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 디지털 기억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가
애비 스미스 럼지 지음, 곽성혜 옮김 / 유노북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인간 존재의 본질은 "기억"이라고 해도 큰 과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두뇌에서 쌓아온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진다면(그리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기까지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우리가 마주하던 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억은 그 사람이 앞으로 특정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환경과 자극에 대해 어떤 감성적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기 머리에 저장해 두는 기억에 대해 대강의 그림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가깝고 먼 장래에 대해 예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기억은 그래서 그의 과거일 뿐 아니라 미래의 청사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존재의 핵심을 규정하는 기억에 대해, 뜻밖에도 저자는 "인간 문명의 역사는 곧 기억의 외주화의 역사이다"라고 규정합니다. 이런 개념 규정에 전혀 낯설었던 독자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무도 생각 못한 영역을 가리키는 탁월한 정의(定義)"라고 바로 느낌이 왔습니다. 사람의 기억 용량에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기술 수준의 도약이나 습득한 지혜의 효과적인 전승, 전달을 위해서는 작은 뇌의 물리적 처리 능력에 마냥 기댈 수가 없고, "외주화"를 반드시 이뤄야 합니다. 기억의 외주화가 이뤄지고 나서 인류는 그 깨달은 지혜의 항구적 보존, 혹은 시공을 초월한 "공유"가 가능했고, 이 덕분에 문명은 비약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책은 이런 관점에서, 어떻게 과거에 인류가 "효과적인 외주화"를 이뤘는지 그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조명합니다. "배우는 방법을 배움"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애써 터득한 지혜를 외주화하여 개인의 한계, 시공간의 장벽을 넘어서게 하는 그런 지혜 역시, "메타 지혜"., 혹은 "지혜의 진정한 정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내용은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참으로 흥미로운 내용일 뿐 아니라, (저자의 말씀처럼) 엄청난 저장 기술 발달(디지털 혁명)으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이하고 있는 인류가 어떻게 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길 지에 대해서도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 줍니다.

저자는 방대한 지식, 데이터(의 저장)가 곧 "권력"이 될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으나 이슬람의 정복자들이 이집트에 쳐들어와서 저지른 만행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운 것인데, 그 장본인이 남긴 말 "꾸란과 같으면 필요 없는 동어반복이고, 꾸란과 다르면 그릇된 이단이다."가 유명하죠. 하지만 이 현상 이면에는 지식을 통제하고 해석하는 집단의 권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음도 또한 분명합니다.

인간은 호기심이 있었기에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무척추동물들의 평탄하고 모순, 갈등 없는 삶으로부터 멀리까지 궤도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진화는 마냥 고등생물로서 우월하고 안전한 생을 보장해 주는 경로가 아니며, "아담과 이브 설화"에서 보듯 위험하고 예측 불허의 개척을 요하는 새로운 생으로 옮아가는 도전 과정이었습니다. 거친 환경에 폭 넓게 적응하고 그로부터 성과를 얻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은 축적된 지혜와 기술을 "외주화"하여, 동료와 후손에게 효과적으로 공유시킬 필요가 있었지요. 이런 수요가 성공적으로 충족되었을 때, 인간은 무한한 성취감을 느끼며 눈 앞에 이뤄진 성과 외에도 앞으로의 험난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인들은 "기억의 외주화"가 부른 착시 현상을 차라리 경계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책만 가득 쌓아 두고 그 책 속의 지식이 책을 소유한 자신에게 당연히 체화되어 있으려니 하는 착각이, 그 당사자를 구제 불능의 바보로 만든다며 따끔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저자께서 이 일화를 인용하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방대한 지식에 대해 바로 모바일 기기를 통해 접근할 수 있고, 특별한 수련 없이도 바로 쓸 수 있게 가공된 지식을 어느 누구나, 심지어는 (소액의 데이터 이용료 말고는) 거의 치르는 비용도 없이(텍스트 정보는 바이트를 적게 소모하죠) 습득 가능한 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인공지능이 요즘처럼 세간의 뜨거운 화제가 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막연한 설정으로 인간이 묻는 질문에 기계음을 섞어가며 척척 대답을 내어주는 로봇이나 안드로이드, 혹은 엉뚱하게도 자동차 등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했지만, 저런 기술이나 존재가 현실화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는 다들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특히 구글 사가 선도하는 구호처럼, "빅 데이터를 통한 학습 능력을 갖춘 중앙 정보 처리 장치"가 이를 곧 현실화할 수 있을 듯 기대가 팽배하죠. 그러나 이런 기술이 바로 상용화하여 돈만 주면 사고 쓸 수 있을 만큼 두뇌(인공지능이 모방해야 할) 구조가 이론적으로 해명되었는지도 미지수일 뿐 아니라, (괜한 호들갑이겠지만) 그런 인공지능이 보편화했을 때 오히려 인류가 맞게 될 위기는 전혀 예기치 못한 재앙일 수 있다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볼 수 있는 혜택이 손에 잡히기도 전에, 그 부작용만큼은 여기저기서 그 단초가 감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재앙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은, 기억을 태평하게 외주화한 인간- 제 삶의 주인이어야 할 - 들이, 집단적으로 바보가 되어 간다는 징조입니다.

지금 우리가 외주화를 위탁한 매체는, 분별력도 없고 맹목에 가까운 식욕만 가진 디지털 디스크입니다. 반면 과거의 종이, 책, 파피루스 등은 그를 기록하는 인간의 지성과 판단, 재량이라는 에이전트를 거친 기록이며, 무작위 무차별의 정보 난장판이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모든 걸 다 기억하는 남자"의 예를 들며, 고통스럽게도 선별적으로 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된 인간은, 그 정보(기억)의 홍수 속에서 아무것도 취사선택할 수 없게 되며, 마침내 무엇을 알아 볼 수도 표현할 수도 없어 기억의 장악은커녕 백치가 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남자"나 결과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정상적인 우리 사정과 무슨 관계냐고요? 지금의 디지털 매체는 "어떤 것도 잊지 않고 유실하지 않고 모든 것 -사실뿐 아니라 거짓, 욕설, 사기, 허위 정보, 무의미한 헛소리 등 일체 -를 기록, 기억합니다. 이런 매체에 외주화를 맡긴 우리 인간은, 나중에 이 중에서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할 지 거의 선택의 마비지경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자는 그래서, 무슨 정보를 걸러야 할 지 "필터링의 효율화"를 의미하는 "디지털 리터러시(문해율)"을 강조합니다. 앞으로 정보의 진위와 효용을 판독하지 못하는 인간은 과거의 문맹자나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정보와 가용 자원이 많을수록 더 바보가 되기 쉽다는 이 기막힌 역설, "기억의 외주화"로 문명사를 정의한 저자의 혜안 덕분에 더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문명이 발달한다는 건 어찌 보면 이런 뛰어난 스승이 얼마나 많이, 자주 배출되느냐 같은, 양이 아닌 질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것 같아요. 간만에 너무나도 유익한 책 한 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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