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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ㅣ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평점 :
우리 동양도 아득한 옛날 삼황 오제와 요 임금, 순 임금의 치세를 그리워하는 관습, 최소한 도학적, 문학적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서양 역시 그렇게나 오래 전에 자신들의 먼 조상(꼭 혈연으로 닿지는 않는다 해도)들이, 타인의 전횡적 지배를 거부하고, 중의(衆義)를 모아 공무의 방향을 결정하며, 나아가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결연한 싸움을 벌였던 전통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들이 구사하는 우아한 언어보다 훨씬 깊이 있고, 격조 있는 표현을 써 가며 타인의 감정과 논리를 자신의 것에 끌어오려는 문치(文治)의 우위를 비중 있게 믿었음 역시 경이로워 하죠.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일컬음은 이처럼 "말로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고상한 전통이 사라지고 창과 기마술로 정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려는 풍조가 만연했음을 개탄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로마, 특히 공화정 로마 시대는 이처럼 정치한 논리와 고아한 수사로 상대를 설득하고 보다 정의로운 총의를 모으려는 의사의 전통이 모두를 고개 숙이게 하던 시절입니다. 아직은 말입니다. 이러던 것이,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어찌 보면 모두를 승복하게 하고 진두에서 이끌어갈 덕목을 고루 갖췄다고 볼 수 없는, 하자 있는 지도자들이 오랜 전통을 정면에서 깨뜨린 이래, 타르퀴니우스 이래 존재하지 않던 폭군의 악폐를 악몽처럼 다시 공동체에 들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과거의 절도 있고 우아하며 고풍의 품위 있는 지배를 받던 체제가 아닙니다. 폭풍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었으며, 이렇게 된 이유는 과거처럼 드세고 무지몽매한 야만인들이나(1부), 차별 받던 변두리의 서자들이 오랜 세월 품어오던 불만 따위(2부)가 아닌, 바로 로마 스스로가 품은 내부의 모순 때문입니다. 이 3부는 자신과 싸우는 로마의 분투기입니다. 소설 중에도 직설적인 서술이 있듯, 오랜 전통을 지키려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술라와, 기사와 상인 계급의 관심을 더 돌보려는 카르보 등의 두 패로, 귀족에서 하층민까지 철저히 갈려서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부를만큼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까마득한 예전 남의 조상들 사연이 아닌, 오늘날의 대한민국과도 전혀 거리가 멀다고는 못 할 사정이기도 하죠.
대체로 저는 1부를 마리우스의 스토리로, 2부를 각각 다른 방향에서 로마를 격변의 소용돌이로 몬 술라와 드루수스의 사연으로 파악했습니다. 1부가 그야말로 로마의 이상적인 공화정 그 전형을 그대로 보여 주듯, 때때로 부패한(그리고 끔찍하게 어리석거나 무능한) 장군과 관료들이 등장하긴 했어도, 말과 설득력, 교양의 높이로 반대 진영을 포용하는, 그야말로 "동양적 군자(혹은 그를 가장한 위선자)"들의 우아미 경연의 장이었다면, 2부는 장년기의 그 원숙한 인격을 완전히 상실하고 광인이 되어 버린 마리우스, 그리고 더이상 근시안적 계급 이익 말고는 아무것도 살필 수 없게 된 귀족 계급 때문에 벌어진 난장판이었죠. 그렇다면 이 3부는, 마치 일본 전국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처럼, 혹은 칼 슈미트적(아니면 마키아벨리적?) 결단의 미덕으로 모든 혼란을 한 큐에 쓸어버릴 난세의 영웅이 등장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3부는, 마치 알렉산드로스 3세처럼 신비한 미모와 고귀한 혈통(일까요?), 신묘한 전법과 불굴의 용맹을 지닌 청년 장군 폼페이우스의 라이징을 그 핵심에 둔 기나긴 사연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술라나 마리우스(특히 후자는 이 매컬로 여사의 작품에서 너무 미화된 느낌이 있습니다만) 들은 우리가 여러 고전, 혹은 대중서에서 충분히 조명되어 대강의 캐릭터가 어렴풋이 그려지기까지 하는 익숙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들보다 더 중요한 비중임에도,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 앞에서 훼방을 놓고 말도 잘 못 하고 우악스럽게 판을 휘젓다 비명에 간 폭한 정도로 오해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실제로 그는 마치 초한 쟁패기의 항우처럼, 혈통도 좋고(일단은 그렇다고 하죠) 군략과 용맹도 뛰어났으나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던 면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사실 개인적 기량으로 비교할 때 마리우스가 과연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보다 못한 인물이었는지는 의심이 많이 듭니다. 더군다나 부계 기준으로 따지면 가문 역시 그리 모두 앞에 내세울 만큼 평판 있는 혈통으로 보기 어려운 게 폼페이우스입니다(마리우스는 정말로 양계 모두 한미한 출신). 그런 그가 왜 이렇게 모두의 환영을 받고(피케눔 출신 "가노"들은 뭐 그렇다 쳐도) 전면에 등장하게 된 걸까요? 외모가 빼어나서? 나이가 젊어서? 마리우스에게인들 그런 시절이 한때나마 없었겠습니까?(게다가 폼페이우스는 못 배운 걸로 치면 마리우스를 몇백 배로 압살하죠ㅋ)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정세의 판국이 과거의 가늘가늘 아름다운 전통만 내세워서야 도통 솔루션이 안 보이는 난국으로 접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폼페이우스의 (귀족 답지 않은) 무식한 과단성에 열광했던 것 아닐지요. 여튼 술라와 젊은(어린) 폼페이우스가 만나 서로의 속을 읽어가며 대화하는 장면은, 마치 어제 방영되었던 <38사기동대> 5화에서 마진석(배우 오대환씨가 연기)이 양정도(배우 서인국)에게 "우리 김계장님 내 과네 완전? 응? 보면 볼수록 내 스타일이야!"라고 하던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폼페이우스는 그러나 항우처럼 우직한 무인 기질만으로 상황을 돌파한 건 아니었습니다. 소설 중에 적절한 묘사가 있듯, 폼페이우스는 냉혹한 현실 감각과 끝없는 비전, 꿈을 동시에 갖춘 정신 세계의 소유자였습니다. 전자만 갖춘 사람은 비천한 정상배가 됩니다. 후자만 갖춘 사람은 백주 대로에서 맞아죽기에나 딱 좋습니다(안됐지만 드루수스 같은 인물). 술라는 이 중 어떤 유형이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자기 절제력을 갖추었고, 두뇌가 우수하며, 도광양회하다(ㅋㅋ) 한순간에 결단력을 선보이며 판을 엎어 버리는 실행력이 있는 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고 자유자재로 동화, 소통하는 정서적 안정까지 갖춘 유형이란 점에서, 아니아니, 게다가 외모까지 완벽한! 무슨 기준으로도(심지어 혈통까지! 코르넬리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오랜 가문의 표상! 코그노멘인 술라가 후져서 그렇지) 애송이 폼페이우스보다 우월한 남자였음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겁니다. 하필 마리우스 같은 평민 영웅과 역할이 겹쳐 초장에 괜히 진을 빼게 되었고, 슬슬 기를 펴 보려 하니 이번에는 나이가 발목을 잡는군요(피부가 너무 연약하고 아름다웠다는 것도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 단점.. 이건 농담입니다).
만약 술라가 좀 뒤에 태어나서 시저와 자웅을 겨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너무도 용호상박인 두 인걸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느라 로마는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바로 멸망했겠습니까? 아니면 역시 "주워먹는 타입의 정치적 천재"가 또 하나 나타나서(옥타비아누스처럼) 운명적인 제정으로의 발걸음을 틀었겠습니까? 확실한 건 이 폼페이우스 같은 천둥벌거숭이가 나타나 판을 흔들기는 힘들었겠다는 정도. 여튼 그는 자신의 이상과 꿈으로 세계의 현실을 삼켜 버릴(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다른 표현에서 인용합니다) 엄청난 정신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긴 했습니다. 이런 효과적인 안티테제가 나올 수 있었기에, 카이사르 같은 진테제가 결국 완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3부는 특히 올드 브루투스(원서에는 꼬박꼬박 "올드"를 붙입니다)가 나와 장기 떡밥 큰 덩어리가 촘촘히 뿌려집니다. 결과를 알고 봐도 재미있고, 번역의 가독성이 좋은 "마스터즈 오브 로마".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