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미치지 마세요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 지음, 안유정 옮김 / 필요한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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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사랑은 당연히 그 당사자들을 세상 누구 부럽지 않은 행복으로 이끌어 주리라 기대되는 계기, 동력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기대에 대해 부당하다는 비판이나, 지나치다는 조소를 보낼 수 없고, 그런 기대에 빠진 당사자에게는 물론, 심지어 기대나 계기 자체에까지 축복이 쏟아져야 마땅합니다. 인간이란 세속의 어떤 명예, 평판(이 책에서 자주 나오듯), 부를 손에 쥐는 것보다, 이 작은 행복, 즉 연인, 배우자와 작고 달콤한 행복의 시간을 공유하는 게 그 짧은 생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헌데, 내가 무조건적 사랑을 퍼부은 상대가, 나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어떨까요? 많은 경우 주변에선, 피해를 입은 당사자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며 한 마디를 건넬 것입니다. "그런 자는 너를 끝까지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네가 더 사랑한다고 해서 문제가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마음 독하게 먹고 관계를 정리해라." 물론 이런 말에, 당사자들의 알콩달콩한 관계를 질투한 나머지 뭔가 훼방을 놓으려는 못된 의도가 끼어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데 구태여 이런 의심이 끼어들지 않더라도("얘 지금 배아파서 하는 소리겠지?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가 있는데도 말야."), 일단 사랑에 눈이 한번 멀면 그 냉혹한 진실이 절대 깨달아지지 않나 봅니다. 어쩌면 절대 다수의 연인들, 즉 하루하루가 제법 위태롭고 싸움(밀당이든 뭐든)도 잦은 케이스는, 이런 "완전히 눈먼 커플, 혹은 당사자 한 명"에 비해 운이 좋은지도 모릅니다. 냉철하게 자신들의 관계를 성찰할 계기라도 가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보통 이런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는 쪽은, 만약 그게 여성이라면,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거나, 전근대적 의존성 퍼스낼리티를 아직 떨치지 못했거나, 경제적 자립이 힘든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고들 봅니다. 그게 통념이죠. 하지만 이 책을 쓴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는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닙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예쁜 미모를 갖추고 태어났으며, 출신 학교는 하버드이며, 어려서부터 읽고 자라난 <세븐틴>이란 저널에서 "제발 일 좀 해달라고 상사, 고용주로부터 부탁이 들어오는" 특 A급은 몰라도 A급은 넉넉히 될 법한 인재입니다. 여성 인재가 이런저런 부대 조건을 다 갖추면 몸값이 더 높아지고, 그녀의 장래를 확고하게 떠받쳐줄 이런저런 배경까지 갖춘 능력 좋고 맹력적인 신랑감까지 어디서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하네요. "교육을 잘 받고, 아름다운 외모에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행운으로...."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이런 행운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피해갈 수 있기까지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을 처음 펴들 때는 그냥 넘어갔습니다만, 중간쯤까지 읽으면서 저 앞의 말이 자꾸 독자의 머리 속에 파고들더군요. 정말, 정말 많은 이들이 이런 비슷한 말을 하는 걸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진짜 안타까운 건, 이렇게 초기 조건이 너무 좋은 분들이, 세상 더러운 물정을 잘 몰라 나쁜 사람들에게 몹쓸 일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쓰는 표현대로, "다들 내 맘 같지 않아서" 나는 잘해 주려고 관계를 시작했는데, 거꾸로 그를 이용하고 순전한 악의만으로 해코지하려는 술수에 넘어가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쩌면 말입니다, 어쩌면, 출생시의 좋은 운은 앞으로 이런 나쁜 사건에 휘말리는 걸 피해가라고 주어진 조건에 불과한데, 그걸 제대로 활용 못 하고 이런저런 열등분자들의 먹잇감이 된 게 본인 자신의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악, 당부의 평가가 바뀌는 건 물론 아니겠고, 다만 세상살이엔 선의보다 현명함이 더 강조될 때도 있다는 걸 말하고자 함입니다.

코너는 이 레슬리가 자기 인생의 이성이라 여길 만한, 매력적이고 총명한 두뇌의 소유자였습니다. 다만 이 상대는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당연하게도 레슬리 자신처럼 좋은 배경, 학벌 등을 갖질 못했습니다. 본래 출신 배경이 다르면 사귀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을 베풀곤 합니다만, 레슬리는 역으로 이런 점에 더 끌려서 코너에 깊은 애정을 품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레슬리 자신의 아픈 상처도 어느 정도는 작용을 했는데, 양친이 비록 부유하긴 했으나 어려서 레슬리를 살뜰히 돌보는 타입이 아니었고, 좀 유별난 개성에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분들이라 레슬리에 많은 애정을 쏟질 못했습니다. 참고로 그 부친은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지역 사회에서 매우 명망 높은 판사였는데도 말입니다. 레슬리는 어느 정도, 이런 다른 방향으로 불운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 혹은 동병상련의 동기로 코너에 더 관심을 쏟은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 코너는 그저 폭력 성향이 강한 남성, 이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정신 분열 증상을 보이는 듯합니다. 그의 폭력은 애인, 그리고 이후 아내가 된 여성을 향해, 그녀가 보이는 어떤 제스처, 행동, 언어가 "과거 자신을 아프게 한 어떤 기억"을 강하게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불쑥" 튀어나옵니다. 자기 행동에 대해 자기가 통제를 못하는 거죠. 이러다가도 레슬리가 자신을 달래고, 따끔한 경고라기보다 애원에 가까운 투로(이럴 때 정신이 버쩍 들게 매서운 한 마디를 날렸다면, 그렇게 비생산적인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한 마디 하면, 이 작자는 잠시 수그러듭니다. 그러고 나선 또 반복입니다. 빨리 정리하는 게 답인데, 이 책 제목을 보십시오. "사랑에 빠지지 마세요." 너무 사랑해서 내가 이만큼 다쳤다는 뜻인데,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책에 잘 나옵니다. 이 정도 당찬 여성이 이런 피해를 입을 정도면, 사실 어느 정도는 시스템적 보호 장치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해요. 웬만해서는 이런 함정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랑이 진득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선 어떤 놀라운 순간, 혹은 깊은 연대의 계기가 마련될 필요도 있습니다. 책을 잘 읽어 보면 레슬리가 코너를 집에 데려와 부모와 상견례를 시킬 때, 이 아버지, 그리고 심지어 그 어머니까지 레슬리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주는 대목이 있더군요. 책에 자세히 술회되어 있지는 않으나, 레슬리가 십대 시절 그 부모와 깊은 불화의 시간을 가졌나 봅니다. 여기에 일일이 적진 않겠으나, 마치 몇 달 전 어느 연예인과 그 생모 되는 분이 깜짝 놀랄 만한 다툼을 대중들이 뻔히 보는 중에 벌이면서 나온, 그 참혹한 언사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약혼자 될 사람한테 하다니.. 물론 관계가 이리 파국으로 끝나고, 그 남편 될 작자가 그리 말종인 줄 몰랐던 상태에서, 오히려 "내 딸 같은 여자를 조심하라" 내지 관계를 망치려 든 심리가 작용을 했던 겁니다. 후~. 여튼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레슬리는 더욱 코너에게 의존하려 들지 않았겠습니까? 이 자는 그런 약한 마음을 더 악용하려 들었겠고 말이죠.



사랑의 결핍이 결국 다른 사랑을 찾으려다 눈먼 비극적인 사랑을 낳고 만다는 게 결국은 결론이겠습니다. 이게 어떤 데이트폭력이다, 혹은 가정 폭력이다 하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좀 사정이 달라서 한마디로 뭘 단정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긴 합니다(코너가 나쁜 놈이라는 진단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텍스트가 예쁜 편집으로 독자에게 제시되며, 이런 여성 저자들(재치있고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풍성한 대도시 문화 체험 속에 과거나 현재나 빠져 사는)이 흔히 구사하는 다양한 idiom과 문화적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역주가 많이 달려 있습니다(그래서 처음에는 예쁘고 발랄하고 유쾌한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이건 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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