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인 아트
배정원 지음 / 한언출판사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림이란, 존재하는 외계의 표면을 모사(模寫)하는 게 본연의 기능이나 존재 목적이라기보다, 나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온갖 욕구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우선입니다. 만물의 영장이자 신(神)에 맞닿으려는 심원한 희구를 가진 우리 인간이지만, 무엇을 제 붓끝으로 표현하고 싶을 때 대뜸 먼저 떠올릴 만한 건 번식의 욕구, 그리고 그 이전 사출과 합일의 본능일 것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아득한 시원부터 창작된 예술 중 혹 오늘까지 전하는 게 있다면, 그건 대부분 교접의 환희와 만족을 담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꼭 아트 속에 성(性)이 있다고 할 것만이 아니며, 태초에 성(性)이 있었기에 그 부산물로 비로소 예술이 태어났다고 말 못 할 바 없습니다. 나아가, 성(性)의 현상 뿐 아니라 기술(art)을 담은 게 예술(art)이라는 둥, 서로 물고물리며 선후를 다투는 무익한 말장난의 뫼비우스띠를 펼침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회화와 조소의 걸작은 예외가 아니라 원칙이라 할 만큼, 인간 나신의 이상형과 성행위의 한 단면을 인기리에 소재로 채용합니다. 이 책에는 우리가 익히 보아 온 명작들도 선명한 도판으로 많이 수록하지만, 최소한 저는 처음 보는 걸작들도 눈 휘둥그레지게 지켜 볼 매력을 듬뿍 담아 절묘한 감각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더군요.

네덜란드는 그 상업적 흥기가 이미 석양을 넘어간 후에도 반 고흐 등 천재 화가들을 많이 배출했는데요. 그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나 여전한 필력으로 지난 시대의 화법 그 이상태를 잘 구현한 아리 셰퍼의 걸작이 p72에 나와 있습니다.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신곡> 지옥편의 주요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당대 이탈리아 전체를 뜨겁게 달군 화제의 스캔들이었죠. 저자께서는 단테의 태도에 적극 감정 이입하여, 문예뿐 아니라 현실에서의 비련의 주인공들에 대해 매우 동정적이시지만, 사실 엄연한 법적 혼인 관계를 저버리고 가정을 파괴한 당사자들에게 마냥 너그러울 수도 없습니다. 여튼 도덕과 성(性)은 대개 다른 트랙을 타게 마련이라, 저 역시 이 생생한 그림(당대 주류 화풍과는 다소 이격된) 속의 "선남선녀(저자님의 표현이죠)" 그 반(半) 나신과 애절한 눈빛에 깊이 집중할 수밖에 없더군요. 이 그림에서 히트는 사실 뭘 단단히 심판하려는 듯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는 양인, 다 라미니와 말라테스타가 어둠 속에 선 그 모습이라고 봅니다.

포드 브라운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만의 개성으로 치명적 사랑의 매혹을 표현합니다. 결혼만 미친 짓이 아니라 그에 앞서 사랑 혹은 어떤 이름이 붙든 일체의 연정이 다 광기의 발로입니다 ㅎㅎ.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 모든 사랑은 다 치정인지도 모릅니다. 베로나의 두 명문가 자녀들이 손톱만큼의 이성이라도 갖췄다면 그런 무모한 애정 행각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 비극적 결말이 빤히 보이는 이런 충동, 그리고 결심이 아무리 어린 나이인 그들이라 해도 "다른 옵션"을 생각 못 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성장 환경도 좋고, 대사나 다른 행동 묘사를 보면 충분한 지성을 갖췄음이 짐작되죠). 저자께서는 특히 "이별의 분주함과 애절함"이 잘 표현되었다고 지적하시는데, 이 그림에서 로미오는 특히 비장하고 무모한 표정이며, 줄리엣은 딴 세상으로 가 버린 듯 환희와 실신의 경계에 선 그 얼굴선이 돋보입니다. 물론 이별이라고 하면 희곡을 읽은 이들은 다 알듯 "그 첫날밤 후의 이별"임이 당연한데, 화가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함으로써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신"한 양인의 내면을 부각합니다. 이 책은 모든 챕터에서 주제인 작품을 두 페이지에 걸쳐 싣고, 작가님의 의도를 특별히 프레임화하여 결론과 함께 제시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건 더 야하게 보이고, 어떤 건 다시 전체 속에서야 맥락이 잡히는 등 그 효과가 일관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참고로 이 책에도 잘 설명되어 있지만 "라파엘 전(前)파"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이 이 포드 매덕스 브라운입니다. 미술 주제가 아닌 번역서, 예컨대 장르 소설 중에서 매우 자주 오역되는 개념이기도 하죠.

귀스타브 쿠르베는 19세기 후반 사실주의의 고유 가치를 굳건히 지킨 거장 중 한 사람입니다. 그가 현대적 성 담론에 얼마나 선구자적 각성을 일찌감치 이루신 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정치적으로는 대단히 진보 성향), 최소한 그는 성(性)의 한 충격적 국면에 담긴 진실을 잘 포착한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그림은 그저 춘화처럼 보이고, 이 책에 실린 <잠> 역시 어지간히 깨인 정신의 소유자에게도 일단은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긴 합니다. 저자께서는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으며 또 그게 건전한 시각이긴 하지만, 여튼 왼쪽 여성분은 소위 "부치"스러운 특징이 많이 드러나고는 있습니다(발달된 근육이라든가 짙은 피부색, 단호한 듯한 표정[비록 수면 중이지만], 짧은 머리 등). 사실 이 그림은 보는 입장(화가 포함)에서 관음의 색채가 너무도 노골적이라, 해석의 힘을 빌려서도 현대적 성 담론을 개입시키기가 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화로운 공존이야말로 모두가 수용해야 할 궁극의 가치라는 주장이야 그 타당함을 새삼 논할 필요도 없겠지만.

틴토레토의 <묙욕하는 수잔나>에서 그 피사체는, 성경 속 기술로도, 또 (작가님의 해석처럼) 작품 속에 명백히 드러난 의도로도, 관음이라는 남성적 폭행의 희생자입니다. 책에도 나와 있는 설명처럼, 수잔나는 화려한 장신구를 (알몸 목욕 중에도) 착용하고 있으며, 그 표정이란 세상에 근심이라곤 없는 지극한 평온을 구현합니다. 그런데 저는 저 표정에서, 앞으로 닥칠 아주 귀찮고 불쾌할 사건을 깜깜히 모르는 무지를 발견하기보다(그런 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최종의 승리를 이미 예견하는 듯 지혜로운 여성 특유의 여유까지 느꼈습니다.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도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대로고 말이죠. 반면 "문제의 원로"는 대상이 아마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각도로 고개를 숙이는 중인데, 이는 이미 더러운 욕구가 일단 충족된 후여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패배가 예견된 범죄자의 좌절이라든가, 처음부터 세상을 향해 고개를 못 들 파렴치한임을 스스로 자백하는 모든 심리의 압축일 수도 있습니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작품만큼이나 그에 얽힌 배경 에피소드가 더 유명하죠. 제가 참 재밌게 느껴진 게, 도대체 작품 속의 나신이 아름다우면 그로부터 유발될 만한 충동이 훨씬 강할 텐데도(말이야 바른 말이죠) 사람들은 표정 관리를 한 채 "예술성"에 짐짓 찬탄하고, 이처럼 그닥 반듯하지 못한 외관의 여성이 "벗고 있으면", 비로소 "그림이 외설적"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는 겁니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이처럼 자의적일 뿐 아니라, 거의 폭력적으로 마구 재단되기까지 하는데, 여기서 저자분이 내리는 결론이 흐뭇합니다(구체적인 건 직접 읽어 보시고요). 마네의 진짜 공적은 이처럼, 명화와 예술을 통해 우리들 자신의 정직하지 못한 품성을 고발하고 자성하게 한 데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성행위의 쾌락도, 예술 작품의 바른 감상도 나 자신에의 진솔한 응시가 필수 선행 단계라는 데에 교집합이 만들어지기도 하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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