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티야의 여름
트리베니언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어느 지역이라고 해도 거기 살기에 좀 안 어울린다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향민들이 먹고 살 만한 기반을 이미 이루고 물질적으로 부족한 바도 없으면서 왜 그토록 고향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은, 사람의 정신과 영혼, 육체를 구성해 온 요소 중 절대적인 부분이, 그가 성장한 고장의 자연적, 혹은 인문적 환경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You are what you are nursed by." 번듯한 귀족 가문이 왜 인적도 드물고 문화 혜택도 덜 입을 만한 시골에 내려 와 사는지, 누구의 상식으로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럴 때 그들을 맞는 것은 겉으로야 따뜻한 환대 뒤에 숨은, 근거가 있든 없든 마을 전체에 돌아다니는 불측하고 불쾌한 루머이기가 십상이죠.

바스크 지방은 과거 스페인의 분리주의자들이 극렬한 테러를 일삼던 지방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의 독특한 지방색은, 거주자들이 엄청난 다혈질이라는 점(젊은이들이 대단한 미남미녀라는 건 주관적 편차가 크므로 논외로 하더라도) 외에도, 그 바스크 방언(이라기보다 독립된 언어)이 어느 어족에도 손쉽게 분류해 넣기 어려운 기묘한 구조라는 데에도 있습니다. 말이 어렵고 복잡하다는 건,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정신 구조 역시 (주로 감정적 측면에서) 분석하기 매우 어려울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여튼 이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은 프랑스 영토의 바스크라서 정치적 문제 같은 건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바스크도 나바라 지방처럼 피레네 산맥 근방에서 두 나라 사이에 쪼개져 있기 때문이죠.

트레빌 가문은 명망 높은 귀족 집안이고, 가장인 트레빌 씨는 뛰어난 지성을 지닌 학자이며, 쌍둥이인 두 남매 역시 영리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젊은이들입니다. 이런 그들이 왜 파리에 살지 않고(그들의 신분에 걸맞는 사교 생활, 그리고 고위층 인맥의 이점을 포기한 채) 이 한적한 시골에 내려왔는지는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한창 나이의 두 남매가 모두의 선망 대상이 될 만큼 빼어난 용모의 소유자들이기에 (이른바 제8의 대죄-그런 건 없습니다만- 라는) 집중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됩니다. 일이 꼬이느라고 그랬는지, 이 마을에는 몽장이라는 (좀 이상한) 이름을 가진, 용모 훤칠한 젊은 의사가 이미 부임해 있습니다. 닥터 그로라는 경험 많은 의사가 그를 조수로 쓰는 중인데, 이 젊은 몽장 역시 (고향이 바스크라고는 하나) 왜 대도시에서 개업하거나 수련하지 않고 이런 후미진 곳에 내려왔는지도 수상쩍기는 합니다.

이 닥터 몽장과, 트레빌 가문의 그 젊은 처녀가 어느 날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주친 후, 없던 사고도 경박한 수다만으로 만들어 내고야 말 기세인 이 시골에서는 맹렬한 새 루머가 번집니다.  마을에서 오가는 모든 소식의 중심에 서 있는 닥터 그로가 몽장에게 가르쳐 준 바로는, 벌써 두 남녀가 말을 주고받으며 길을 같이 걸은 그 시점부터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몽장은 황당해하지만, 한편으로 카챠(그녀가 자신의 이름이라며 가르쳐 준 것)를 향한 뜨거운 연정을 자신도 부인할 수 없기에, 또 아직은 젊고 미숙한 나이이기에 혼란에 빠집니다. 이 정도 혼란이라면 그 나이에 으레 겪게 마련인 행복한 난관이기도 하겠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군요.

카챠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입니다만, 왠지 그런 자신의 아름다움을 (분명 그녀 본인도 호감을 느끼는 중인) 몽장에게 부인하고 듭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그저 건강하고 매력적일 뿐이라나요. 그런가 하면 마치 덤덤한 제3자처럼 "당신(몽장)은 당신이 미남인 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런 치들이 흔히 보이는 거만함이 없어서 마음에 든다." 같은 이상한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일 수 있으나 이게 한창 나이의 처녀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죠. 건조하고 냉정한 남성 훈수꾼의 목소리라면 모를까. 여튼 몽장은 지금 열정에 휩싸여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상한 점을 분석할 겨를이 없습니다.

카챠에게는 15분 차이의 "터울"을 둔 일란성 쌍둥이 남동생 폴이 있습니다. 이 폴이 방해꾼입니다. 물론 폴은 귀족 가문 특유의 냉정한 시각, 점잖고 이성적인 추론 끝에 심사숙고하여 "누나와 당신, 즉 몽장"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합니다. 사랑에 빠진 남성이 눈에 뭐가 바로 뵐 리 없겠습니다만, 사랑하는 여성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성(예비 처남?)이 뭔가 이유가 있는 듯 충고하는 말이기에 이게 또 바로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몽장 역시 교육을 받을 만큼 받은 사람이고, 자기만큼이나 이성적이며 사려 깊은 이가 하는 말을 흘려 들을 만큼 무모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영화 <몽상가들>이라든가, 1994년작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컬러 오브 나잇> 등의 여러 모티브가 함께 연상되기도 합니다(이 영화들은 모두, 이 작품보다 10~20년 늦게 나온 것들입니다).

자신의 누나를 올바른 방법으로 걱정하고 배려하는 폴이기에, 이 닥터 몽장의 인간적 진실됨을 알고 폴은 진상을 털어 놓습니다. 폴이 진실이리고 믿는 바를 모두 설명 듣고, 닥터 몽장은
그제서야 모든 의문을 해소합니다. 의문이 해소되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게 마련이죠. 그 순간...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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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오히려 지금부터, 아마 극중의 몽장은 물론 우리 독자들에게 혼란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몽장은 갑자기, 과다 출혈로 의식을 잃고 병원에 이송되어 온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점잖기 짝이 없는 전형적 학자인 트레빌씨가, 딸과 청년 사이의 밀회를 목격하곤 총을 쏜 겁니다...라고 몽장은 설명을 듣습니다. 이치에 닿는 게, (총기 사고가 나기 직전)폴로부터도 동일한 설명을 들은 후였기 때문이죠. 가벼운 부상에 그친 몽장은 의식을 차리자마자 바로 트레빌 저택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몽장이 만난 오르탕스, 아니 카챠, 아니 "폴"은 그에게 끔찍한 현장과 끔찍한 (진짜) 진실을 들려 주는데요....

(아주 심각한 스포일러)
1. A가 B를 죽은 C라고 착각하여 D를 쏘고, 나중에 모든 진상을 알게 된 후(지금까지는 E가 A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사고를 친 게 B라고 거짓말을 해 왔습니다) 자살함.

2. A는 처음부터 아무 잘못이 없었고, 그 끔찍한 사고의 상흔에 의해 광인이 된 B가 이 모든 사고를 저지름. D를 쏜 것도 B고, 급기야 E와 A까지 죽이게 됨.

(스포일러 중 스포일러지만 독자로서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느낌)
마 지막이 섬뜩하죠? 결국 몽장은 어느 강간범이 치료를 받으러 자신의 병원에 들어오자, 고의적으로 치료를 빙자한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강간범이 어느 분의 인생을 망친 바로 그놈인지는 알 수 없지만(설마), 강간범의 일원으로서 무한연대책임을 지고 넌 그냥 죽어라! 이거 아니겠습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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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베니언(필명)의 작품들은 플롯이나 캐릭터의 실감, 박력, 독창성도 대단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만 형성되는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휘들의 사용이 단연 탁월합니다. 이 책 날개에 소개된 대로, 혹시 당신이 로버트 러들럼 아니냐는 질문에, "난 로버트 러들럼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대차게 대꾸했다는 일화가 우스우면서도 통쾌하게 다가오고, 과연 그 정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다 싶습니다(로버트 러들럼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에요). 트리베니언의 끈적끈적한 심층 심리까지 잘 파고드셔서(신통하네요. 비결이 뭘까요?ㅎㅎ), 거의 원문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 내신 번역가 최필원 선생님의 노고에도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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