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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자서전 -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지음, 양은모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3월
평점 :
밥 딜런의 청년기, 장년기에 그의 음악과 그에 실린 저항의 혼을 마음껏 공감하며 그를 지지하고 사랑한 세대라면, 지금쯤은 밥 딜런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주변에서 어르신 대접을 받을 만한, 나이 지긋한 분들이실 것 같습니다. 그런 어른들도, 때로는 예언자처럼 심오하고 때로는 지상의 어느 투사보다 단호하고 거칠며, 때로는 사춘기 소녀처럼 섬세하고 때로는 어느 문호보다 난해한 그의 내면을 속속들이 이해한다고는 쉬이 자신하기 어렵겠습니다. 국외자로서 정말 불측한 한 마디를 하자면, 간혹 그의 기인 같은 행보는 수수께끼 같은 장막에 자신을 감춤으로써, 신비주의로 상품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된 마케팅"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고 나서도, 그는 즉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중이나 미디어로부터 은둔하지도 않은 채, 예정된 공연을 그대로 이어가는 등, 일반에 새겨진 이미지대로 "과연 그답게 세속의 영예에 대해 초연한"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가타부타 대답이 없은 채 수상예정자와 위원회와의 소통이 이어지지 않자, 스웨덴 한림원 측은 다소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죠. 이로부터 며칠 후, 딜런은 "말문이 막힐 만큼 영광스런 일"이라며 처음으로 일성을 내놓았는데, 뭔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수상 거부" 같은 파격적 반응을 혹 보일 줄로 (괜히 삐딱한) 기대를 건 일부에서는, 실망스럽다며 딜런 역시 속물이라는 등 성급한 성토가 나오기도 했죠.
사르트르는 "작가(널리 예술가 포함)는 무엇인가의 도구가 되는 걸 거부해야 한다"며 이 커다란 영예를 거절하기도 했는데, 밥 딜런은 그런 제도권 철학자보다도 "야인성"이 부족했던 걸까요? 그에 대한 딱떨어지는 답은 아무도 쉽게 못 내놓을 겁니다. 다만 이 자서전처럼, 그닥 다변도 달변도 아닌, 과묵형에 가까운, 그야말로 오로지 작품으로만 말하는 타입에 가장 가까운 밥 딜런이란 인물에 대해, 자신의 생애와 내면 세계에 대해 이만큼이나 길게, 자세하게, 포괄적으로 털어 놓은 "문자 기록"은 매우 드물고, 앞으로도 어떤 책 모양새의 직접 증언이 나오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이 자서전은 (그의 팬이건 일반 독자에게건 문화 연구가에게건 간에) 매우 진귀한 존재입니다.
혹시 밥 딜런이 쓴 이 회상록은, 밥 딜런의 작품이나 수수께끼 같은 행보만큼이나 난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분이 있다면, 최소한 그런 걱정은 붙들어놔도 될 것 같네요. 역자께서는 후기에서 이 책을 두고 "의외로 솔직"하다는 평가를 하십니다. 이 말은 밥 딜런이 여태 거짓말쟁이 같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난해한 언어로 표현하는 게 전혀 아닌, 마치 대학 신입생이나 사춘기 소년이 "잘 모르겠다. 이러이러하게 다가왔다. 힘들었다. 예뻤다. 좋았다" 같은 솔직한 소감을 툭툭 던지듯 털어놓는, 쉽고 공감가는 문장으로 자서전을 채운다는 뜻입니다. 독자인 저도 읽으면서 "밥 딜런이 이만큼이나 격의 없이 소통하는 인물이었나?" 하는 의외의 감상이 밀려 오더군요.
저 개인적으로 몰입해서 읽은 대목은, 그의 청소년기, 그리고 성년기의 문턱에 막 들어설 시절을 아무 가감 없이, 또 특별한 의미 부여 노력도 없이 툭툭 던지듯 회상하는 전반부였습니다. 그가 유대 혈통이라는 점은 다들 알고 계실 텐데, 저항 정신 가득한 포크의 거인으로서 우리에게 각인된 어떤 이미지와는 달리, 어린 시절의 그는 "출세하고 싶고, 원하는 성공을 어른이 되어 이루고 싶은" 의욕 가득하고 야무진 꿈을 지닌 소년이더군요. 이건 그의 진정한 자질이나 개성의 반영이었을지, 아니면 유대계 가정이 일반적으로 자녀들에게 심어 주는 "향상에의 욕구"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속의 타락한 가치를 일절 부정하고 비웃는, 이후의 음악세계가 지향한 바와는 정말 대조적이죠.
이 시절 로버트 앨런 지머먼(유대계 독일 이민자의 후손인 그의 본명) 소년은 꿈이 컸던 만큼 좌절도 컸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가지만 어린 그는 사관학교 계열에 진학하여 입신하려는 장래를 그렸는데, 부모님은 대뜸 이런 의욕을 꺾고 다른 쪽을 꿈꾸라는 현실적 충고를 하시네요.
"너의 성엔 de도 von도 붙지 않는단다. 그런 배경으론 입학 지원을 해도 합격이 어려워."
사관학교나 ROTC에 대한 인식이 시큰둥한 우리 감각으론 이해가 안 되지만, 사실 미국에서 장성으로 전략가로 큰 명성을 남긴 이들 대부분은 명문가 출신의 자제들이 많았고 지금도 아주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고작 공부 하나 잘해서 명문대에 진학하는 게, 사실은 한국 같은 일부 사회에서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이죠. 소년은 (이 역시 지금 우리로는 상상이 안 되는 모습인데)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대체 애가 그런 책을 뭐하러 읽나 싶을 만큼, 분야와 범주를 가리지 않고 남독 다독하는 소년이더군요. 이는 그의 왕성한 지적 욕구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고전 독해 실력이 탄탄해야 명문대 진학이 가능한 미국의 현실(그때나 지금이나)을 감안하면, 미래에 대한 야무진 대비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 애가 정작 "너의 미래는 그리 넓은 가능성을 지니지 못했단다" 같은 말을 부모님께 들었다면, 얼마나 낙담이 컸겠습니까. 좀 농담을 섞자면, 밥 딜런의 작품에 스며 있는 그 깊은 슬픔이 혹 이때의 좌절에서 비롯한 건 아닐지, 또 현실에 대한 거친 저항도 이때 배양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네요. ㅎㅎ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불경스럽게도 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폄하가 될 우려가 있지만요.
밥 딜런의 회고가 재미있는 건, 자신이 꽤 어렸을 적의 기억일 텐데도, 그 책을 읽을 당시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표현을 책에서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물론 책에 대한 얘기 말고도, 자신이 이후 대중문화계에서 인정을 받고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하고 고독한 그 나름의 투쟁을 이어갈 때의 회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2004년에 집필되었는데, 이때 벌써 그의 나이 육십대 중반입니다. 메모나 일기 없이 그저 회고만 충실히 기록하기도 쉬운 작업이 아니죠. 이 자서전의 원제는 <Chronicles>인데, 제목에 충실하게도, 성장기부터 1960년대까지 그의 생이 밟아온 길을 소상히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정말로 "연대기"라면 밥 딜런의 골수 추종자가 아니고선 따라가기 지루하겠지만, 자신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던 기획자, 동료 예술가, 지인들과의 만남과 "그 느낌"의 회고가 중심이라서, 인간 밥 딜런의 내면과 감정을 엿보는 맛에 한 장 한 장이 재미있습니다.
프로이트에 대해선 "잠재의식의 제왕"이라며, 우습기도 하고 어린 소년의 소박한 딱지 붙이기 버릇이 그대로 드러나는 평가를, 육십 노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독일의 전략가 클라우제비츠에 대해선 "구식이지만 치밀하다"고 단평을 하는 등, 언제나 살아 있는 생기로 텍스트나 사물, 외부 세계를 접하는 그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장이라서 독자로서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하더군요("어떤 소년이었길래 이런 감성을 지니며, 노인이 되어서까지 그 기억을 간직할까?"). 덜루스라는 추운 지방의 소읍에서 뉴욕으로 상경할 무렵의 자신을 그는 가진 것 없는 떠돌이 청년으로 묘사합니다. 이때 동시 상영 극장에서 본 영화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과 <라 돌체 비타>였는데, 아무리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지만 단 한 마디로 "영혼을 팔고 세속적인 것에 열중하는, 비열한 괴물 같은 사내 이야기"로 요약하는 게 과연 그다운 관점이다 싶더군요. 두 영화를 다 보았지만 그렇게는 주제가 잡히지 않았기에 이런 그만의 시선이 더 참신하게 다가왔습니다. 언제나 참신했지만 나이 들어서도 그런 자신만의 개성이 전혀 타락하거나 감쇄하지 않았기에 더 흥미로운 점입니다.
자신만의 독보적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라면, 특히 나이 들어 평판이 확고해진 이후 타인의 영향을 그 젊은 시기에 받았다는 걸 인정하기에 인색할 수도(때로는 부정직할 수도) 있는데, 밥 딜런은 아직도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총각이 "그렇쥬 뭐"를 너스레떨듯 솔직하기 짝이 없습니다. 분석하지도 않고 포장하지도 않고, 내가 그 서툴렀던 시절 누구와 엮이며 기분이 이랬고 그 누구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며, 아직도 소년인 양 감정을 털어놓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가 "문학적으로" 무엇을 성취했는지는 평가가 분분할 수 있으나,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당대, 그리고 지금의 대중과 소통하는지는 책을 읽으며 독자로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쓴 책이라기보다, 전혀 가리는 바 없이(언제나 그랬듯) 자신을 표현하는 한 인간에 대해 알 수 있는 진솔한 기록을 만난다는 기대로 이 책을 펼치면 좋을 것 같습니다. 1970, 80년대를 다룬 후편은 과연 언제나 나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