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우디아라비아 - 중동을 들여다보는 창
캐런 엘리엇 하우스 지음, 빙진영 옮김, 서정민 해제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사우디아라비아는 과거 우리 한국의 근로자들(지금은 다 할아버지 세대입니다만)이 건설 현장에 파견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이슬람교의 종주국이자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뚜렷한 인식이 전세계에 박혀 있는 나라입니다. 아주 최근 뉴스로는, 오바마 미 대통령이 "9.11 테러 관련 소송을 못 하게 하려 행사한 법안 거부권" 관련으로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이 책 내용 관련으로는 시아파(정통 수니파에 입장에서는 이단으로 보는) 신도들에 대한 사형 집행으로 이란과 관계가 극도로 나빠졌던 소식이 몇 달 전에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로선 거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국가지만, 세계 정치 무대, 경제 섹터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크므로 어느 누구도 가볍게 볼 수 없고, 그 나라나 그 주변이나 정치적 평온과 안정이 유지되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곳입니다(특히 주식 투자자들 입장에서).
이런 사우디아라비아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느껴진다는 게 이 책 저자의 분석입니다. "두 개의 성지를 관할하는", 아랍 세계의 큰형님과도 같은 이 나라에, 1) 사회 구조의 근본적 취약성에 기인한 동요, 2) 왕실 내부의 분쟁과 갈등 증폭, 3) 석유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가 맞이하는, 세계 산업 환경의 대폭적 변화에 따른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흔한 말로 "퍼펙트 스톰"이라 불릴 만한 국가적 재난이 닥칠 지 모른다는 내용입니다. 여성을 억압하고, 소수자(종교, 정치, 사회)를 탄압해 온 몹쓸 체제가 그 응보를 받겠거니 여기면 그만일 수도 있는데, 문제는 그로 인해 국제 사회 전체가 받게 될 타격, 그리고 그 나라 안에 사는 선의의 피해자가 입을 비극을 어떻게 수습하겠냐는 겁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 거시경제에 닥치는 재난은 그 지역의 손해로 그치질 않는다는 점, 지난 브렉시트 위기나 그리스 재정 파탄 당시 우리는 똑똑히 지켜 봐 왔습니다. 아울러, 다 같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보편적 가치가 제 자리를 못 지키고 붕괴할 때, 마냥 강 건너 불 구경하듯 국외자로 머물 수 없다는 일종의 사명감도 어느 일부의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은 그런 관점과 의도를 가지고, 일종의 책임감과 목적의식을 지닌 채, 공정하고 박식하며 무엇보다 현지 사정에 밝은, 위로는 왕실 주요 인사들, 아래로는 기층 민중의 간난에 대해 정확한 파악을 하고 있는 저자분이 쓰신 종합 보고서입니다. 분량도 만만치 않은데, 소설처럼 술술 읽히게 쓰신 덕분에 한달음에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보기에 막연히 그러려니 했던 선입견을 상당 부분 걷어낼 수 있었고, 근거 없는 짐작과는 정반대의 특이한 사정, 과거 내력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읽는 내내 눈빛을 반짝이게 되더군요. 게다가 저자는 언론기관에 오랜 세월 몸담은 "여성" 저널리스트이기도 해서, 특히 여성 문제의 제반 모순으로 신음하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포착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여성 할례 문제"부터 해서 우리 보기에 역겹고 혐오스러운 사건 사고들이 그간 한둘이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2년 전쯤 헐리웃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위 "닫힌 사회"일수록 근거 없는 믿음과 패거리를 모아 마구 우기기식의 한심한 작태가 횡행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달 착륙"이, 버젓이 당시 미국 정부가 소련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한 주장을,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이에 따르지 않는 학생에게 제재까지 가하는 장면이 있죠. 헌데 이게 아무 희망과 미래가 없게 된 가상의 세계(영화 속)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실제로 정통파가 종교의 가르침으로 전제적 지배를 행하는 신정 일치 사회에선 성직자와 권위 있는 기관의 "선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리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쿠란이 그런 것까지 미리 예견할 수 없고 따라서 명문으로 기록된 바 없으니, 교단에서 이를 "인정"해야 애들에게 가르칠 수도 있고 일반에 통용되는 믿음 취급을 받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현대인의 보편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이런 모습들이 이곳 닫힌 왕정 국가에선 당연하다는 듯 일상을 지배합니다.
보통 우리는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지배하는 나라(특히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과 대조할 때)"로 이 사우디를 인식해 왔으나, 이들 왕실(현 집권자라 해도)이 미국에 대해 취하는 자세는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주권국가가 강대국에 마냥 굽신대는 게 물론 정상이야 아닙니다만, 최근 필리핀의 두테르테 같은 이가 히틀러를 거론하며 막나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이들의 현실 인식 역시 대놓고 표현은 안 해도, 우리식의 구태와 인습을 사회에 그대로 유지하려 나가는 시도에 다른 나라에서 웬 간섭이냐는 식의, 아주 퇴행적인 반항이라면 그게 과연 바람직한 태도일지요. 이런 나라에서 보편적 인권 의식, 계급 타파, 평등 의식이 제 자리를 못 찾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합니다. 또한 독점적 이익은 그것대로 누려 왔으면서 "미국 등 서방 자본이 우리를 내내 착취한다"고 근거 없는 피해 의식을 갖는 것도 우습습니다. 구미의 자본과 기술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채굴과 판매, 유통도 못 했을 텐데도요. 만약 이런 나라들이 그저 취약한 수준의 담합(가끔)에 그치지 않고 모든 원유의 유통과 생산, 판매에 독점권을 가졌다면 우리 소비의 현실의 여러 국면, 양상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우디 왕실은 우리 생각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편이 아닙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와하비 운동"과 이 족장 세력이 연합하여 아랍 수니파 생활권을 통합하려 든 게 지지난 세기의 일인데, 이 종교 운동은 지극히 편협한 믿음을 가진 일부 과격파들이 주도한 과거 역사의 일부입니다. 저자는 오늘날의 왕실을 있게 한 그 열풍에서 주류를 장악했던 교리 일부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지닌 현실의 인식과 당위의 방점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점에 놓여 있는지 독자에게 경각을 촉구합니다.
사우디 왕실은 내부 분란과 비극적 대립으로도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십 수 년 전에 네팔 왕실이 국가 장래를 둘러싸고 분쟁을 벌이다 총격으로 가족 대부분이 사망한 충격적인 소식이 전파를 탄 적 있습니다(혹자는 자작극이라고도 합니다만). 헌데 그런 작고 미미한 나라에서만 비극이 생기는 게 아니라, 이 왕실에서도 두 형제가 복수를 한답시고 현 국왕에게 총구를 겨눠 피를 본 패륜극이 모두가 보는 앞에 펼쳐진 적이 있었네요. 현재, 그 두 형제의 동생 되는 다른 왕자는, 어정쩡한 스탠스로 진보도 보수도, 평민도 왕족도, 반미도 친미도 아닌 주변인의 삶을 삽니다. 이분을 저자가 밀착 접근하여 여러 재미 있는 취재를 한 기록이 길게 나옵니다. 저자의 태도는 매우 공정하여, 우리가 흔히 갖는 중동 왕족(더군다나 선대 왕의 직계 비속인)들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와, 이들 실제 왕자들의 삶이 매우 큰 차이를 보임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왕족 출신들 중 많은 이들이, 미국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학교를 졸업한, 전문 분야도 뚜렷하고 교양도 풍부히 쌓은 인재들입니다. 넉넉한 환경에서 마음에 응어리진 바 없이 성장한 덕에 인품도 좋고 균형 잡힌 세계관으로 외부인을 대할 도량이 넉넉한 이들이라는 군요(우리 생각으로는 막 자기 생각만 상대에게 강요할 것 같지만). 오히려 상대(기자라든가 기타 전형적인 서구인들)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우려를 가질 지 미리 알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매너가 돋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정확한 실상과 실태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저자 같은 분의 프로페셔널 저널리즘도 돋보이겠고 말입니다. 여튼 문제는, 이런 근 삼만 명에 달하는 왕족들이 마땅한 대우를 못 받거나, 개인의 적성과는 전혀 무관한 직역에 배치되어 불만과 좌절만 쌓여간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사우디에는 편협한 종교 교육이 우선이기 때문에, 과학기술 등 사회의 핵심 인프라를 일굴 실질적 지적 기반이 매우 취약합니다. 애써 과정을 이수한 이들(그나마 소수)이 제 대우를 못 받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우민화 정책의 영향인지 무지몽매한 이들이 아직도 과거의 폐습에 사로잡혀 무엇이 진짜 모순의 원인인지 감도 못 잡은 채 약자를 억압하는 게 현실입니다. 몇 년 전 이집트, 리비아 일대에서 보편적 실업과 빈곤에 분노한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가 일어났지만, 이곳 사우디만큼은 그런 움직임이 대단히 미미합니다. 현재에 안주하려는(이슬람 종주국이라는 헛된 자부심 등) 보수적 움직임이 주류인데다, 젊은이들조차 패배적 마인드셋, 근거 없는 반미주의에 젖어 일어날 생각을 못 하기 때문이죠. 어찌 보면 미국의 근년 어리석은 외교 정책 과오가 좋은 구실을 마련해 준 셈입니다.
"왜 당신은 절대 진리인 이슬람으로 당장 개종하지 않나요? 혹시 당신 주변에서 그런 당신을 곱게 보지 않으려는 시선을 두려워해서인가요?" 심리학에서 이런 심리를 두고 "투사"라고도 부르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이 받을 비난이 두려워 미리 상대에게 같은 허물을 씌워 말문을 막으려는 비합리적 방어 기제를 뜻합니다. 지금 누가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같은 여성이 보기에 매우 안타깝다는 듯 어느 사우디 여성이 이 책 저자에게 건넨 충고 아닌 충고입니다. 자신이 잘못된 세계관과 의식에 발목 잡힌 것도 기가 찰 판인데, 남까지 물귀신처럼 자신이 빠진 함정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으니, 우리 독자로선 어이가 없지만 이게 사우디란 나라가 처한 엄연한 현실의 일각이라는 점 무겁게 받아들여야겠죠.
사우디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정상적 산출량 증가로 도박을 벌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셰일가스/석유 업체들이 세기적 혁신을 도모하는 현황에 위기 의식을 느껴, 아직 걸음마 단계인 이들을 도산시켜 독점적 자원 생산국의 이점을 누려 보겠다는 의도였죠. 하지만 과거가 미래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화석 원료는 이미 탄소 과다 배출이 유발하는 환경 파괴에 심각한 경각심을 가진 인류에 의해, 그리 멀지도 않은 장래에 무대에서 퇴장할 운명입니다. 비단 (같은 탄소 기반인)셰일 산업이 아니라 해도 말입니다. 미래는 화석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적 팩터뿐 아니라, 전근대적 폐습이 개인의 어깨를 짓누르는 그 모든 전선에서 함께, 거대한 위력으로 진군하게 마련입니다. 계몽된 미래에 저항하는 사우디의 구체제가 붕괴하는 건 자명하다 해도, 어떻게 연착륙을 시킬 지가 우리 모두의 과제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