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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 라틴어 원전 완역판 ㅣ 세계기독교고전 8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평점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구교와 신교가 함께 존숭(尊崇)하는, 기독교 공통의 교부(敎父) 중 한 분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많은 저작은, 유려한 문장과 깊은 성찰,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어, 비단 해당 종교를 믿는 이들뿐 아니라, 신실한 태도로 일상을 살고 직분을 수행하려는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어 왔습니다. 교인에게는 신앙에 대해 새로운 눈을 깨워 주고,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사는 숱한 속인들에게는 한정된 인생이 결코 망상이나 부질없는 육욕으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따끔한 일침을 던져 주기에 족한, 경건하고 유익한 고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일반 독자들이 잘 알듯, 젊어서 방종한 생활에 빠졌던 탕자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육적(肉的)인 면에서도 그러하며, 어려서부터 최상의 교육을 받았던(생각 깊었던 그 부모와 풍족한 환경의 영향이 컸죠) 처지를 감안하면 정신적 지향의 면에서도 큰 방황을 거친 인생이었습니다(단, 이는 정통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입니다). 얼마든지 세속이 제공할 쾌락과 방만함에 빠져 원 없이 욕구를 풀 수 있는 생을 지속할 수 있었지요. 이랬던 그가, 느닷 순수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면 수용하고, 그 신앙에서 요구하는 대단히 청순한(온갖 금지사항과 절제의 주문으로 가득한) 생을 내내 유지한 것, 주교로서 모두의 모범이 될 만한 삶을 실제로 살아낸 것, 그리고 이처럼 빛나는 윤리철학을 담은 저작을 여럿 남긴 것 모두가 당대인, 그리고 후세의 연구자들에게 경이의 눈으로 비춰졌습니다.
당시 강조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은 "그저 공자님 말씀 같은, 듣고 읽기에야 백번 타당한 공허한 설교"로 유명한 게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만 해도, 그저 안락하고 결핍된 바 없고 욕망이 있으면 그때그때 충족하고 사는 그런 인생을 최고로 여깁니다. 연암 박지원의 짧은 글에도, "짧지만 당대를 호령하다 요절한 젊은 효웅(용모와 집안 배경, 출중한 무용 등 모든 걸 갖춤)의 삶(특정해서는 손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무 잘난 바 없지만 딱히 배곯고 풍찬노숙하는 시절 없이, 제 천수를 다 누리고 가는 삶 중 무엇을 과연 택하겠는가"가 논제로 등장한 적 있습니다. 이게 선택지 간 밸런스가 맞춰진, 제법 세간에 논쟁이 될 만한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은, 저 두 가지 선택지가 하나로 합쳐진, 즉 생의 초기 조건 모든 청춘의 복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수명을 복 받은 그대로 유지할 옵션까지 주어진 인생이었다는 점이 중요하죠. 나면서부터 받은 개인적 자질이라는 축복은 자신이 자의로 포기할 수 없지만, 여생 동안 누릴 수 있었던 물질적 환락은 그가 자발적인 각성에 의해 깨끗이 놓아 버리고 절제와 불편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꺼운 책에는, 어떻게 해서 그런 회심과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 그 빼어난 두뇌로 살핀 기억에 따라, 또 (나중에는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해지기까지 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양심에 기반하여, 상세하고 진솔하며 독자에게 교화적으로 유익한 이 "고백록"까지 저술한 것입니다.
방탕한 젊은이였던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을 섭렵했으며, 그 중에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사실혼 관계에 접어들었던 여인들도 있었지요. 책의 역주에도 나오지만 심지어 초기 기독교에서 정통성 있는 교리 확정을 위해 소집된 기관이었던 공의회, 그 중에서도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사실혼을 오히려 권장하기까지 하는 등, 오늘날의 엄격한 각 교파의 가르침과는 꽤나 거리 있는 태도였습니다. 교회마저 이런 태도였던 데다, 사회적 평판과 부귀를 고루 갖춘 집안의 자제였던 그를 두고, 어느 누가 비난과 고발의 눈길을 주기란 거의 상상하기 힘든 분위기였지만, 그는 스스로 이 시간에 대해 비통한 참회의 기억을 갖고, 소상한 문장으로 이 책 속에 기록합니다.
"한 여인을 쫓아내고, 다시 다른 여인을 들여 스스로를 정욕의 노예로 삼았는데,... 나는 이런 여인들만도 못한 비천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재미있는 대목(?)이라면, 역시 종교개혁 이후 여러 연구자, 주석자들이, 이런 진솔한 고백을 읽으면서 대단히 당혹스러워했다는 겁니다. "어찌 이런 청춘기를 보낸 이를, 성인이라며 공경하고 신앙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컨대 남의 여인을 탐내 아끼던 명장의 죽음을 사주하고, 마침내 그 여인에게 죄의 씨앗을 심기까지 한 다윗 왕의 죄과는 어떻게 되는 거겠습니까? 기독교 신자라면 이런 극단적인 죄악의 사례도, "과오는 인간의 몫이로되, 그 용서는 신의 몫이다."라는 원칙에 의해, 통회자의 진정한 눈물을 전제로 다 포용해야 마땅하죠.
역시 최상급의 교육을 받고, 명철한 두뇌를 타고난 인물답게, 그는 자신의 "기억"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고, 이 "기억"이 궁극적으로 유발하는 참회라는 정신작용에 대해서도 치밀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묘사합니다. "인간의 오감이 두뇌에 정보를 전달하고...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밀한 구역들이 기억 곳곳에 형성되어.. 사물들 자체보다는 그 심상만이 기억의 영역에 남아, 우리가 불러내면 거기 결부된 가치 판단과 함께 떠오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양 있고 감성 풍부한 수필가의 문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살뜰한 기술이며, 자연과학적 지식(그 당시 수준에서) 못지 않게 자신을 이토록 격동시키고 때로는 미칠 듯한 죄책감, 때로는 존재를 초월할 듯한 환희(이는 육욕의 쾌감과는 다르며, 이를 준별하는 건 그가 세속의 환락이란 환락은 다 맛을 본, 극히 드문 케이스이기에 가능하겠습니다)으로 가득차게 된 그 정신의 체험에 한껏 고양되었기에 이런 문장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다.
과거와 미래와는 달리, 현재라는 시간은 그저 찰나처럼 지나가버리는 모습으로만 존재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는 동양적 사고와는 차이가 큰 이해인데, 예컨대 우리 동양인들은 자시, 축시 등을 설정할 때도 시간의 한 지점이 아닌, 대략 두 시간 정도의 넉넉한 구간으로 파악합니다(예: 子時라 하면 밤 11시~1시 사이). 하지만 (오늘날 인류가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서양 철학(나아가 자연과학)의 관점에선 그저 1분 1초, 혹은 헤아릴 수 없는 작은 단위의 한 점이며, 여기에서 유명한 제논의 역설도 도출된 것입니다. 대체 포착할 수조차 없는 짧은 순간으로 흘러가버리는 이 "현재"에 갇힐 수밖에 없는 인간, 이 필멸의 삶이란 대체 어디에서 안식과 정당성을 구하겠습니까? 여기에서 그는 모든 환락과 욕구 충족, 사출과 배설의 쾌감 따위가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고, 영원 불멸의 존재인 신에의 귀의만이 유일한 선택일 수 있음을 잔잔히 표백합니다. 그의 신앙 고백은 이처럼, 겪을 수 있는 모든 진세(塵世)의 체험을 다 치른 후에 도달한, "놀아 본 형"의 믿을 수 있는 가이드입니다.
"폰티키아누스가 들려준 두 사람의 회심 이야기"는 다분히 동양적 처세의 미덕, 혹은 도교적(당시라면 아직 도교가 채 교단으로 성립하기 시작할 무렵이었겠습니다만) 각성의 어느 경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모든 지식을 체득하고, 무리 앞에서 성취를 뽐내고, 많은 재산을 모으고, 정적들을 지혜로 물리친 후, 우리에게 남는 것이란 과연 뭘까? 기껏해야 관료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황제의 첫째 가는 벗으로 남음이 고작이 아닌가?" 청담 사상을 입에 올리던 위진남북조기의 귀족 자제들과 하는 말에 별 차이가 없죠. 아마도 여러 경로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불교 등 여러 동양 사상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결정적 회심" 전까지만 해도 마니교(기독교와 불교의 콜라보)에 심취했었던 사실 역시 이를 방증합니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일신교의 절대적 표준과 영원성이 주는 신앙의 세계로 오롯이 자신을 던졌고, 이후 다시는 다른 종류의 회심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책 곳곳에서 모세의 기술(주로 구약의 모세 5경 지칭)을 인용하는데, 믿음이 미숙하고 영적인 토대가 약할수록 "위에는 물리적 의미의 하늘, 밑에는 역시 창조된 땅" 하는 식으로, 성경의 말씀을 자신이 지각하는 물질 세계에 한정, 혹은 유추하여 믿기 십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은 인식과 신앙을 물질계에 한정해 버리는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그는 이런 이들을 가리켜 "믿음의 날개가 약해 마치 어린 병아리처럼 채 날지도 못하고 바로 마음이 꺾여 버릴 수 있는 이들"이라며 측은해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줄 모르고, 그저 현재의 자신이 편안해할 수 있는 가장 빈약한 뜻으로 새기면서, 자칭 독실한 신자임을 내세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책은 그런 이들에게, 근원의 안식을 얻기 위해 어떤 미망에서 벗어나야 하는지 통렬히 깨우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