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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아워 - 우리가 언젠가 마주할 삶의 마지막 순간
케이티 로이프 지음, 강주헌 옮김 / 갤리온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모든 시작에는 그 끝이 있게 마련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명대사가 다시 짚어준 진리가 꼭 아니라도 인간은 이미, 한 번 있었던 자신의 출생이 언젠가는 "죽음"으로 대칭적 마무리를 갖는다는 걸 알고들 있었죠. 아직 젊었을 때는 자신의 청춘이 영원히 이렇게 이어질 줄로만 기대합니다. 이 책의 저자께서도 냉소적으로 표현하듯, 그러나 그런 헛된 믿음은 대개는 거울 한 번의 응시만으로도 흔들리겠는데요(예외도 있지만). 우리가 딛고 선 평면, 차원 외에 지평선 저 너머에 몸을 숨긴 진리를 묵시(reveal)한다고 믿어지는 뛰어난 작가들, 혹은 위대한 지성들은, 이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자신의 것들을 그 최후의 순간에 맞이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도 나오지만, "바이올렛 아워(violet hour)"란 인간의 영혼이 죽음 즈음에 체감하는 그 아득하고도 무섭고, 신비로우면서도 영원에 닿을 듯한 그 주관적 시간을 뜻합니다. T S 엘리엇의 長詩 <황무지>에 나오는 표현이죠. 죽음의 영접을 혹 색으로 표현하자면 정말 제비꽃과 같은 빛일까요? 그럴 법하다고 여긴다면 평소에 진지한 생각을 해 본 분일테고, 모르겠다는 답이 나온다면 아직 나이가 어리거나, 생에 대해 그리 진지한 태도를 안 가져 본 분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건 간에, 죽음은 그로부터 환영을 받건 말건, 제 때가 되면 찾아가는 손님이죠. 우드로 윌슨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토머스 마셜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장례식에서 이런 弔辭를 했습니다. "죽음은 그가 잠든 동안 찾아와 영원으로 안내했으니, 이는 혹 그가 깨어있었을 시 벌어졌을 법한 다툼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성질 드센 이라도 사신과 싸워 이길 수는 없음을 잘 표현하는 일화입니다.
사신이 와서 갈 길을 청해도 쉽게 따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이들 중의 하나로 대뜸 떠오를 만한 위인이 정신분석학의 개조 지그문트 프로이트인데, 마침 작가님도 책의 첫 주제로 이 사람의 죽음 그 즈음을 다룹니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비범한 두뇌의 활력, 명철한 지성, 거의 독재자에 가까웠던 고집과 의지, 독선적 성품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 편이었죠. 이런 분이 만약, 낯선 죽음이 이제부터 친구 하자고 찾아오면, 그리 고분고분 교류에 소통에 응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종양(구강암) 때문에 말년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나, 모르핀 기타 진통제의 투여를 일절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프랑스 어느 문호의 모 작품(그가 그 무렵 읽던 중인)에 나오는 묘사대로, 행여 자신과 같은 대 지성이 약물의 효과 때문에 정신이 다소라도 흐려지는 지경까지 가는 걸 거부해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꼭 그 작품의 영향이 아니라도, 의사인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외인(外因)적 처방의 손에 조금이라도 넘겨 주지 않으려 한, 어느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그 자신의 주인이고 싶어 한 집념의 소산이라 이해하는 게 온당하고 공정하겠습니다.
수전 손택은 이른바 "대중 문화의 퍼스트레이디"라는 찬사를 받으며 20세기 후반 미국 문화평론(그 자신은 평론의 가치를 높이 두지 않았지만)을 이끈 참여형 지식인입니다. 2004년 타계했을 때 한국에서도 그녀의 저작들이 새삼 주목을 받았을 만큼 지명도가 높은데요. 권력과 미디어가 때로는 헛된 명분, 때로는 더러운 사익 추구를 위해 날조하는 거짓을 그리도 몸서리치며 혐오, 배격, 고발한 그녀였지만 역시 연약한 육신을 지닌 인간에 불과했는지 자신의 건강과 영혼의 평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주관적 환상을, 특히 말년에 갈수록, 지어내면서까지 선호했던 편이었다고 합니다. 웬만해서는 사후의 상태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는지, 지인의 안내로 불가의 교리도 접해 보았지만, 당찬 그녀 답게 대뜸 나온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참 매력적이더라고, 하지만 내겐 그 가르침들이 헛소리에 불과했어!" 그는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을 때 이처럼 힘없이 고백하기도 했다는군요. "언제나 운이 좋았던 나지만, 이번에는 행운이 내 편이 아닌 것 같다." 이런 말들에서, 재능 있고 그 재능에 자부와 확신을 가졌으며 자신의 의지로 세파를 헤쳐 나간 이들의 공통된 attitude(생전의)가 보이는 것 같네요. 손택의 간병인 중 특히 친했던 피터 페론을 저자가 직접 만나 증언, 회고를 받아적어서 이 파트가 특히 역사적 가치까지 유지합니다. 애써 죽음의 공포를, "신화"까지 만들어 회피한 그녀의 심리에는 비교적 어린 시절 부친의 죽음을 목도한 그 기억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짐작합니다.
어떤 소설가들은 편집, 강박, 자기 도취 등 별의별 괴벽을 끝까지 지키려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재능은 신의 선물인데,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면 어쩌지?" 헤밍웨이도 그러했고, 작가는 아니지만 정치적 시인이었던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평전을 읽고 리뷰도 썼던) 무함마드도 그런 타입이더군요. <달려라 토끼>로 유명한 존 업다이크 역시 갖가지 자기만의 강박과 습성에서 안 빠져 나오려 애쓰고, 그런 모습이 더 화제를 탄 소설가인데요. 이 사람은 이언 매큐언과 주고받은 서신에서도 짐짓 과장된(그로써 타인에게 위안을 받으려는) self-pity를 드러냈는데, 이게 다 자기애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죠.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여성과의 성행위가 작가로서 자신의 소양, 영감 등에 특별한 원천이 된다"고 진심으로 믿었으며, 이런 취향, 생활 태도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기까지 하여 일각으로부터 빈축을 샀습니다. 책에 인용된, 그 자신의 회고록 <자의식> 중의 유머러스한(이게 유머가 아니라면, 모럴에 분명 문제가 있는 사람) 어느 문장처럼 "명철한 의식을 얻기 위해 카를 바르트를 읽고, 다른 남자들의 아내들과 사랑에 빠진"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정신의 선도를 유지했죠(전 처음에 롤랑 바르트의 오타인 줄).
특히 시인들은 그 격정적 기질 때문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딜런 토머스는 이 책에서 표현하는 대로 "스무 살의 나이에 정말 혜성처럼 문단에 데뷔한" 천재 시인이었죠. 그가 체질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탓도 있겠지만, 시사주간 <타임>이 노골적으로 지적했듯 그는 (요즘 정확히 개정된 용어대로) 알코올에 의존하는 정도가 지나친, 시인의 오랜 원형 중 나쁜 전통을 불운하게도 이어받은 케이스였습니다. 폭포처럼 솟아나는 영감과 눈부신 표현력으로 주위를 황홀하게 만들 줄 아는 재능을 가진 그였지만,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만은 병적인 강박처럼 혐오한 이중성도 드러냈죠(찾아오는 여성들은 구태여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과연 그 남편에 그 아내라 할 만큼, 서로에게 운명의 배우자였던 케이틀린 맥나마라 역시 미친 듯 똘똘뭉친 자기애로 남편의 그것과 한번 충돌했다 하면 답이 없는 싸움으로 이어졌죠. 여튼 딜런- 케이틀린 부부의 기묘한 부부관계는 마치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 세이어의 그것에 비길 만큼 열정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는 게 매순간 전쟁이고, 그 격정의 폭발 순간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둘 만큼 지치고 예민했던 그의 정신을 생각하면.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한국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진 동화작가 모이스 샌닥은, 독자로서 저 역시 모르고 넘어갔지만 4년 전에 타계했다고 책에 나와 있네요. 명작 동화들이 흔히 그렇지만 그의 작품도 마냥 아름답고 가공된 꿈과 이상으로 부푼 작품 세계가 아니라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해 가르쳐 줘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작품을 통해 표현된 결과겠는데요. "어른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아이들을 그만큼 더 좋아한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겠습니다." 이처럼 유보적인 태도로 동심을 옹호한 그는, 죽음을 가장 멀리하고 싶은 심리에서 인생의 그런 시기를 막 지나치는 중인 아이들의 마음에 침잠하려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순간 반대급부라든가 치러야 할 시험이나 되듯 죽음을 의식한 사람이었는데요. 생(개인적 생이든 보편 개념으로서든 간에)에 가득한 수수께끼와 충돌 지점, 혐오스러운 요소들과 싸우는 걸 아예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두려움과 원망도 그치지 않았던 좀 특이한(특히 앞의 네 사람과 대조할 때) 경우 같습니다. 아니, 특이하다기보다, 어쩌면 이런 태도야말로 죽음의 필연성과 위력에 압도되어, 애써 (고작) 현세의 괴로움으로 그를 잊으려 드는 우리 모두의 나약함을 그대로 대변하는 정직한 정신의 몸부림과 순응이 아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