는 김에 세금도 매겨야 정석이라며 서슬이 퍼런데, 거칠 걸 이처럼 다 거쳐서는 남는 게 없겠다고 판단한 장사치들은 밀수를 시도합니다. 태초에 무역과 국경과 세관이 있었고, 밀수는 그 형들과 몇 초 사이를 안 두고 태어난 쌍둥이 동생입니다.

다만 근대형(?) 밀수 중 규모가 크고 우리들 현대인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역사적 사실들이라야 시간을 내어 책장을 넘기는 보람이 있겠으므로, 저자께서는 특히 근현대사에 제법 굵직한 족적을 남긴 "밀수의 대가, 엄청난 스캔들"에 초점을 두어 이 두꺼운 책을 채워 나갑니다. 밀수라는 위법, 변칙 행위에 주안을 두었을 뿐 내용은 흥미진진한 대중 역사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우리 독자들에게 꽤 알려진 이들이 대부분인데, 다만 그들이 행한 "밀수"를 중심 축으로 바꿔 이들의 행적을 살피니 새삼 경제구조와 정치적 행위 사이에 그간 눈에 안 띄던 분명한 함수관계가 부각되는 맛이 있더군요. 물론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밀수도 했었어?"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짓"도 하고 남았을 대담성을 갖춘, 사악한, 혹은 과감한(?) 품성을 지녔음을 우리가 익히 알죠. "밀수"에 활동상의 중심이 놓인 채 관찰되는 그들은 일견 찌질하기도 하고, 반면 그들의 "미션"이자 이 책의 사실상 주인공인 밀수는 의외의 밀도와 무게로 독자 앞에 그 존재감을 뽐냅니다.

카리브해는 보통 미국의 뒷마당으로만 알려져 그 먼 과거에 어찌 세계사의 중심으로 등장했을까 하고들 착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죠. 이미 대항해시대에 이곳은 거대 해양 세력의 각축장이자 엄청난 물량의 주된 수송, 교역 루트 중 하나였습니다. 요즘은 절판된 가일스 밀턴 저 번역서가 한때 한국의 독자들에게 큰 인기였는데(도정제 실시 전 7,80% 할인 아이템으로 아주 자주 노출되었죠). 이 책의 1장은 그 책의 전권 내용을 요령껏 압축하다시피(직접 참조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책이 더 재밌게 쓰여졌다는 게 제 개인적 평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이만큼이나 "남는 장사"를 했으니 VOC가 그만큼 행세를 했던 거고(그 이전 시대 포르투갈, 스페인의 성세도 당연 다뤄집니다), 심지어 교회(가톨릭)까지 끼어들어 성사(sacrament)의 미명 아래 이 검은 거래에 끼어 구린 돈을 챙기네요. 드레이크, 존 호킨스 등 요 시절을 누빈, 불세출의 악당 들도 불려나와 재미있게 지면을 채웁니다.

"독점"은 예외적 병리 현상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극대화를 노리는 상인, 사업가들이 필연적으로 일구려 애쓰는 궁극의 진화 단계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비판과 지적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몸 속에서 자라나는 필연적 독소"를 제거해야 하는 절실함이 깃든 단계입니다. 미국에서 독점 방지법에 대고 "부정경쟁방지" 같은 타이틀, 명분을 꼭 붙이려 애쓰는 게 다 이런 이유죠. 아무튼, 이 이른 시점에서도 벌써 "독점"에의 집요한 노력이 사방에서 작용했는데, 이렇게나 풍성한 이익을 안겨주는 무역의 텃밭을 근본 없는 해적들에게 넘길 게 아니라, 국가(혹은 그를 위원회 삼아 뒤에서 조종하는 사업가들)가 직접 관장하려 든 게 2장의 주제가 된 역사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전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각축전을 벌인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아직 잉글랜드이기만 하던 시절)의 쟁투가 주된 뼈대네요.

3장은 이처럼 국가가 직접 나서 무역을 통제, 지배, 장악, 독점하려던 시도가 (해적 사이가 아닌) 국가들 간의 치열한 분쟁으로 비화했고, 어느 정도 타협과 우열 상황이 가려지면서 안정적으로 (각국의) 공적 시스템에 편입한 후에도 또다시 암암리에 성행했던 밀무역의 실상, "진화된 모습"에 대해 다룹니다. 1장에서 "뛰는 국가에 나는 밀수꾼"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요즘 미드를 봐도 잘 나오지만 마약 단속을 시도하는 공권력의 수단이 얼마나 정교하게 발전합니까. 그런 와중에서도 마약 카르텔의 수법은 언제나 이런 법망을 피해 교활한 수단을 더 발전시키는 작태가 잘 드러나죠. 이익이 생기는 곳에 뛰어난 두뇌가 몰려들 수밖에 없고, 항해 기술의 발달 덕에 이런 밀무역의 무대는 전세계를 향해 넓어집니다. 이 와중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들은, 기독교로 거짓 개종하여 생활의 터전을 지키려 든 유대 상인들이군요.

앞 단락에서 잠시 마약 밀수에 대해 언급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4장에서는 구 스페인 제국 식민지에서 어떤 과정으로 여전히 밀수가 성행했고, 이 오랜 밀수의 전통(?)이 현대의 마약 카르텔로 계승되는 과정, 그 와중에서 그런 현지의 독특한 풍조가 빚어낸 대중 문화에까지 화제를 옮겨갑    니다. 이 책의 가장 빼어난 점은 이처럼, 어떤 단선적 연대기 구성에 그치지 않고 지역을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현대사의 주요 이슈에까지 분석의 기조를 이어간다는 점이겠습니다. 네덜란드 장사꾼들. 그리고 잉글랜드의 라이벌들이 워낙 큰 이익을 남기는 꼴을 보다 못한 프랑스도 동인도 회사 하나를 창립하지만, 부패가 그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여기서 "부패"라 함은 뇌물 수수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계약의 준수 등 폭넓은 신뢰의 기조가 사업가들 사이에 형성되었는지를 두루 가리킵니다. 라틴 계의 동인도 회사, 혹은 그보다 선배격인 스페인 제국의 체제가 본토에로의 영속적 번영으로 이어지질 못하고 일부 토호들의 배만 채운 채 흔적도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소재를 던져 줍니다.

로버트 만드린 같은 자는 바다에서뿐 아니라 육상에서도 자치국과 제국을 오가며 현란한 밀수의 기술을 뽐낸, 일종의 협객이나 의적처럼 떠받들어지던 괴한이죠. 저자는 에릭 홉스봄(물론 우리가 아는 그분)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기이하게도 왜 이런 "전설적인 밀수꾼"들이 범죄자로 인식되지 않고 민중 영웅 혹은 문예 속에서 이상화한 거물로 미화되었는지를 짚습니다. 화제가 여기에 이르고 보면, 대체 "밀수"가 얼마나 일반 민중의 생활에 밀접히 닿은 경제활동이었는지를 실감합니다. 제가 로버트 만드린의 예를 접할 때 언제나 떠올리는 인물은, 광해군 연간에 가도를 점령한 희대의 밀수꾼 모문룡입니다. 그를 원숭환이 처형한 건 황제의 국고를 축낸 대형 범죄자에 대한 당연한 의율이었는데, 이런 정당한 법집행을 이룬 그가 도리어 환관, 북경의 대상인들의 미움을 사 능지처참되고 만 건 이런 배경이 따로 작용해서입니다. 침체에 빠진 수도의 경기를 유례 없이 살린 그를 왜 죽이냐 이거였죠.

12장으로 가면 아예 필그림 파더스의 대의를 더럽히는, 조지 워싱턴 등 4인방(이른바 "국부[國父]"의 위상)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밀수에 가담했는지 적나라한 폭로가 자세히 언급됩니다. 임칙서의 실패도 결국은 교역에서의 거대한 이문의 향방을 놓고 배후에서 벌어진 파워 게임에서 정세를 바르게 읽지 못한 점도 지적됩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추동력은 당연히 이익에의 욕구이며, 이런 벌거벗은 욕구를 밀수만큼 극명하게 구현하는 집단적 경제 활동사도 따로 없음을 이 책은 너무도 재미있게 설명해 줍니다. 밀수는 예외가 아니라, 차라리 대세를 이루는 치명적인 몸부림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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