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종 살인자 밀리언셀러 클럽 25
로베르트 반 훌릭 지음, 이희재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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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 "디 공(公)"은 가공의 인물은 아니고, 당나라 때 실존했던 관료입니다. 이 디 공 시리즈는 그의 젊은 시절 지방의 행정과 사법을 관할하던 수령으로서 그의 현명하고 매혹적인 활약을 다룹니다. 작가는 권말에서 자신이 어느 문헌의 어느 부분에서 모티브와 소재를 얻었는지 소상히 밝히는데, 비록 실제 기록에서 착상과 영감을 얻었다 해도 그 형상화와 쫄깃한 구성 솜씨를, 전통 중국식 회장체 소설의 형식 안에 능청스럽게 발휘하는 게, 읽는 재미로서 최고의 장르물 안에 거리낌 없이 꼽고 싶습니다. 이 사람을 소재로 삼아 중국판 명탐정 연작을 짓는 게 이 네덜란드 작가의 시도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분의 창작 세계에서 접하는 "디 공"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매력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서양인의 문예라는 이질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책 어디에도 언급이 없긴 하나, 주인공 "디 공"은 우리가 잘 아는 당 고종 때의 문신 적인걸입니다. 狄(적)을 현대 북경어로 "디"라 발음합니다. 물론 소설의 배경이 된 당나라 때에 이 글자의 음운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겠고요.

이 소설에는 세 건의 미제 범죄 현안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은밀히 어느 서생과 교제하던 푸주한의 딸이 느닷 강간치사의 희생자로 발견된 사건입니다. 당연 왕씨 성을 가진 생전 그녀의 정인이 용의자로 부각될 수밖에 없는데, 무지몽매한 지역민들은 왜 신관 사또가 냉큼 범죄자를 처단하지 않는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두번째 사건은 사건이라기보다 추문과 의혹에 가까운데, 새로 부임한(?) 주지승이 불임 여성들의 숙원을 아주 신통하게 해결해 주는 능력으로 큰 신망을 얻고, 동시에 엄청난 축재에까지 성공하지만, 어떤 흑막과 술수가 있으리라는 게 지역의 중론이라는군요. 마지막으로는 다분히 실성한 듯 보이는 어느 노파가,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킨 어느 토호의 만행을 이 지방관 디 공에게 고발하며 정의의 실현을 읍소하는 사안입니다.

디 공은 괜한 선입견과 감정,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기록을 꼼꼼히 검토한 후 허점을 발견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가장 있을 법한 진상이 과연 무엇이었겠는지에 대해 꼼꼼하고 치밀한 추론을 한 후, 자신의 시나리오가 타당한지를 검증하기 위해 현장 실사에 나섭니다. 이 점에서, 이번 주부터 OCN 시리즈 채널에서 방영 중인 미국 드라마 <엘리멘트리>에서 맹활약 중인 셜록(조니 리 밀러가 연기합니다)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디 공께서 더 점잖고 더 침착하며 용모가 더 빼어나시고 더 젊어 보이는 데다 우리 동양인의 감성에 더 부응하는 듯합니다. 첫째 사건은 거의 한눈에 진상을 파악하는데, 시신에 난 상처와 용의자의 물리적 상태가 서로 맞지 않음에서 단서를 잡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왕생의 경박해 보이는 친구가 진범이라 추측했는데 그건 아니더군요. 둘째 사건은 아예 마음을 비우고 접근합니다. "정말로 부처님의 영험으로 포태의 기적이 일어났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게 괜히 의뭉을 떠는 게 아니라 그 나름으로는 진심이었던 듯합니다. 확고한 양심과 주견이 갖추어진 교양인이었기에 발휘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지요. "사불범정"의 오랜 동양적 신조가 여기서도 재확인되는데, 작가께서 참 동양학에 깊이 천착하셨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순박하고 착한 처녀를 무참히 살해한 그 진범이, 디 공의 치밀한 수사망에 걸려 들어 마침내 제 죄를 자백하는 과정도 통쾌하고, 탐정이라기보다는 거의 전략가의 면모와 능력으로 흉측한 주지승의 정체를 밝히는 흐름도 속시원하지만, 이 책 제목 "쇠종 살인자"에 걸맞게 그 핵심을 이루는 범죄 사건은 바로 셋째 케이스입니다. 지방의 (중앙에 든든한 연줄도 갖춘) 대토호와 맞서며 마침내 그 잔인무도한 악행을 낱낱이 밝히는 디 공의 활약이야말로 압권이라 하겠는데요. 린의 죄명은 현대 영미 법제로 따지면 OBSTRUCTION OF JUSTICE이겠는데, 미드 많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쪽에서는 상당히 중죄로 취급합니다. 소설 끝에도 나오지만 "사소한 죄명을 걸어 속인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여지가 이런 관점에서는 상당히 줄어들죠. 우리 실정법의 "공무집행방해죄"는 엄격히 해석될 뿐 아니라 형량도 적은 편입니다.

사실 세 사건 모두 (마치 홈즈 시리즈처럼) 명탐정의 일방적인 능력 발휘를 그저 넋놓고 감상할 뿐 독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여튼 재밌었으니 만족하며 책을 덮으려는 순간, 진짜 반전이 하나 기다리고 있더군요. 힌트는 본문 중에 부족하지 않게 주어진 편인데, 읽으면서 뭔가 수상쩍다거나 사리에 안 맞는 바로 그 대목이 힌트이니 한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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