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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 의사.의과대 학생.직업 전문가가 들려주는 의사의 모든 것 ㅣ 꿈결 잡 시리즈
고정민 외 지음 / 꿈결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요즘 같이 불확실성이 만연한 세상에선 어린 시절부터 진로와 그에 따른 전략을 확실히 결정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꿈꾸는 직업이라면, 사회적 존경과 높은 보수가 보장되다시피한 "의사"이겠습니다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맹목적 선호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직업이라도 자신의 성격과 능력, 가치관 등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긴 시간의 학업과 수련을 요하는 자격 취득부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자격을 얻는다 한들 개업을 할 본인 자신이 행복해질 지가 의문이기 때문이죠. 남들 따라서 진로를 선택했고, 좋아 보여서 그 길을 밟았지만, 많은 기대를 품은 자신을 막상 기다리는 현실이 "그게 아니라면" 여간 낭패가 아닙니다. 반면, 너무 어려워 보여서 선택이 망설여졌는데, 좋은 선배들(의대생들)과 성공한 개업의들이 들려 주는 충고와 조언을 듣고 "이게 내 길이었구나!"하는 반가운 각성이 밀려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로 탐색에는 그래서 구체적인 경험담, 현장감 있는 정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책의 부제는 "의사, 의사를 말하다"인데요. 모두 아홉 분의 글이 실렸습니다. 여섯 분은 현직 의사, 한 분은 법의학자, 한 분은 직업 전문가(고용노동부 공무원), 그리고 한 분은 모두가 선망하는 명문대 재학중인 학생입니다. 독자인 제 생각 같아선 의대생들의 합격 수기가 좀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도 싶었지만, 이 책은 "직업" 자체를 탐방, 분석하는 목적이지 입시용 서적이 아니므로 이 정도가 적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네요.

서울대 의대를 합격할 정도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까, 아찔한 느낌이 우선 들 것 같습니다. 의예과 1학년 신재문(19)은 먼저 "수학 공부를 생활화하라."고 조언합니다. 많은 이들이 수학이라고 하면 대뜸 어렵다,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부터 떠올리는데, 일단 그런 부정적이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떨쳐야 이 과목에 대한 정복... 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접근이나 "교분"이 가능하죠. 수학은 사실 의대를 들어가고 나면 쓸 일이 적어지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접하기로는 의사 선생님들도 특히 응급 환자를 다룰 때 무슨 처방부터 써야 할 건지, 치료 과정에서 어떤 단계부터 밟아야 환자가 가장 덜 아파할지를 결정할 때, 이 "문제 풀이, 최적해 도출" 사고방식이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여기부터 먼저 손 대면, 환자가 아파서 누워 있지를 못한다고." 일류 의사는 기계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이런 대응을 보여야 한다는 알고리즘만 머리에 채워 넣는 게 아니라, 여러 징후가 한꺼번에 닥쳤을 때 각각의 단계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현명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것도 갖기 쉬운 건 아니지만)만으로는 부족하죠. "사랑"에도 지혜가 깃들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박주연 선생님은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젊은 산부인과 전문의입니다. 이분이 인턴 시절 쓴 일기의 한 토막을 소개하는데, 독자로서 해당 대목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느껴지더군요. 다 귀한 집에서 자란 따님들인데,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문 기능을 습득하려니 저렇게 잘 시간도 없이 배우고 수련하느라 고생하는구나.. 그러나 산부인과야말로 우수한 인력들의 세심한 손길이 특히 요구되는 분야입니다(어디인들 안 그런 곳이 없겠습니다만). 아직 젊으신 분인데도 박 선생님은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전부다."라는 의젓한 말씀을 하십니다. 근래 수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산부인과가 기피되는 과목 중 하나로 꼽히는데, 이렇게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분들이 계속 늘어나야겠고, 이런 책을 읽으며 돈보다는 보람으로 자신의 장래를 설계하는 학생들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박 선생님이 인용하신 좋은 말, "직업은 꿈이 아니다. (그 직업을 갖고 나서 어떻게 살지가 꿈이 되어야 한다). 꿈이 만약 그저 의사라면, 의사고시 합격하고 나서 꿈이 끝나는 인생이 되고 만다." 어떤 의사로 남은 긴 인생을 살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자는 뜻이겠는데, 모두가 마음에 잘 새겨야 할 것 같네요.

윤준택 원장님은 페이닥터로 2년 정도 경력을 쌓고 개원하신 분입니다. 이분은 해외 봉사 활동에도 수 년 간 몸소 참여하신 경험담을 털어 놓으십니다. 안과의사인 그는 비전케어라는 봉사 단체에 몸을 담으셨다고 하는데요. 백내장에 걸려 실명 직전이었던 다롄의 노인, 캄보디아의 어느 가난한 소녀 등이 그가 도움을 준 환자들로 소개됩니다.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고, 많은 꿈을 품고 키워나갈 어린 나이에 포기와 좌절이라는 아픈 상처를 걸머지어야 할 소녀들에게 다시 희망을 찾아 주는 건, 세상에서 의료인 말고는 누가 대신 수행할 수 없는 크나큰 보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재진 한림대 교수님은 초등학생인 두 딸을 둔 흉부외과 전문의입니다. 그는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을 때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고 고백하시는군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나?"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분과는 의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점점 영역이 늘어나고,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마주칠 수 있는 난관도 덩덜아 증가할, 책임이 막중한 분야라는 거죠. 심장과 폐는 인체에 있어 가장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다루기가 복잡하고 환자의 고통도 그만큼 더 절박한 기관인데, 이런 까닭에 어지간한 사명감 없이는 배겨날 수 없는 하중으로 전문의를 짓누르는 전공이라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교수님이 강조하는 건 "환자에 대한 측은지심"이며, 이것이 없이는 의사가 자신의 소명을 다할 수 없다는 자못 엄숙한 고백으로 들립니다.
최유경 원장님은 연년생 두 딸을 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입니다. 이 책에 사진이 실린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고 선량한 분위기라는 게 공통점인데요. 꼬마들을 키우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의사라서 가장 좋은 점"이라면 서슴없이 "내 아이들이 아플 때 정확하고 빠르게 돌볼 수 있다"는 점을 꼽으십니다. 한국에서 전문직 여성들이 겪는 이중고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보편적인 고민인데요. 최 원장님은 그나마 "내가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했기에 고충이 반으로 줄었다"며 웃으시는군요. 이처럼 내 아이를 다루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어린 환자들을 챙기는 의사 선생님들이 늘어갈 때 사회와 국가가 보다 살기 좋고 복리가 증진될 수 있습니다. 시민으로서 너무 감사할 뿐이죠.

외국 드라마를 보면 "병리학자(영드 셜록에서 몰리 같은 사람)"와 검시관(코로너), 법의관 등의 용어가 다 다르게 쓰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사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저 의사를 보조하는 역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어 보면 코로너 중에 전문 지식이 빈약해서 주위로부터 경멸 받는 이도 나오는데, 그런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는 뜻도 되죠. 이상한 경북대 교수님은, 요즘 특히 CSI 같은 드라마 덕에 주목을 받기도 하는 이 법의학 관련 종사자들에 대해 의문을 잘 풀어 주십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이런 법의학 전문가가 되려면, 당연하지만 의사로서의 정규 교육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다른 의사와 차이가 있다면, "전문의 취득 코스"가 없다는 정도인데, 이 역시 얼마 안 있어 마련될 전망이 크죠. 선생님은 자신의 직분상 1) 교육, 2) 병원 진료 3) 연구를 병행하는 어려움을 토로하는데, 여기까지는 다른 의대 교수님들에 공통되는 애로일 것입니다. 그런데 4) 자주는 아니라도 사법 당국으로부터 요청되는 부검까지 업무의 일환으로 책임지니, 이 점이 다른 분들과 차별되는 고충이겠지요. 역시 남다른 사명감과 책임이 아니면 수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검이란 "변사체", 그것도 유별나게 큰 손상을 입은 시신이 대부분이겠는데, 일반인이라면 이를 흘낏 보는 체험만으로도 충격이 올 만하죠.
책의 마지막에 인터뷰이로 참여하신 허희진 전문의(동국대 일산병원)께서는, 어려서는 막연히 "나이팅게일의 모자와 에이프런이 예뻐서" 의료인을 꿈꿨으나, 교사이신 아버지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의 도시락을 싸 주는 모습을 보고, 사회적 약자의 구호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 의식을 다지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시네요. 버젓한 전문의로서 사회의 소금과도 같은 역할을 해 내는 그녀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힘든 건 공부"라며 "다시 돌아가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을 길"에 대해 손사래칩니다. 사회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선 이런 각별한 소명의식을 갖고 직분에 임하는 분들의 재능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직업인들이 늘어나려면, 어려서부터 확고한 목적 의식이 교육 과정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배양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