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 발칙한 혁명 - 비틀스, 보브컷, 미니스커트 - 거리를 바꾸고 세상을 뒤집다
로빈 모건.아리엘 리브 지음, 김경주 옮김 / 예문사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독서를 즐기는 이에게 책은 아름다운 여성과도 같습니다. 예쁜 외모에다 담고 있는 정신 세계까지 꽉 찬 내실이라면 그녀와의 만남은 반나절이 촌음처럼 지나갑니다. 제게는 지난 한때의 문화사 단면을 매우 소프트하게, 그러나 비비드하게 싣고 채운 이 책이 그런 교양 있는 미인처럼 느껴졌습니다. 날씨가 더울수록 미인을 만나고 다녀야 한다는 진리를 확인이나 시켜 주듯요^^

이 책은 거센 혁명과도 같이 당대를 찾아왔던 1963년의 여러 문화적 사건들을, 대중 문화의 창조, 비평, 체계화에 앞장 섰던 여러 예인, 평론가, 저널리스트 등의 입을 빌려 회고하는 형식입니다. 영미권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거물들이 묵직하면서도 생생하고 진실된 증언으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데요.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도 결코 낯설지만은 않을 기라성 같은 가수, 작곡가, 패션 디자이너, 영화 배우, 모델 들의 이름과 발언이 마치 올스타 퍼레이드처럼 지면상의 행진을 계속합니다.

만약 문화사나 사회학 관련 서적(대학 교과서든 대중서든 불문)을 꼼꼼히 읽어 온 독자라면, 이 책 인터뷰 거의 35% 가량을 채우는 각종 매체의 기자, 편집장, 기획사 CEO, 사진 작가 등의 이름도 상당히 친숙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영화도 올스타 캐스팅으로 꾸려진 작품이 있듯이, 이 책도 이처럼이나 유명한 인사들을 일일이 만나 짧지도 않은 인터뷰를 따오기도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화려한 면모입니다. 인터뷰만으로도 값진 컨텐츠인데, 이 책에는 적지 않은 분량의 사진까지 실려 있는데. 인터넷이나 다른 책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귀한 아이템들이기까지 합니다.

이 책은 인터뷰의 모음입니다만, 인물별 편제가 아니라 주제어, 키워드에 따라 편집되었더군요. 책은 모두 4파트로 나뉘었는데, 각 파트는 2~3개씩의 키워드가 이끄는 작은 챕터로 다시 나뉩니다. 이 챕터들을 리드하는 소제목은 모두 알파벳 A로 시작하는 영단어들입니다. 1963년을 대중 문화가 세계인의 행동 양식과 시스템을 장악한 기원의 해로 보는 저자들의 관점이 반영된 포맷이겠습니다. 인물별 인터뷰로 책의 편제를 꾸리는 게 일반적이고, 그 중 가장 성공했고 유명해진 예라면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지금은 사세 퇴조로 아랍 갑부가 인수했죠)가 펴낸 <젊은이여 오늘을 이야기하자>같은 책이 있죠. 묘하게도 그 책 역시 1960년대의 노도와 같던 흐름을 대변한 여러 학자, 운동가, 예술가 들을 다룹니다. 그 책의 비중이 학자나 사상가들에 압도적으로 치우쳤다면, 이 책이 다룬 인터뷰이(interviewee)의 비중이 대중 문화 종사자 쪽으로 거의 90% 이상이라는 게, 두 책이 각각 발간된 시점 사이의 간격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1960년대가 아직도 지식인에 의해 점령된 시대였다면, 이 책이 우리를 만난 21세기의 지배자, 리더, influencer는 누가 뭐래도 대중문화예술인들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돕는군요. 혁명이 현재진행형이던 시점에도 여튼 그 진단과 해석은 교수들의 입에서 나와야만 했던 게 과거라면, 지금은 당연 그 현상의 담지자, 추진자들인 예술인 스스로 입을 열게 하게 이를 들으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이 당연한 사실이 반 세기 전 과거에는 당연하게 인정되지들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이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은, 완독한 독자인 제가 대중해 보건대 85% 정도가 영국인들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선 저자 서문에도 잠시 언급되듯 시대상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이 단지 대중문화 풍속도 모음에 그치지 않고 진지한 역사서의 한 가닥에 이어짐을 증명(아, 어쩌면 이렇게 책의 태도에 따른 분류를 하고 들어가는 태도가 시대에 뒤떨어진 습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던 밥 딜런이나 키스 리처즈가 알면 많이 떼찌할 수도 있겠네요)하는 대목이기도 하구요. 영국은 비록 2차대전에서 승리했지만, 피로스의 승리였음을 스스로 폭로하기라도 하듯 너무도 비싼 대가를 치르고 국가적 위상에 있어 많은 층계를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첫째로 영국은 제국을 잃었습니다. 인도를 비롯 광대한 식민지를 모두 독립시켜야 했고, 수에즈 운하 운영권도 1950년대에 나세르 등 민족주의자들의 과감한 액션에 의해 내줘야만 했습니다. 해외에서 지킬 자산이 없으니, 청년들을 징병하여 군대를 만들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성년이 되는 해 어느날 갑자기 "군대에 끌려갈 악몽"에서 해방된 소년들은 이제 청춘을 보다 자신의 욕망과 꿈의 실현에 정직히 쓸 짬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와 애국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도 해방되었습니다.

둘째로 영국은 대전 당시 노동자계급의 무수한 인명 희생과 헌신에 의해 국가를 지켜낼 수 있었으며, 이 대가로 역사상 처음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는 경험을 맞이했습니다. 이 책 저자는 "처칠 수상에 신물이 난(그가 나치로부터 국가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이,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천황의 내각을 옹립한 충격을 여러 대목에서 술회합니다. 영국의 정치판을 갈아엎은 것도 노동계급이며, 그로부터 십 년 후 지식인과 정치인으로부터 대중예술인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혁명"을 이끈 것도 노동계급이라는 사실입니다(이런 단정적인 문장은 저자의 견해도 아니고 책에 표현도 안 되어 있습니다만, 결국 독자가 deduce할 수 있는 주제가 한 마디로 이것이라고 제 개인적으로 정리합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이 책은 촬영 각도를 달리한 "역사책"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딱딱하냐면 그렇지는 전혀 않고요, 이 책은 앞서도 말했듯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유명인들의 인터뷰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만 인터뷰어의 질문이 명시적으로 나눠지지 않고(아마도 그 "질문"은 챕터들의 소제목, 키워드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터뷰이들만 자꾸 튀어나와 (대체 뭐라고 질문을 받았기에)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그땐 이랬어"를 수다 떨고 있습니다. 이 수다가 아주 즐겁고, 때로는 당혹스러울 만큼 솔직합니다. 솔직한 말을 털어 놓고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는 게 예술인들의 장기입니다. 지식인들의 현학적 어투, 정치인들의 범죄적 거짓말에 질린 대중들이 아닙니까. 이들 예술인들은 대중을 의식하기에 정직할 수밖에 없고, 그를 떠나 천성이 솔직한 영혼들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 중, 대략 계산하건대 80% 정도는 노동 계급 출신입니다. 이유는 앞서 말했습니다. 대전이 끝나고 제국이 해체되자 이 계급은 비로소 정직하고 건강한 자각을 시작한 겁니다. 1963 대중 문화 혁명을 이룬 주역들이, 허울과 가식을 집어던지고 새로운 소통을 이룬 거대한 움직임을 이끈 건 논리적으로 실물적으로 필연이었습니다. 또한 애초에 노동계급이니 중산계급, 상류층이니 나누는 것 자체가 다분히 영국적 현실에 적용될 만한 인식 작용입니다. 프랑스만 해도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귀족의 족보부터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걸로 여겼고, 독일은 호언촐러른 왕가가 축출되면서 귀족의 위신이 현저히 추락했습니다. 미국은 처음부터 근본 없는 이민자들이 몰려 가 세운 나라입니다. 오로지 영국만이 20세기의 절반이 지나도록 제국의 체통에 얽매이며 계급적 구분이 사회적 실체로 존재했습니다. 이 노동 계급이 더 이상 꺼리낄 것 없다는 듯 맹렬히 사회의 장벽을, 문화 섹터에서 소프트하게 밀어붙인 혁명이 바로 이 책의 주제입니다. 20세기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바로 이런 시대 배경을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책에 나오는 진술과 증언들은 정말로 진솔합니다. 이 중에는 프로퓨머 스캔들로 애스터 자작과 큰 물의를 빚었던 맨디 라이스데이비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의 소개는 "모델, 배우 겸 작가"라고 합니다만, 사실 당대인들에게 천하의 몹쓸 창녀로 찍히다시피 한 사람입니다. 하긴, 어제 제가 SBS 스포츠 채널에서 방영된 "무하마드 알리 특집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만, 그 레전드 복서도 자신의 시대에는 "반역자, 징병 기피자, 과격 테러리스트"로 혹심한 비난을 받았죠. 공교롭게도 그 역시 19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유명인이죠(연예인이 아닌 운동선수이긴 하지만). 라이스데이비스는 이 책 서문에도 나오듯, 영국에서 윈저 왕가 다음으로 성골 혈통으로 꼽는 애스터 가의 로드 윌리엄 3세(이 사람은 sir가 아니라 lord입니다)와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 엄중한 귀족의 구차한 변명과 땅에 떨어진 위신이 우습다는 듯 "He would, wouldn't he?"라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이 쿼트가 책 p19에 인용되어 있는데요. 다만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그 당사자가 누군지 이름이 전혀 없네요. 본문 중 네 차례나 등장하는 맨디 라이스데이비스가 그 주인공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은 착오 없으시길).

마이클 케인도 우리는 맨날 폼 잡는 영감님으로 나온 걸 봐서 잘 모르지만 사실 이 시기 "혁명"을 주도한 주역 중 하나죠. 이 시절의 그를 회고하는 배우는 "도통 귀족 역을 못 맡던 배우"로 기억하는데, 당연합니다. 케인은 지금도 런던 코크니 사투리로 한몫보는 사람인데 누가 그에게 귀족 배역을 주겠습니까? 이 대목은 배경을 뻔히 아는 사람끼리 즐기는 농담에 가깝죠. 마치 우리가 이덕화 씨 하면 대머리를, 이상민 하면 거액의 빚을, 샵의 서지영 하면 금수저(와 다른 어떤 사건)를 바로 연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터뷰 내용대로 <줄루 전쟁>(이 영화는 1964년작인데, 책 중에서 특히 언급된 게 이 까닭입니다)에서 새파란 중위로 나오긴 하는데, 많이 무리하는 모습이죠. 나이 들고 나서는 독일군 장교 역으로 모습을 보입니다. 아무튼 그는 이제 이름 앞에 sir를 붙이는 신분이니 한 사람의 말투와  작위를 동시에 접할 때 이만한 아이러니도 없겠습니다.

한국어판 추천사는 팝 칼럼니스트 임진모씨가 썼네요. 우리 나라 이 분야 1세대를 이양일 선생 같은 분으로 꼽는다면, 임진모씨는 그 세대가 공유할 만한 비판적 역사관(마일드한 편입니다만)과 신세대 문화의 세례를 동시에 받은, 1963을 증언할 자격을 갖춘 몇 안 되는 인사입니다. 물론 한국에서 이 "1963"은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먼 메아리처럼 찾아왔습니다만, 오히려 이 덕분에 60년대 부근에 출생한 이들이 자신들의 청춘기에 이 도도한 시대의 물결을 그만의 감성으로 수용하여 재생산할 수 있었겠습니다. "지금 그 시대의 영상을 보니 비틀즈가 섹스 피스톨즈처럼 보였다."는 본문 중 증언처럼,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이 시대에는 세상을 파괴할 반항이자 불순한 책동이었습니다. 인터뷰이들의 화제 근 40% 가량은 비틀즈 이야기이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이제는 늙어서 민망해 보이게(그래봐야 20대 중반이었는데)" 만든 1963의 혁명아들의 자부심 넘치는 표백이 가득한 만큼, 최소한 비틀즈 팬이기만 해도 결코 놓칠 수 없는 책입니다.

이 책은 또한 피사체들이 살아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건넬 듯 생생한 흑백 사진이 가득합니다. 특히, "비달 사순의 트레이드마크인 바가지 머리"라는 표현을 그저 텍스트로 접하는 것과, 이 책의 사진처럼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패셔니스타, 트렌드 세터들이 자신에게 적용하고 나오는 걸 눈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진짜 이야기는 흑백 사진만이 전달할 수 있다는 속설의 타당함을 다시 확인하게도 됩니다. 1963을 그저 역사의 일부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축복인지 불운인지도 잠시 생각하게 합니다. 악명 높은 폴란드 이민자 출신 지주 이름이 "피터 라흐만(라크만이 맞고요)"으로, p234의 비치콤버("코머"가 맞습니다) 같은 오타가 다소 아쉬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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