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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과 귀족의 백제어
이원희 지음 / 주류성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이 자신의 근본을 바르게 아는 단계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뿌리를 정확히 파악하는 인생은, 조상을 욕보이지 않기 위해서도 그 행동거지가반듯하고 도의에 어긋난 행동이 없습니다. 반면, 본바탕을 모르고 제 핏줄에 무슨 정신이 흐르는 지 깨달음이 없거나 부족한 이는, 언제나 경거망동을 일삼게 마련입니다.
이 책은 고대 법대를 졸업하신 전직 검사님이 집필하신 책이지만, 내용은 일본 고문헌, 구체적으로는 <고사기>, <일본서기>, 그리고 <만엽집> 일부에 등장하는 여러 어휘의 분석을 통해, 일본 상층 문화의 뿌리가 바로 우리 민족, 구체적으로 백제인임을 명쾌히 규명하는 논증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아 그거 어려운 책이겠구나.'라든가, '우리 민족 우월주의에 빠진 독단적 주장이 들어 있겠구나' 같은 선입견을 대뜸 떠올릴 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이야말로 근거 없는 선입견일 뿐입니다. 이 책은 깔끔하고 과학적인 편집을 취하며, 언어학적으로 타당한 논증을 펴고 있어 읽기가 쉽습니다. 다음으로, 이 책은 언어학 주제를 넘어 우리 민족의 뿌리, 나아가 인접국 일본 민족의 근원이 어디인지, 역사적으로 심원한 통찰까지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을 완독하는 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내용이 난해하고 깊은 소양을 요해서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남도(전라, 경상) 쪽이 고향인 독자라면, 무척 재미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겠고요. 꼭 그쪽 방언에 익숙지 않더라도 우리말에 대해 기본적인 감각만 지니고 있다면 웬만해서는 흥미를 잃지 않을 만큼 피부에 와 닿고 쉬운 분석이 이뤄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완독이 오래 걸렸는가? 그것은 저자분에 대한, 독자로서 일종의 경쟁심이 작용해서입니다. 저자분은 중견 법조인으로서, 초보 수준의 일본어에조차 이해가 없으셨던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 와중 간단한 일어 회화가 필요한 자리에 참석하실 일이 있어, (비교적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일어 공부를 시작하고, 어휘 학습을 하다 보니 어느덧 고어에까지 손을 대게 되시고, (저자 자신의 말씀을 빌리면) 직업에까지 변화가 생기셨다고 하는군요. 이 책을 펼쳐 보면 알 수 있지만, 언어학에 여간 소양이 있지 않고서야 이 같은 깊이의 내용을 저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독자에게는 쉽게 읽힙니다(저자의 천착이 확고한 바탕과 일관성을 가진 덕분이죠). 과연 나라면 늦은 나이에 이런 성취를 보일 수 있을까. 그것도 초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직역인 법조인의 커리어를 지닌 처지라면, 이처럼이나 생소한 분야에서 깊이 있는 학문의이해를 다질 수 있을까 하는 낙담, 자괴감 같은 심리였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더욱 집중하여, 어딘가 허점이 있겠거니 한번 발견해 보자는 일종의 집착으로 더 열독을 하게도 되었구요.
이 책이 재미있는 건 일단 저자의 논증과 연구가 매우 치밀해서입니다.그저 이 분야의 명망 있는 권위서 몇 권을 독파했다고 해서 자연스레 나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분명 기존의 연구가 닿지 못한 상당히 깊은 부분, 나아가 여태 명쾌히 해명되지 못한 여러 의문이 매우 설득력 있게 풀어헤쳐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네비" 같은 지명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현지의 석학들도 합리적인 해의가 이뤄지지 못한 판에, 저자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상식과 직관에 비추어 타당하기 이를 데 없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보이는 그 과정도, 전형적인 천재가 영감을 얻어 바른 길에 도달하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저자의 희열이 지면을 타고 독자의 심중에 그대로 닿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책이 유익한 건 오히려 3부의 논증 덕택입니다. <일본서기>가 위조와 첨삭, 왜곡과 과장으로 점철되었다는 건 현지의 일부 양심 있는 학자와 우리 측의 태도였습니다만, 솔직히 독자로서 저는 그간 이 학설의 엄정한 중립성에 대해 그닥 자신이 없는 태도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편할 대로 이 소리를 하고, 저 사람은 또 제 이익에 맞는 대로 저 소리를 떠드는 형국이 아닐지, 제3자가 보기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 특히 3부를 읽고 나서, 기본적으로 그들의 고사서가 후대의 사악한 손길에 의해 제멋대로의(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솜씨도 서툴게") 조작되었다는 쪽으로 심증을 완전히 굳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론을 그들 고루하고 편협하며 정직하지도 못한 학계 인사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리야 물론 만무합니다만,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평범한 독자로서 저는 오랜 동안 풀리지 않거나 마음 속에 찜찜히 남던 짐이 말끔히 덜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자께서는 법조인 특유의 냉철하고 논리적이며 다각도로부터의 접근을 통해, 우리 선조들이 그들 미개한 열도에 문화의 씨앗을 틔운 자랑스런 선구자요 지배자들임을 거의 의심 없이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 설득에 설복됨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저 평균적인 상식과 지능을 갖춘 "보편적 인간"이라는 조건으로 충분합니다.
이 책은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해피 엔딩도 해피 엔딩이지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탐구 과정을 밟아 나가니 결국 우리의 자랑스런 뿌리가 나오더라는 그 결론이 너무나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저들 일본인들이 끝까지 과거를 반성치 않고 무도한 짓을 일삼는 것도, 다 제 과거에 대해 대단히 그릇된 인식에 머물러 있는 탓이 커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처럼 우리 민족의 찬란한 역정 그 일부를 알고 난 후에야, 광명되고 축복된 미래를 정직하고 건실하게 설계할 수 있음도 또한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교과 과정의 일부로 이런 내용을 교육하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