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꿈결 클래식 6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흑미 그림, 백정국 옮김 / 꿈결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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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고전에 무지하고 소양이 부족하다 해도 이 <노인과 바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아무리, 읽지도 않고 아는 척 한 마디씩 하는 게 고전이라곤 하나, 이 작품에 관해선 대강의 줄거리(!)를 누구라도 당당하게(?) 남 앞에서 늘어놓을 수 있을 것 같고요("아, 그건 나도 알지. 그 노인이 혼자 .... 뭐 이런 얘기 아냐? 맞지?"). 심지어 제가 어렸을 땐 이 고전을 소재삼아 허무 개그 비슷한 농담거리가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개그의 소재로 쓰이려면 일단 토픽이 대화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야 하겠으니, 줄거리의 유명도 면에서 이 작품을 능가할 만한 고전은 아마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 <구토>라든가 <인간의 굴레>를 소재로 웃기는 이야기를 지어내 퍼뜨릴 수 있을까요?


전에 꿈결 클래식의 일환으로 나온 <변신>을 읽고 아 이 작품이 이런 메시지를 담았었구나, 하고 제법 신선한 충격을 받아 가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공식화, 박제화하여 "A작품- B라는 주제"라 편의로 정리하는 내용들은, 그게 입시 위주의 교육이 부호화하여 보급하는 게 아닙니다(한국 입시 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리석고 정직하지 못한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소양을 과시하기 위해, 속물들끼리 모여 합의한 바를 암기하고 다니는 거죠. 그래서 껍데기만 남은 부호로 내 정신의 공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시간을 내어서 원전 혹은 알찬 번역본을 마주해야 합니다.


청소년 시절, 혹은 학부 시절에 이미 진지하게 읽은 내용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카소의 추상화가 그를 볼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환기시켜 감상자가 "질리지 않듯", 고전 역시 읽을 때마다 자신의 그간 성숙한 진도에 맞춰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다가올 수 있고, 어쩌면 가장 깊은 오의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어려서 고전을 읽었다 함은, 그렇지 않은 남보다 먼 거리를 볼 수 있다는 정도이지 그걸로 최종의 단계를 마쳤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늙어서 처음 맛보는 독서는 늙어서 겪는 성행위처럼, 절정은 물론 끝물까지 다 지난, 시들고 어설프며 슬프기까지한 모종의 흉내에 불과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이 작품을 읽고 부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야구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나요?" 답은, "그래서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이다."였는데, ㅎㅎ 이 말씀은 지금 생각해도 명답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질문에 대한 직접적 답이 아닌데, 그간 책깨나 읽은 저도 제 아들(없지만)에게 이런 명답은 못해 줄 것 같습니다. 역자 후기에 보니, 역자께서는 대단히 심오한 해석을 내립니다. 조금만 인용해 보면...

"... 자주 끼어드는 야구 이야기가 작품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고도 보인다. 그러나 야구는, base로 돌아오는 게 목적인 게임이다. 노인 역시 고기를 잡았건 못 잡았건, 영혼의 안식을 얻었건 못 얻었건, 배를 몰고 나갔던 바다에서 결국은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가지만, 밖에 머물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건 원점 회귀나 퇴행적 리셋이 아닙니다. 돌아오고 나서야 우리는 자신의 성장과 성취를 겸허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뭔가를 이루지 못했다면, 겸허한 반성과 내려 놓음 역시 나의 초심이 소재한 그곳에서 이루는 것이죠.


야구가 베이스(물론 홈 베이스를 가리킵니다. 베이스는 1, 2, 3루에도 다 있으니까요)로 돌아오는 게 목적인 게임이라는 말씀은, 특히 이 작품의 주제와 연관할 때 참으로 심오한 지적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ㅎㅎ 꼭 그런 교화적 스탠스를 떠나서도, 이 야구 이야기가 내용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조 디마지오는 물론 제가 이 소설을 읽을 때도 생존해 있긴 했으나, 요즘 아이들이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 가지는 느낌처럼 운동 선수라기보다는 아득한 전설 같이 다가왔습니다. 조 디마지오는 그 어렸던 시절 제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는데, 딕 시슬러는 제가 이 꿈결판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읽고서야 "아 맞어, 이 이름도 그때 있었어."라는 생각이 비로소 떠오르더군요. 만약에, 헤밍웨이의 이 작품에 조 디마지오만 있었으면 야구 이야기 전체가 대단히 공허하게 다가왔을 겁니다. 저는 요즘 한국 작가들의 단편을 읽을 때, 그저 분위기만 내려고 (작가 자신이 잘 소화도 못 한) 몇몇 이름이나 사건을 끌어대는 게 상당히 눈에 거슬리더군요. 조 디마지오 이름 옆에 딕 시슬러가 나오기 때문에, 야구 이야기가 건성의 흉내가 아님이 증명되며, 당대 야구팬(들)의 실감과 역동성 한 자락이 이 작품 속에 멋지게 포착되는 겁니다. "뭐, 딕 시슬러라고? 이 사람 이거 그때 야구 좀 본 사람 맞네!" 자기 작품이 후대에 길이 남을 줄 알고 헤밍웨이가 영리한 도장을 이렇게 찍어 둔 거죠. 야구팬이면 뭐합니까. 아는 사람들 사이에 티를 낼 줄 알아야지.

노인...의 말이라기보다 작가 자신(다르죠?)의 말로, "거센 바다를 가리켜 쿠바 어부들은 여성 정관사 la를 쓰지 않고, 남성 정관사 el을 붙이기도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권위자의 완역본을 읽었어도, 이런 말은 어린 머리에 납득이 안 되었기에 그냥 흘려넘긴 부분이죠. 저는 솔직히 이런 말은, 헤밍웨이가 이쪽 언어 화자들의 정서를 표피적으로만 받아들인 소치라고 봅니다. 언어 속의 성(gender. 문법의 성)은, 자연적 성별과 아무 관계 없습니다. 인도 유럽 어족 중 유독 영어만이 이 gender를 까맣게 잊은 채 놀고 있기 때문에, 영어권 작가인 헤밍웨이가 이런 소릴 할 수도 있는 거죠. sex와 gender가 별개라는 데서 성 해방 담론이 태동할 수 있는 건데, 묘하게도 그의 (언어적, 담론적) 무지가 생전 실물로서의 성향과도 매치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 책은 역주가 친절합니다. 이 고기가 어느 종을 가리키느냐를 놓고, 이미 청새치라는 게 정설로 굳어졌지만, 역자께서는 본문의 어느 대목까지가 그저 "새치"이며, 어디서부터를 두고 "청새치"로 해석해야 할 지 근거를 들어 가며 세심하게 구분합니다. 지명 "산 티아고"를 두고 역자께서는  어원을 쉽게 풀어 주시는데, 혹 어떤 독자는 Sant+Iago의 오류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아요. 이는 오랜 역사를 두고 이뤄진 언중(言衆)의 오분석이며, 실제로 저쪽 사람들이 디에고나 티아고 같은 이름을 흔히 쓰고 있습니다.


역자께서는 이 작품이 처음에 헤밍웨이가 의도했던 다른 제목이 붙었을 수 있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실제로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이만큼 제목이 줄거리와 주제를 잘 함축하는 예도 드물지요. 이 작품이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까지 그만큼이나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비결은, 주제의 보편성, 플롯의 (위대한) 단순성 못지 않게, 제목의 함축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자께서는 그 외에도 TV 주말의 명화 코너에서 이 작품의 영화판을 감상했던 회고를 적어 두시는데, 1) 흑백 2) 잦은 재방송 등을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세대 차이를 절감했습니다. 흑백 방송 시대에는 도대체 영화가 컬러인지 본래 흑백인지를 판별할 방법이 없었을 텐데, 저는 이 영화를 제 성장기에 딱 한 번 방영된 게 컬러였던 걸 또렷이 기억하거든요. 확실히 흑백 포맷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에, 지루한 영화도 어떤 점에서 재미있게 보도록 돕는 면이 있습니다. 저의 부친(극장에서 컬러판 필름을 이미 보신 분)은 그 주말 밤에 "이 소설은 절대 영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며 말씀을 길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진정 이 충실한 완역본 본문만 읽어 봐도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될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걸 스크린에 담은 채 전달이 과연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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