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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 루브르를 거닐며 인문학을 향유하다 ㅣ 미술관에 간 지식인
안현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본디 텍스트로 된 인문과 구상을 갖춘 회화, 조소는 생각만큼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을 눈으로 받아가며 <천지창조>를 완성하는 고달픔이 미켈란젤로에게 있었다고 해도, 펜을 쥐고 개념을 정초하는 이들의 당혹과 고뇌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으니 누구의 일이 더 고상하며 편안했다고 단정할 것도 아닙니다. 또, 예술품이나 텍스트나 결국은 당대인(중 소양 있는 이들)의 공감과 합의를 담은 사상의 구체화이기 때문에, 전자의 해석, 후자의 구상화가 손쉽게 서로 통하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작이라고 평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 책은 미술품의 여러 사례를 통해 그 안에 담긴 메시지, 배경 설화, 작가의 개성, 실제 역사를 어떻게 읽어낼 지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선명하고 깨끗한, 그리고 부분에 초점을 뒀을 경우 어디에 주 시선을 두어야 할 지에 대해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책이더군요. 이런 책들이 사례를 들고 도상학을 가르칠 때("도상학"인지 뭔지도 모를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에게 쉽게 알려 주어야 성공입니다), 그리 많은 실례를 들지 않는 게 그간 불만이었습니다. 이런 분야에선 도그마화한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 작품 앞에서 얼마나 무리 없이, 융통성 있게 "이야기"를 풀어주느냐 하는 게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도상학에서 일단은 개별 작품이 무리 없이 설명되고 그를 보는 "독자"에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도상학은 예술과 유리된 별개의 "독재"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경험담, 혹은 실수에 대한 회고로 "디도"의 예를 듭니다. 본문에서 주로 설명되는 건 카이요의 조각이고, 사진으로는 뒤러의 회화도 제시됩니다. 카이요의 조각에 대해 "설화와는 달리 앳되어 보인다"고 저자는 평하시는데, 디도가 실제로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죠. 여왕이면 으레 나이를 먹었겠거니 여기는 것도 선입견일 수 있고, 도생 망명하는 아이네이아스와 사랑에 빠졌다고 아 이 중년 남성과 비슷한 또래겠구나 짐작하는 것도 꼭 정확하다고는 못합니다. "자결"이 반드시 루크레치아를 연상시켜야 하는 건 아니지만, 디도는 주로 그 시신이 활활 타오르는 게 대뜸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여튼 반례가 이렇게 융력한 것만으로도 두 점이나 있으니.. 1990년대 말에 "다이도"란 외국 가수가 갑자기 한국 대중에게 부상한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저 디도에서 따온 거죠. 프랑스어의 경우 어미(ending. 語尾)가 -n이 붙어 이상하다고 하시는데, 확실히 이 디도의 경우는 이상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원어도 여튼 오메가로 끝나므로 어미 없는 꼴처럼 보이고, 다른 언어의 표기례는 그저 -o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니 말입니다. 영어는 반대로 무조건 떨어뜨리고 보는 게 습관이라 짜증이 나지만요.
앙리 4세가 사랑했던 정부(情婦)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동생을 그린 유명한 회화(이게 작자 미상이죠)는 사실 일개 가십 거리에 지나지 않는 게 분에 넘치게 회자되는 경우입니다. 저자께서도 "어딘가 엉성하고, 마땅히 배웠어야 할 시대의 첨단 기교(이런 걸 영어로 state of the art라고 합니다)가 반영되지 못했다"고 하시는군요. 과감하게도 외설적이고 짖궂은 제스처를 대상화했다는 점에서 예술 자체의 성취보다는 정치 풍자의 의도가 짙은 작품인데, 당시에는 이 두 영역이 미처 분화되지 못한 이유도 있겠고, 당대인들에게 그토록 큰 화젯거리를 던져 준 작품을 쉬이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내지 못한 미련도 한몫하지 않았을지 짐작합니다. 처가로는 발루아, 모계로는 나바르(나바라)의 적통을 이어받은 앙리 4세는 사실 전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축복 받은 군주였습니다. 일개 초라한 방계 왕족에 지나지 않았던 부르봉의 명자(존재감도 없었던)는 오로지 그로 인해 프랑스 왕실의 대명사처럼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죠.
"혁명의 피를 그만 멈추어라!" 납치되었던 사비니(사비눔)의 여인들이 이제 돌아와 "이미 우리는 로마 아기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며 양측의 싸움을 말리는 장면은 자못 감동적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극단적 대결을 부추기는 족속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남들이 이만큼 나아갔을 때 그에 미치지 못하고 뒤처진 이들입니다. 남들이 상황에 대해 이만큼 각성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 때 여전히 과거의 상처로 (저 혼자) 몸부림치는, 아주 일방적이고 미숙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낙오자죠. 이런 사람들이 자기 인생 망가진 게 억울해서 무리를 선동하고 평지풍파를 일으킵니다. 싸움을 말리는 게 여인으로 채 자라지 못하고 미숙한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아닌, 아이를 낳고 세상의 다른 국면을 겪어 본 이들이라는 게 유독 눈에 띕니다. 물론 애를 낳고 키워도 여전히 철이 못 든 인간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시몽 부에의 작품 둘을 들며 특히 작품에서 풍기는 우의(의 힘을 가르치는 저자의 태도인데요. 사실 도상학의 출발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림은 물감과 붓과 종이를 통해 쓴 인문의 표현이자, 궁극의 이데아를 재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저 펜과 개념으로만 이뤄진 텍스트로서의 인문과 분단되거나, 별개의 영역으로 갇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죠. 까다롭게 여겨지고 따로 공부가 필요하다는 건 선입견에 불과한데, 이상하게도 제가 유년기에 읽었던 학생백과사전 미술편에도 "미술은 으레 어려우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당연한 전제처럼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연예인 뒷담화처럼 때로는 천박하기도 하고, 종교의 오의를 가르치는 신비함과 신성함도 때로는 담습니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지만 딱히 무람히 여길 것만도 아닌, 우리의 고상함과 가벼움, 사악함과 활기참을 그대로 담은, 인간 정신의 모상이자 자녀를 대하는 눈으로 미술을 대하는 게 정답이지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