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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첫사랑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귀한 신분과 태생을 지닌 이들은 주위에 주는 인상과 기품부터가 다릅니다. 민중은 대개 큰 복을 갖고 태어나 근심 없이 성장한 왕재(王材)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게 보통이지, 어떤 타도의 대상이나 저주의 객체로 삼으려 들지는 않습니다. 후사가 단절되었을 때 외국의 존엄한 핏줄이라도 모셔 와 국가의 긍지로 삼으려 드는 게 유럽의 지난 역사에서 오히려 상례였습니다. 다만 그 군주가 제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따스한 정치를 베푸리라는 기대가 그 전제로 붙습니다. 정녕 왕권이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닌 이상, 군주의 위엄과 복락은 생각보다 위태한 조건부 특권입니다.
<황태자의 첫사랑>은 예전 세대 어르신들에게 각별한 추억과 낭만의 문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발표된 지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이 오래된 작품은,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의 원작 소설이나 희곡 포맷보다. 두어 손을 더 거쳐 각색된 오페레타라든가 영화 버전으로 더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마이어-푀르스터는 (유감스럽게도) 비평, 대중 호응 양면에서 성공한 작가가 아니었고, (의외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현저한 재평가가 시도된다든가 하는 경향도 못 됩니다. 다만 그의 작품들 중 특히 이 소설이 독문학의 한 교본처럼 동아시아(의 독문학계)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받아들여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대단한 선진국으로 여겨진 독일의 유서 깊은 대학가와 그 낭만을 다룬 터라, 대학 문화가 아직 생소했던 이 지역에서 각별히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된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 짤막한 소설의 주제가, 과거에 대한 짙은 향수를 가진 어르신들이 그리 여기듯, "신분을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일까요? 독자로서 저는 오히려 그 원제목에 눈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싱겁게도 두 어절 "카를(칼) 하인리히". 이 소설은 알고 보면, 후계자 시기의 "졸업"과 젊은 주권자로서의 "입문기"를 겹치듯 겪고, 아울러 평민들과 무람없이 어울리며 세상의 맨모습을 잠시나마 엿본 청춘기의 황태자에 철저히 초점이 맞춰진, 아름답고 순수한 성장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성장물도 고통스러운 현실과의 조우가 남긴 상처라든가, 이후의 어떤 위안으로도 망각이 불가능한 좌절 따위가 내내 유령처럼 당사자의 뒤를 따르는 성장 스토리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그런 요소가 전무하다시피합니다. 물론 "반달리아" 학우회의 키 큰 학생과 겨뤄 얼굴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젊은 군주의 고운 피부에 패용된 장난스런 훈장 정도로 봐 줄 수 있겠죠. 중반 이후 선왕(황태자의 백부입니다)이 붕어했을 때, 우리 젊은 후계자의 안색이 유독 침통하여 백성의 동정을 한몸에 받았을 때, 사실은 이 상처가 (의도치 않게) 효과적 소품 노릇도 했겠고 말입니다.
소설의 전반부는 그간 궁정에서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위트너 박사의 엉뚱하고 천진스런 불평과 고민이 주도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농부의 소생으로 거친 식사에 위가 단련된 이가, 어쩌다 궁정까지 불려가 분수에 넘는 호강을 하다보니 각종 예법에 스트레스 받으랴, 기름진 식사에 일일이 적응하랴 그 나름으로는 큰 고생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정녕 돌이킬 수 없는 회오를 안겨 준 건, 태자를 키우느라 자신의 한 번뿐인 청춘기를 소진했다는 뜬금 없는 각성이었습니다. 그나마 선량하고 기품이 뛰어난 태자가 자신을 부친처럼 따랐으니 망정이지, 다른 어디에서 그 영어의 세월이 강요한 지루함을 보상받을 수 있었겠는지요. 재미있는 건 태자의 사실상 후견인으로서 일거수일투족을 감독해야 할 그가, "이 어린 청년(차라리 소년에 가까운)에게만은 그 청춘의 본능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풀어주고 싶다"는 제 나름 큰 결심을 하고, 하이델베르크의 어느 학우회에의 가입을 허락해 주는 대목입니다(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비콘 강을 건넘"). 여기까지가 분량상으로도 플롯상으로도 대략 절반의 지점인데, 이를 계기로 태자 역시 "다른 인생"에 한 발을 들여 놓습니다.
"첫사랑"은 첫사랑이 맞습니다. 처음 식당에서 긴 줄을 서 기다릴 때 주문 방식을 몰라 당황하는 태자에게, 키 작고 귀여운 아가씨 케티(애칭 케트헨)가 편의를 봐 주던 그 순간이 둘의 첫만남이었습니다. 태자의 주변을 서성이며 학생의 본분이란 깡그리 잊고 온갖 못된 짓은 다 가르쳐 주는 폭한 같은 대학생들이지만, 이 "커플"이 과연 "선"을 넘었는지는 독자로서 대단히 회의적이며,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두 주인공처럼 눈빛으로 손짓으로 마음을 나누는 그런 사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첫사랑은 진짜 첫사랑(순수 문예적 의미에서)이 맞는 셈도 되겠는데, 이들의 나란한 손잡음은 태자가 백부의 임종을 지키려 칼스부르크로 소환됨에 따라 넉넉히 예견되었던 종막을 맞습니다. 정말 <춘향가>의 묘사보다도 훨씬 못할 만큼 담백하고 심심한데, 우리가 <소나기>를 두고 끈적한 표현과 설정이 많아서 좋아하는 게 결코 아닌 까닭과 같겠네요.
늙은 식당 종업원 켈러만이 큰 마음 먹고 국경을 건너 한때 단골로 모시던 대학생 손님 "작센- 칼스부르크 대공"을 알현하러 옵니다. 이제는 군주가 된 태자가 그윽한 눈길로 묻습니다. "그, 식당에서 시중 들던 케티는, 내가 지금 다시 하이델베르크를 찾으면 만날 수 있을까?" "당연합죠." 한참 뜸을 들이고 다른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무심한 듯 묻습니다. "내가 떠나고 나서 그 여자애, 케티, 걔는 어쩌던가?" "많이 울었습죠." 현지에서 끝내 건강을 회복 못 하고 저세상 사람이 된 박사의 묘도 찾을 겸, 젊은 군주는 다시 철도편으로 서쪽을 향합니다.
잠시 사족을 좀 달자면, 사실 소설 속에서도 누누이 나오듯 작센-칼스부르크는 작은 공국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짐작 가능하듯 실존 작센-코부르크 공국을 모델로 삼은 가공의 정치 단위고요. "프로이센의 승인이 없어도.." 운운하는 대목이 암시하듯 이곳은 호엔촐러른 가문이 세습하는 독일 제국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카를 하인리히의 실제 신분은 "황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만, 여튼 이 소설의 주인공은 거의 한 세기가 넘게, 예전 세대분들에게 "황태자"로 눈감아져 통용되었으므로, 또 어차피 가공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사연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아득하고 친근한 감정의 환기를 겪게끔 우리들도 이분을 그리 모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공연히 불경스레(?) 족보와 법도를 따질 게 아니라 말이죠.
소설의 묘사는 구식 영탄조도 많았지만, 과감한 생략으로 독자에게 상상을 자극하는 게 좋더군요. "이봐, 왜 그 식당에 다들 발길을 끊은 거지?" "모르겠습니다. 대학가에서 그런 일은 흔하죠. 맥주가 맛이 떨어졌다든가 하는 이유로요." 옛 친구들인 학우회 회원들을 우루루 데리고 들어서자, 한때 하이델베르크 최고의 아이돌이었던 케티가 원망스런 눈길을 줍니다. "이제 다시 우리 식당에 오는 건가요? 나쁜 사람들." 그러고서 마치 유령이나 본 듯, 케트헨은 굳어 버립니다. 군주는 담담히, "이제는 예전의 귀여움이 안 느껴진 채, 나이든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케티였다."고 표현하네요. 왜 학우회가 식당을 바꿨는지도 이로써 짐작 가능한데, 케티는 일찍부터 밝혀 온 대로 십여 년 나이 차가 나는 비엔나의 어느 남성에게 곧 시집갈 계획입니다. 청춘은 이처럼 누구에게나 한 순간 격렬한 설렘으로 머물다 벚꽃처럼 아쉽게 지는 거죠.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아마도 마지막이 될 밤을 보내며, 젊은 군주 역시 자신의 철없던 시절과 영원한 작별을 고합니다. 슬픈 묘사가 딱히 없는데도 독자를 오래 애상에 잠기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