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평전 - 선지자에서 인간으로
하메드 압드엘-사마드 지음, 배명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선지자, 예언자라고 할 때 어느 종족, 국민이나 자기네, 혹은 다른 겨레 역사상의 여러 사람을 떠올리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유독 아랍에서만은, 그저 "예언자"라고만 해도 단 한 사람만을 상기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 한 사람의 고유한 이름처럼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게 그만큼이나 이 사람이 위대하고 거룩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세계에서 유독 이 사람들만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서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전자가 옳다면 아랍 인들뿐 아니라 당장 우리 한국인들부터도 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르침 앞에 무릎 꿇고 당장 해당 종교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해당 종교의 신자들이 저렇게나 확신을 갖고 행동하며, 심지어는 목적이 수단을 정말 정당화하기라도 하는지 잔혹한 테러를 일삼는 걸 보면, 확실히 뭔가 있긴 한가보다 라고 눈길이 쏠리기도 합니다(물론 농담이었습니다).

"무함마드 평전"이라고 이름 붙은 이 책은, 카이로에서 태어나 현재 독일에서 주로 활동하는 지식인인 하미드 압드엘-사마드 씨의 저술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대목에서 잠시 쉬어가며 생각을 정리해야만 다음 파트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요. 그 이유는 책이 너무도 충격적인 주장,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장이 충격적인 건 얼마든지 책에 따라 그럴 수 있고, 그런 책을 한두 권 접한 것도 아니겠거니와, 그 사람의 개인적 주장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의 태도는 대단히 "고증적"인데, 그 제시하는 논거들이 대단히 탄탄할 뿐 아니라 다른 어떤 학문에서도 요구될 만한 논리적 방법론에 의해 전개되고 있기에 그의 주장은 그저 저자의 주장이겠거니 하고 걸러들을 수만은 없었네요.

비록 만주족의 정권이 들어선 이유가 크게 작용했겠으나 청대에 이르러서야 공자나 기타 유가의 성현들, 혹은 고전들에 대해 비로소 비판적 시각을 던지고 논리와 실증에 따라 그 진위와 존부를 일절 검증받은 중국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때 활동한 고증학자들의 기여로, 지금 우리는 유교 경전들을 보다 정확히 이해, 수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슬람은 그 토대가 확고히 놓여진 8, 9세기 이래 단 한 번도 진지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저자의 획기적인 접근, 때로는 충격적인 분석이, 이슬람 최초의 "고증학적 스탠스" 중 하나로 기려져야 하지 않을까, 독자로서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사실 "평전"이란 게 "예언자"를 대상으로 저술되기가 이슬람에서는 교리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쿠란에 기술된 대로, 문자 그대로의 이해가 신자들에게 요구될 뿐, 그의 생애나 가르침에 무슨 "평가"를 한다는 게 불경스럽고, 쿠란이 이미 존재하는데 따로 다른 버전의 줄거리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우선, "이슬람"이니 "쿠란"이니 하는 말 자체가, 7세기 이 종교의 성립 당시에는 기록상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마이야 왕조(옴미아드), 아바스 왕조 등이 자신의 질서와 체제를 세운 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없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이죠. 물론 저자는 균형 잡힌 관점의 지식인답게 강력한 반론도 함께 소개는 합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위력을 떨치는 집단이 펴는 논리(반론)라고는 하나, 자기가 쓰는 책 안에서는 저자가 곧 군주인데, 여튼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건 보기 좋습니다. 로마 제국이 영역 내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크리스트 교의 체제 내 편입을 도모했듯, 집권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이들 신흥 왕조가 신민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없던 정통성과 신성함"을 작위적으로 구축했다는 분석은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부분은, 쿠란의 진정성에 대해 통째 의심하고 드는 태도입니다. 예언자에 대해 불리한 사실, 기사나, 예언자 자신이 말한 내용과 정면 배치되는(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가 어기는) 내용도 버젓이 쿠란에 실려 있는데, 만약 전면 조작이라면 경전에 이런 내용이 잔존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예언자에 대한 존경심이 퇴색할 만한 꽤나 불미스러운 일화도 상당수인데도 말입니다. 쿠란의 역사적 성립 진정(眞正)은 그래도 신뢰할 만하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 저자가 반론을 공정하게 소개하는 분이라 데까지는 인정할 수 있는 서술들입니다.

해당 종교와 아무 관계 없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안타깝게 다가온 부분은, "이슬람(책에 따르자면 아직 이름도 없던 시절이라고는 하나)은 본디 폭력적일 때 가장 기세를 떨쳤고, 설교를 통한 평화와 연대의 강조는 아무 효과도 못 거두었다"는 저자의 분석입니다. 이는 사실 쿠란 본문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됩니다. 예언자가 자기 권위를 확실히 한 계기는 메디나와 메카의 군사적 정복이었다는 건 어느 역사서나 의견 일치가 이뤄지기도 하고요. 저자는 이를 두고, "비스마르크의 제2 제국 성립에 비길 업적인지, 아니면 코사 노스트라의 대부와 빗댈 것인지"라는 논제를 꺼냅니다. 전자라면 대개는 긍정적 뉘앙스이겠으며, 후자라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죠. 저자는 이후 중동 일대에 찾아온 평화와 안정을 거론하며 역사적 가치를 논하지만, 그마저도 "예언자 본인의 업적이라기보다 직후의 칼리파,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의 권력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이라고 정리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락까에서 IS 지도자들이 펼치는 그 나름의 선정도 저 무하마드의 치적에 비해 그리 낮잡을 바 없다고까지 하네요. 무하마드도 피지배자를 무자비하게 다루고, 전쟁에서 잡아온 "성노예"들을 부하들에게 나눠 준 건 똑같다는 점에서요.

"코사 노스트라의 대부" 운운하는 서술도 그저 비유적 의미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지역 치안을 현저히 위협하고 대체 정부로까지 기능했던 시칠리아 현지의 마피아의 경우, 폭력을 통해 패권을 추구하는 방식이 무하마드 무리의 그것과 거의 같다는 겁니다. 보통 "마피아"의 어원에 대해 프랑스 관련설이 지배적이지만, 이 저자는 아랍어 기원설에 더 중점을 둡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성장 과정에서 명예 살인의 당위성을 내내 주입하는 것도 아랍 민족만의 특징인데, 시칠리아는 역사를 통해 아랍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아 항구적 속성을 피 속에 내려받기도 했다는 거죠. 시칠리아의 아랍 피침과 그 유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거의 없으므로 이 역시 개인의 억단이라 폄하할 수 없습니다. 무하마드를 비롯 아랍인의 야만적이고 폭력적 전통이 시칠리아 마피아를 낳았고(실제로 이탈리아 다른 지방에서는 이렇게까지 깡패들이 발호한 적이 없죠) 그 다른 갈래의 후손이 지금 IS를 만들어 설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시사점입니다.

저는 책을 읽던 도중 서문과 책날개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 이 책 저자께서 이미 교단의 파문을 받고 신변의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마 책의 내용 중 이런 개탄스러운 조치를 빚는 데 가장 결정적인 건, 예언자 개인의 신상과 혈통에 대한 험담에 가까운 기술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이 대목은 인신 공격에 가까울 뿐 아니라, 과연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도출될 결론이 그 한 가지 가능성뿐일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개인의 강박적 습관이 그 까다로운 이슬람 예식과 율법 조항의 기원이라는 설명에 이르러서는 "좀 심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독자를 불편하게 한 건, 여튼 세계 질서의 중요한 한 기둥을 떠받드는 거대한 종교 세력이, 이처럼이나 한심한 기반 위에 서 있었던가 하는 허무한 환멸이 아니었을지.... "이슬람은 결코 폭력을 교사하지 않으며, 사랑과 우애와 평화를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럼 그렇지, 같은 인간의 탈을 쓰고 최소한의 교감이 이처럼 개명된 세상에 없을 수 있을까" 같은 안도를 느끼곤 했죠. 그러나 이 책 저자분의 설명 같은 걸 들으면...

책의 결론은 "이슬람에는 마르틴 루터보다 에라스무스 같은 (풍자적 계몽 정신을 일깨울) 이가 필요하다"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조롱과 희화화의 시도는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할 가능성이 높고요. 제가 언제나 의아하게 생각한 건, 왜 이슬람 교단 안에서는 보-혁, 노-소, 완-급의 갈등이 도통 발생하지 않느냐는 점이었습니다. 하다못해 유가에서도 주-육의 대립, 명과 실의 충돌이 있었고, 불교는 소-대승의 분열을 통해 오히려 외연을 확장했죠. 이런 교착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완고한 율법학자들, 사회에서 가장 존경 받는 그들이 모종의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지 싶습니다. 이들은 숨어서 율법을 어기거나 도덕적 타락을 범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중세 기독교의 패착과 대조됨) 오히려 더 적폐 해소에 장애가 됩니다(역설적이지만). 아무튼 자신의 안위를 내 걸고 용감한 주장을 펴 그들 내부에서도 다른 가능성이 얼마든지 싹트고 있음을 알려준 그 공로에 고마움을 갖습니다. 국외자들이 뭐라도 좀 도와야 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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