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몽전 2 - 위원회, 개입을 시작하다
청빙 지음, 권미선 그림 / 폭스코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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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무리 평범한 중고딩이라도 일단 과거로 거슬러올라가기만 하면 초인으로 군림할 수 있느냐. 이 문제는 그리 쉽게 단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아득한 미래에서 온 자는 앞 시대의 첨단 교육과 기예를 익힌 자보다 더 앞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그런 능력 중에는 인프라가 깔려야만 제 효과를 낼 법한 게 상당수죠. 저는 예전에 구대성 선수가 일본, 미국 등 선진 리그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난 후 국내 프로야구에 복귀할 때, 타고난 능력에다 경험, 기술까지 익혀서 더 좋은 활약을 보일 줄 알았는데, 꼭 노쇠해서라기보다(정력도 대단한 선수라 노쇠화라는 게 큰 의미가 없음) 몇 달 국내 리그에서 뛰고나면 그 장점이 다 사라지고 적응과 평준화가 동시에 이뤄진다는  본인의 토로처럼, 그게 꼭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이 소설에서 진용운이 당대의 효웅인 유비의 군사(軍師)로 일약 발탁된 건, 그저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에 힘 입은 게 아니라, 그만이 가진 능력에 더 크게 기댄 결과입니다. 첫째로 그는 순간기억능력이 탁월하여, 예컨대 유비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서 그의 심기가 진짜 편한 게 아니라는 점까지 읽어냅니다. 정말로 그가 만족하거나 방심할 때의 표정과, 남들 앞에서 본심을 숨길 때 가장하는 표정이 미세하게 차이나더라는 건데, 이게 눈치 빠른 사람은 특유의 적성으로 해결하는 판단이지만, 진용운은 성격이 꼬인데다 오타쿠 기질도 강해서 그런 눈치가 매우 둔하죠. 말하자면 남들이 소프트웨어로 푸는 걸 그는 막강 하드웨어(엄청난 기억력)로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고나 할까요.

진용운이 전략적 두뇌가 뛰어난 편이냐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과연?)에서 그가 유독 날고 길 수 있는 건, 다른 이유보다 그가 평소에 삼국지 게임을 열심히 했다는 것(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래서 전황이나 전체적 맵에 훤하다는 게 유력한 비결입니다. 말하자면, 미리 비축해 놓은 전략적 자산을 이것저것 꺼내서 그때그때 써먹는 것일 뿐이며, 진짜 하늘이 내린 책사, 전술가들이 순수 창의력으로 짜 내는 기막힌 술수와는 순도 면에서 차이가 있죠. 그래서 1권 끝에 저쪽 진영의 책사 가후한테 된통 걸려 죽을 뻔한 것입니다. 기억력에만 의존하여 유사 상황에 잘 적용되던 해법을 근사치로 맞추는 대응과, 신출귀몰 임기응변의 천재가 부리는 재주는 아예 차원이 다르니 말입니다.

진용운에게는 다만 남들이 도저히 따라하거나, 심지어 그런 게 있는 줄 짐작조차 불가능한 어드밴티지가 있는데, 그것은 인적 자원의 능력치를 낱낱이 꿰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좀 이해가 안 되는 게, 그.... 진용운만 할 수 있다는, 정신집중해서 정보창 띄운 후 소위 "대인통찰"이라는 게, 순간기억능력이 탁월한 그라면 과거에 게임하던 기억을 살려 다 파악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능력치라는 게 불변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여튼, 이 2권에서 가장 기발했던 게, 현재는 군영에서 말단직에 종사할 뿐이지만 앞으로 크게 출세할 장수, 인재를 훤히 꿰고 있는 진용운이, 가후의 소수 정예부대에 바로 대항마로 내세울 수 있는 특공대를 조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쟤들이 나중에 커서 뭐가 된다는 결말을, 소설과 게임을 통해 다 알고 있는 그만이 부릴 수 있는 재주죠. "미래를 심원하게 통찰할 수 있는" 가후와, "통찰이 아니라 확정적 답을 알고 있는" 진용운이 상대가 안 되는 포인트입니다.

처음에 진용운이 해킹을 통해 창조한 "사기 캐릭"이 여전히 2권에서도 결정적 순간마다 맹활약을 보입니다. 이래서 게임에서도 소위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건데요. 진용운은 자신이 창조한 사천신녀의 "주군"일 뿐 아니라, 사실상 이 세계의 창조에 지분을 크게 갖는 주주이기도 합니다. 조운이나 관우 등은 이 세계의 피조물들이니 그 막강한 위력에 굴복한다 해도, 성혼단 멤버들이나 <수호전>에서 건너 온 캐릭터들은 과연 위상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는데, 역시 예외가 없더군요. 아니 어떻게 다른 고전의 인물들이 등장할 수 있는지 의아한 독자들에게 진용운은 그저 "자신과 부친이 중국 기서들에 두루 관심이 있었다"고만 말하고 넘어갑니다.

웹소설이지만 고전의 원 캐릭터들에 대한 해석은 자못 진지합니다. 유비에 대해서는 1권 리뷰에서도 언급했는데요. 야심이 가득한 인물이니 무슨 간디 급의 성자로 그를 보는 건 무리지만, 여튼 남 보기에 그런 "위선"도 아주 자연스럽게 연출한다는 천부적 능력이 있다는 식입니다. "유비가 베푸는 감화"가 곧 "능력의 각성"이라는 말도 있는데, "등 뒤에서 관우는 이미 용을 보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같은 문장은 비록 장르물의 색채가 강하긴 하나 이 유비에 적용시킨 게 매우 그럴싸해 보입니다. 장비가 미남자라는 분석도 이미 여러 연구자에 의해 도출된 결론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를 위해 더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여포는 누가 봐도, 유저의 인위적 조작이 아니라(ㅋ) 태생의 자질 그 자체로 사기 캐릭임이 여기서 잘 드러납니다. 사기 캐릭(아무리 여자라도)을 정면 대결을 통해 무공으로 꺾으니, 이건 비유컨대 아이언맨 수트를 입은 자와 그냥 맨몸으로 싸워 이긴 거나 마찬가지. 사천신녀 중 하나인 청몽이 매우 앙칼지게 반항하고, 동시에 현대 여성 고유의 계몽된 논리로 여포의 약점을 찌르자 천하에 없는 영걸인 그도 말문이 막힙니다(본래 말과 지성으로 승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드라마, 시츄에이션, 후드 같은 말은 못 알아먹는 게 당연한데, 엿 먹으라고 할 때 "엿"도 못 알아듣는 게 재미있었습니다(고대 중국에 없는 음식). 순간 기억 능력이 참 편한 게, 요리에 꼭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 사진 같은 기억력으로 샤브샤브 먹는 법을 알고서 장졸들에게 먹이는 장면이 꽤 재미있었네요.

성혼단 이야기가 드디어 한 꺼풀 풀어헤쳐지는데, 이게 진용운 부친의 실종과도 직접 관련을 맺는 설정입니다. "처음에는 명나라 시절로 침투할 예정이었으나.. " 이 말이 꽤 의미심장합니다. 책에 의하면 청나라는 야만 오랑캐가 세운 나라니, 몽골 제국을 축출하고 세워진 영광스러운 한족의 역사를 바로잡을 최적의 시기로 명을 골랐다는 건데, 이게 사실은 동아시아 평화 전체를 위협하는 중화 패권주의의 발호 한 국면(현실)을 날카롭게 짚은 면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럼 이들에 의해 위해를 입은 걸로 보이는 진용운 부친, 그리고 진용운의 활약이 어떤 방향성을 가질지도 예측이 좀 되겠고 말입니다. 우군도 인프라도 없이 우리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대단히 고독한 싸움을 벌일 용운에 대해 다시 한번 화이팅을 외쳐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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