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의 중동을 말하다 - 이슬람.테러.석유를 넘어, 중동의 어제와 오늘
서정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과거에는 이란- 이라크 사이의 전쟁, 팔레스타인 일대에서의 이스라엘과 PLO 사이의 갈등, 그리고 레바논 안 기독교- 무슬림 세력 사이의 충돌이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이 세 지역에서의 말썽은 과거에 비해서는 그나마 잦아든 편인데요(이스라엘 일부 지역에서 아직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긴 합니다만). 대신 서방 세계와 무슬림 사이의 전면적 적대관계가 큰 규모로 비화하여, 어떻게 된 게 눈만 뜨면 접하는 게 세계적 범위에서의 테러 소식입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데에는 우선 부시 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이슈 핸들링이 큰 비난을 받아야 하겠습니다만, 근원적 이유를 찾자면 서방 세계 거주자들의 전반적 시각, 그리고 이들에 표준을 맞추며 살아가는 우리들 관점까지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 같네요. 한마디로, "남을 욕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자"는 취지인데요, 이 책의 저자께서 독자들에게 촉구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이슬람 혹은 중동을 호의적으로 보건 비판하건 개인의 자유이나, 팩트를 정확히 안 후에 그런 시도를 해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거죠.
우선 우리는 이슬람, 무슬림 세계와 중동을 자주 혼용합니다만,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동은 기본적으로 지리적 개념이고, 이슬람이니 무슬림이니 하는 건 종교적 프레임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께서는 이스라엘 인들과도 직분상 자주 접촉하시는 편이라고 하는데, 이들에게 "이슬람"의 카테고리로 화제를 꺼내면 불쾌해하는 게 당연하죠. 저자분이 우려를 드러내는 건, 특히 한국인들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건 사실 한국이란 범위를 벗어나면 바로 오류로 드러나는 게 많습니다. 설사 한국이나 서방 세계 전체가 상식으로 판단하는 사항도, 중동인들에게 이를 들이대면 불쾌해할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만의 가치관에 불과하다면 오죽하겠습니까. 이는 주체 의식의 결여나 사대주의 같은 게 아니라, 우리가 사업상 상대해야 하는 파트너에 대한 기본적 예의입니다. 거래를 트겠다면서 그들의 비위를 정면으로 거스른다면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죠. 과거 중동 지도자들과 상대하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큰 규모의 프로젝트 추진에 성공한 최 모 회장, 김 모 회장 같은 분들은 이 점에서 각별히 처신에 능했기에 성공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독재자가 흔히 수십 년 간 국가를 지배하곤 하는 저들의 풍토에 곧잘 거부감을 드러내곤 합니다. 헌데 저자는 특히 중동 정치 문화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 현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중동 중에서도 특히 유대인을 제외한 셈 족은, 강력한 무력 지도자가 하나 출현하면 그 자가 죽을 때까지, 혹은 무력적 우위를 상실할 때까지 그 지배를 용인하는 게 오랜 전통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일단 힘이 곧 정의라는 사고 방식, 그리고 그런 무력에 의해 무질서가 극복되는 편이 모두를 위해 차라리 이익이라는 어떤 합의가 오랜 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ㅎㅎ
독일의 칼 슈미트도 일단 권력이다 힘이다 하는 결단으로, 모두를 위해 헌법 질서가 일단 잡히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을 했고, 홉스 역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어떤 방식으로건 종식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강조한 바는 있습니다. 아무튼 저들 서아시아인들은 아직도 저런 사고 방식으로 사회와 체제, 질서를 바라본다고 하니 그 점을 유의하고 대화에 임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죠. 이게 사실 진보적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큰 갈등이 생기는 대목인데, 1) 일단 서구 사람들의 일방적 가치관을 주입,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가 있지만, 2) 막상 현지인들을 이해하려 들고 보니 저런 후진적(이렇게 대뜸 규정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죠?) 사고 방식에 머무르고 그걸 고집하기까지 하는 양상을 어떻게 이해해 줘야 할지, 두 시각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이에 대한 담론 내 토의가 한창 진행 중인, 미해결의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슬람 프레임과 서아시아 프레임을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저렇게 강력한 남성이 전면에 나서 자신의 의지로 무질서를 평정하고 힘에 의한 통치를 펼치는 건, 종교로서 이슬람 교의와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이슬람이 종교로 성립한 건 1400년이 갓 넘었을 뿐이고, 서아시아의 가부장적 남성 우월주의는 그 몇 배도 넘는 역사를 갖습니다(구약성경, 혹은 유대교의 토라에 얼마나 지독한 남성 우월주의가 배어 있는지를 떠올리면 요게 실감나죠). 이슬람교는 오히려 이런 막무가내 추세에 적절히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종교로서 이슬람을 비난하거나, 광신적 행태가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비난하는 건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저자는 중동권에서 표기되는 문자인 아랍 글자(물론 유대인은 다른 문자를 씁니다)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형태인 데 대해, 한국인은 예전부터 이런 표기 관습을 지녔으며(다만 종서[縱書]라는 데서 큰 차이가 있긴 합니다), 지금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는 이를 준수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아시아 공통의 행태일 뿐인데 왜 이상하게 여기냐는 거죠. 그러나 저는 1) 일본이나 중국도 가로쓰기가 최근 확산되는 추세이며, 2) 합리적인 관행으로 인류가 중지를 모아 살아남은 관행에 대해서는 다른 것과 같은 비중(가중치)를 주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또, 서양 역시 왼쪽보다 오른쪽에 문화적 타당성을 주어 온 건 우리와 다르지 않기도 하고 말입니다.
저자는 "아랍의 민주화 추세는 결코 우리보다 뒤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근거는 이미 19세기부터 민주주의나 평등 사상이 널리 대중과 지식인 사이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듭니다. 다만 경제 운용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부족장 세력에게 주어지는 권위가 매우 크며, 이 국민 경제 대부분이 지하자원인 석유의 채굴에 의존한다는 특수한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으나, 앞에서 논급된 "서아시아 고유의 가부장제 문화" 고려와 다소 상충되는 면이 없지 않네요.
중동, 아랍인들은 특히 상술에 능한 민족성으로 유명합니다. 벌써 고려 시대에 무역항 벽란도를 통해 그 먼 거리를 왕래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죠(물론 국제 무역 허브인 당, 송의 항구를 거쳤긴 했지만). 1) 저자께서는 두 가지를 특히 주의하라고 지적합니다. 사재기는 불법이 아니다, 2) 택시 운행 바가지 등 상인이 벌이는 수작은 결코 비난 대상이 아니다. 본래 이들은 이처럼 터무니없이 판을 벌이거나 과도한 조건을 제시하고, 상대의 깜냥과 배짱에 따라 흥미로운 말장난을 주고 받으면서 흥정을 벌이는 게 관습이라는 거죠. 이걸 불쾌하게 여기거나 도덕적으로 분개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람은 아주 도량이 협소하고 꽉 막힌 인간으로 취급되어 다시는 거래를 틀 수 없다고 합니다. 현지에서 사업을 벌이려는 입장에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항이죠.
아랍이 왜 이렇게 경제적으로 후진적 구조에 머무르는가. 이는 문화가 아닌 경제적 수치로 드러나는 현실이므로 편견이라든가 왜곡으로 볼 게 아닙니다. 제조업이 대단히 미비하게 발달했기 때문에, 왜 지난 몇 년 전 이집트, 리비아 독재체제가 무너질 때 대뜸 첫째 원인으로 거론된 게 청년 실업이듯, 만성적으로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게 이 사회의 고질병입니다. 이유는 간단한 게, 제조업을 영위하려면 신경 써야 할 건 너무 많고 시설의 덩치는 크고 그 들인 노력을 고려하면 이문도 박한 게 사실입니다. 상업이란, 그에 비하면 적게 투자하고 많이 남기는 게 분명하죠. 대신 제조업은 개인 차원의 부자만 양산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 거느리는 노동력 규모가 엄청나고, 한번 흥하면 시시한 상인 따위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부를 크게 쌓습니다. 만약에, 그저 주위의 시시한 사람들, 빈곤층만을 상대로 부자 행세를 하고 싶다면(즉, 더 넓은 세상의 표준이 뭔지 모른 채 자신만의 표준에 갇히고 싶다면) 제조업이란 모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게 서아시아 경제 체제의 근본 모순입니다. 중동 이야기를 할 것도 없고, 과거 한국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로부터 얻어야 할 시사점은, 제조업을 간절히 갖고 싶으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는 그들에게 우리의 합작이 대단히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한번 인간관계가 뚫리면 대단히 화통하게 구는 그들의 생리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수쿠크 등 아랍에서 자리잡은 전통적인 금융 방식에 우리가 전향적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전쟁에서 위태하지 않다는데,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이들을 이해하고 가까이에서 사귀려면 무엇보다 먼저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협력도 가능하고, 혹 비판을 하려 들어도 올바른 비판이 가능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