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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차르 - 블라디미르 푸틴 평전
스티븐 리 마이어스 지음, 이기동 옮김 / 프리뷰 / 2016년 8월
평점 :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들 하지만 러시아의 장기 집권자 푸틴에 대해서도 이 말이 어떻게건 적용은 될 것 같습니다. 안티팬도 팬이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하곤 하는데, 비슷한 의미에서 안티히어로도 히어로이긴 하기 때문이죠. 본디 러시아의 국민성이 어떤 강압이라든가, 폭정으로 앞에서 끌고 가면 "노예근성"으로 묵묵히 따르는 편이라곤 해도, 소련 붕괴 후 첫 집권자였던 보리스 옐친의 경우 그 집권 기간 동안 정정이 대단히 소란스러웠을 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중 어느 부문도 원활히 돌아가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인들은 진짜 능률적인 독재자(예컨대 이 푸틴이라든가 스탈린)에게는 독재자라는 소릴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런 욕은 무능한 리더(옐친이라든가)에게 퍼붓곤 하는데, 무능한 독재자가 곧잘 권좌에서 끌어내려질 때 그런 오명을 끝까지 쓰곤 합니다.
러시아는 소련 붕괴 후 초강대국의 지위에서 내려왔을 뿐 아니라 사회의 혼란과 경제 난맥이 극에 달했기에 국민들의 불만이 한때 대단했습니다. 지금 푸틴이 사실상 20년째 권좌를 유지하지만, 이제 대체적인 여론은 그의 지도력을 높이 사는 편입니다. 미국 등 서방에서는 질 나쁜 깡패로 폄하되는 이유 하며, 자국 내에서는 반대로 꾸준한 지지를 유지하는 그 비결이 뭔지, 이 두꺼운 그의 평전을 읽은 후 독자로서 대강의 해답은 얻은 것 같습니다. 어떤 인물을 다룬 평전이 반드시 두툼한 볼륨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지난 세기 지성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러시아 혁명가들을 다룬 연구서, "평전"은 한국에 번역 소개된 것들만 봐도 매우 두꺼운 책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혁명가들의 삶과 정신 세계가 그만큼 심층적 소재들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이번에 이 푸틴의 평전을 읽고 나서 그게 다름 아닌 러시아인의 고유한 특질을 파헤치다 보니 도달한 결과물이라 비로소 판단하게 되었네요. 푸틴이 어떤 의미에서건 "그들 혁명가들"의 정신적, 물적 계승자라고는 전혀 여길 수 없으니.
이 책에 따르면 푸틴이 그의 조상 계보를 통해서라도 그 이전의 혁명가들과 전혀 연이 안 닿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그의 조부는 무려 블라디미르(푸틴, 그리고 푸틴의 부친과 이름이 같은) 레닌의 전속 요리사였습니다. 대개 "높은 분들"의 요리사가, "그 모시던 분"에 대해 지극한 존경의 마음을 품는 건 실제 역사뿐 아니라 픽션에서 즐겨 다뤄지는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조부의 그런 순수한 마음이 이 손자에게까지 간접으로라도 계승되었을 법하지는 않네요. 우리가 지금 러시아를 다스리는 그의 "쿨하다 못해 냉혹하고 무자비하며 비열하기까지 한" 스타일을 봐도 그렇고, 이 책에 상세히 기술된 그의 성장 과정, 출세 경로를 봐도 역시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많은 이들에게 한때 당연한 상식으로 통용되었던 것처럼(지금은 거의 잊혀졌습니다만), 구 동독(東獨)은 지난 시절 촘촘히 운용되었던 공업 시설의 잔재의 덕을 입었건, 혹은 특유의 근면하고 우수한 기능적 효율을 발휘하는 국민성 덕이건,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보다 더 풍요로운 사회를 가꿔 왔었습니다. 다만 국경이 거의 오픈되었던 이유로(같은 분단국가인 남북한과 대조할 때), 베를린 장벽이라는 허울이 가로막았을망정 국민들의 개혁 욕구가 상당히 높았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공산당- 중앙 정부의 비밀 경찰 조직이었던 슈타지(이 책에서는 "슈타시"로 표기되는)의 활동 범위, 성과, 그리고 악명도 매우 유명했습니다. 동구권에서 소련군이 철수하고, 각국의 공산 독재가 무너진 후에야 "본진"인 소련 체제도 붕괴되었는데요. 이미 이 동독 슈타지에서 소련측 연락책으로 젊은 시절부터 상당히 유능한 요원이었던 푸틴의 한창 때 커리어가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슈타지의 해체(대전 종전 직후 마치 히틀러 잔재 그 모든 것이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듯)로부터 그는 조국의 공산 독재체제도 곧 같은 운명을 맞으리라 날카로운 직관으로 예측할 수 있었는데요. 실업자 꼴이 된 그가 돌아온 조국은 여전히 생필품 하나를 변변히 구하지 못해 국영 상점 앞에 긴 줄을 선 대중을 사방에서 볼 수 있는 한심한 꼴이었습니다.
이런 소련이 망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고 예견한 그이지만, 망하고 난 후에도 국민적 자긍심만 증발되었을 뿐 경제난은 몇 배로 더 나빠진 판이었죠. 하지만 정보기관 재직 중 갈고닦은 동물적 본능과 시세 판단 능력으로 그는 유력 정치인 밑에서 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보좌를 받는 상관들은 선거에서 그의 우수한 첩보 능력, 상황 판단의 자질로 톡톡한 덕을 입었지만, 대체 불가능한 그의 조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투쟁에서 패배한 "주군"들은 여전히 많았는데, 이는 대개 자신들의 무능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정보총책, 전략가로서 모신 이들 중 마지막 인사, 그리고 최고위 정치인이 바로 보리스 옐친이었는데, 지난 "주군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옐친(이 책에서는 유독 "병약한"이란 수식어를 자주 달고 있는) 역시 "지금까지 나를 잘 도와줬는데, 이 자리를 아예 자네가 맡는 건 어떤가?"로 퇴임의 변을 건넵니다. 놀랍게도 이런 식으로 그는 1억 6천만 인구를 지닌, 세계 최대 영토 대국의 수장까지 등극한 거죠.
푸틴의 처세는 대단히 특이합니다. 일단 그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자신보다 우위에 선 적을 고꾸라뜨리는 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확한 책략을 구사합니다. 지금이야 이 "적(敵)"이 다름 아닌 자신의 적이지만, 사십 초반까지 적들은 자신의 주군이 상대해야 할 적들이었죠. 그는 상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정확하게 읽고 가려운 곳을 확실히 긁습니다. 그 속을 뒤집는 게 물론 아니라 시원하게 긁어 주되, 긁어 주고 난 후 일종의 경외감을 주군에게 남깁니다. "저놈은 누군데, 나와 나의 적 그 속셈을 정확히 꿰뚫는 걸까?" 마치 조맹덕이 양수(楊修)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데, 푸틴이 모신 상관들은 모두 푸틴의 깜냥보다 훨씬 하수급에 머문 작자들이어서, 감히 이 유능한 부하를 숙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유명한 일화로, 옐친이 거느린 정보기관 FSB(KGB의 후신)가 곧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리라는 예측이 세간에 난무했을 때, 푸틴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일축했다는 사실이 유명하죠. "우리가 이미 권력을 잡고 있는 거나 마찬가진데, 뭐하러 귀찮게 쿠데타를 일으킨단 말인가?" 이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해진 건 옐친의 적들이라기보다 차라리 옐친 본인이었으리라는 분석도 이 책에 나옵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 푸틴의 어두운 행적과 음모적 근성에 대해 분석한 책으로는 <푸틴의 제국>이라는 일본 저널리스트 에가시라의 고발성 프로가 국내 독자들에게 널리 읽혔습니다. 그 책에도 나온 유명한 실화인데, 옐친의 권한 남용과 부정부패를 혐의잡아 목줄을 죄어 온 검찰총장의 뒤를 캐어, 그가 여러 매춘부들과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촬영한 후 방송국에 필름을 보내 방영토록 한 사건이 있었죠. 당국은 이에 대해 "그 찍힌 남성의 얼굴이 검찰총장님과 매우 닮았다"고 한 코멘트가 유명한데, 이를 놓고 미디어와 여론은 "이 비겁한 촬영을 한 자가 푸틴 국장(당시) 나으리와 매우 얼굴이 닮았다"고 비꼰 한 마디도 함께 널리 알려졌습니다(이 책에도 나오고요). 이 사건 후 병을 핑계로 총장은 사직할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옐친은 자신의 수하인 푸틴에게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 과거 러시아나 소련에서의 전통은 권좌에서 끌어내려질 수밖에 없었던 독재자들의 운명을 매우 비참하게 만들었는데요. 푸틴은 파격적인 권력 승계를 약속받는 대가로(당시 러시아에선 매우 젊은 나이였던 사십대 후반) 옐친에게 어떤 위해, 정치적 보복도 가해지지 않고, 동시에 극진한 예우가 베풀어질 것을 약속했습니다. 잔인하고 거침 없으며 지독하게 유능한 그였지만, 이런 류의 약속은 칼같이 지킨다는 평판이 잘 나 있었기에, 결국 그는 젊은 나이에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옐친은 체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지만, 푸틴은 정반대였습니다. 그가 스스로의 입으로 장담했던 것처럼, "어리석고 마구잡이였던 구 소련의 선배들(사실상 옐친도 포함되는 뉘앙스)과는 달리, 우리는 매우 지능적이고 신중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아까운 젊은이들의 목숨이 낭비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을 지켰습니다. 사실 소련의 군사적 전통은 병사의 목숨을 초개처럼 낭비하는 인해전술에 가까웠습니다. 히틀러도 결국 여기에 질려 나가떨어졌던 건데요. 푸틴은 이마저도 절제하며,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교활하고 영리한 책략을 쓰겠다는 스탠스이며, 실제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체첸은 지금 이슬람 극렬 분자 일부 외에는 러시아의 통치에 순응하는 분위기이며,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그루지야(조지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도 비슷한 전망을 합니다. 처음에는 오히려 미적지근하니 온건한 대응을 하는 듯 보이다가, 한 2, 3년 지나면 어느새 해당 지역의 패권이 푸틴(곧 러시아) 손에 다 넘어간 듯 대세가 굳는다는 거죠. 이게 이 독재자의 무서운 점입니다. 원래부터 친러 성향이었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등과의 연계가 더 단단해진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중국과의 적절한 연대를 통해 미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것도 푸틴의 영리한 책략입니다. 2년 전만 해도 나토군이 우크라이나에 쳐들어가기라도 할 듯 기세가 등등했는데, 지금은 영국의 EU 탈퇴 등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데다 사실상 통일된 군사행동은 물건너간 분위기입니다.
사실상 푸틴은 스탈린 이래 이 나라의 국세와 사기를 최고로 끌어올린 지도자로 그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굳었습니다. 스탈린이 그 나름 시스템을 정비한 후 반 세기 가량 소련이 최강대국 지위를 유지한 것처럼, 이 푸틴이 물러난 후에도(자연사 외에는 방법이 없을 듯) 러시아의 위세가 지금처럼이나마 이어질지는 의문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의 수완이 최소한 대증요법으로는 누가 따라올 자가 없을 만한 수준임은 도무지 부인할 수 없고, 한반도의 긴장 역시 그의 태도에 따라 그 수위가 달라지겠음을 고려하면 그의 개성과 행보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 초반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도 구급차가 달려올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아(소련 붕괴 직후 난맥상 상징) 아버지 마음을 크게 아프게 했던 어린 딸 "카챠"가, 바로 한국인 청년과 몇 년 전 연이 맺어질 수 있다는 루머가 돈 예카테리나 푸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