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은행에는 이자가 없다
해리스 이르판 지음, 강찬구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은행을 비롯 모든 금융제도는 채무자에게 대여한 자금 원본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자의 수취를 기반으로 유지됩니다. 이자를 받지 않고 수요자에게 돈을 빌려 주는 시스템은, "자선 사업"이라 불릴 수는 있을망정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본격 산업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슬람권의 은행은 그렇지가 않다고 하네요?

 

최근 최경환 부총리가 주택구입자금 대출 요건(DTI 비율 등)을 다시 강화하고, 거치 기간을 대폭 축소한 후 원금과 이자를 함께 상환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모색한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빚을 내어 집 사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확정 금리의 이익까지 줄이겠다는 건가." 같은 반발이 거셌는데요. 사실 자본 차입의 시간기반 기회비용인 이자는, 많은 경우 경제적 약자로 시작한 이들의 입지를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핵심 팩터 중 하나입니다. 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지역에서건,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라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이슬람 율법(샤리아)는 이미 고대부터, 무슬림 사이에 수수되는 이자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예언자 모하마드의 가르침을 따르고 유일신 알라의 권능에 대한 복종을 맹세한 이는 피부색과 혈통을 막론하고 모두 형제라는 공감대에 따라, 인간 대 인간의 교류와 소통을 막는, 오로지 시간의 경과라는 자연적 현상에 의거한 이자 발생에 대해, 원천적 정당성을 부인하고 든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이들에게 고리를 수취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빈부의 차이가 없어지고 풍요의 혜택을 고루 나눠 가지는 사회가 도래할까요? 예언자 무함마드는 그런 이상향을 꿈꾸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이슬람 사회는 그렇지 못하며, 오히려 다른 문명권보다 더 나쁜 구시대적 한계에 봉착한 면마저 있습니다. 이자 제도의 부인만으로는 사해평등 만민형제의 이념 실현에 아무래도 미흡한 바 있나 봅니다.

 

이 책의 저자가 진짜 하려는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저자는 비 이슬람권 일반인이 듣기에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을 소개하고, 그 사실 이면에 어떤 원리와 비결이 작동하는지를  책 전체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세상에 이런 방식으로 "돈"의 수요와 공급 섹터 사이에 이해의 조율, 혹은 win - win 을 시도할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경험했습니다.

 

우선 이슬람권에서 이자를 부인하는 건, 반드시 샤리아의 강제에 따른다는 배경 없이도, 세속적 합의를 어느 정도 이루고 있는 비교적 오랜 관습이라는 겁니다. 1950년대 이집트에서 일종의 투자은행(1990년대 후반까지 미국 등에서 엄격한 틀을 유지하던 그 투자은행 포맷과 대단히 유사합니다)으로, 수에즈 국유화 단행 이후 나세르 정권에서 시행되었던 시스템은, 역시 이자를 일절 금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럼 채권자는 무슨 동기에서 사업에 참여하는가? 자신이 돈을 투자한 사업에서 발생한 수익을 배분 받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결국 이자가 다른 이름으로 탈바꿈만 한 것이군." 혹은 "교묘하게 율법의 규제를 우회하는 수법인데?" 같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 역시 아주 틀린 시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보고 마는 사람들은,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놓치고 마는 겁니다.

 

사업의 수익 일부를 배분 받는 시스템이다 보니, 채권자 역시 자신의 돈이 쓰이는 사업의 구조와 내실을 꼼꼼히 살피고, 공동 운명체로서의 절박함이 있다 보니 그저 빚 독촉에 그치지 않고 아이디어나 기술적 기여를 함께 진행하게 됩니다. 채무자는 일단 눈 먼 돈 빌려 쓰고 보자는 식의 모럴 해저드가 줄어들고, 중개 기관 역시 그저 기계적 중개인으로서 형식적 계약 의무만 이행하고 끝이라는 식의 무책임함이 줄어듭니다. 신용의 심사나 사업 타당성의 실사가 다분히 내실을 기하게 된다는 점에서, 개별 프로젝트의 성공적 진행 확률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이는 단지 사태의 긍정적 측면만 부각하려는 일방적 주장이 아닙니다. 2009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금융 산업은 전 세계 규모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슬람 금융으로, 타 권역의 추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높은 수익률을 기록, 많은 관측자들로부터 대안으로서의 기대까지 품게 만들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이는 이슬람 금융의 구조를 보면 간단히 해명이 되는 현상입니다. 경기 활황- 기준 금리 인하 같은 일률적, 외부적 상황이 아니라, 사업자가 추진하는 개별 건수의 전망에 따르는 금융이니, 신용 경색이나 연쇄 도산의 여파를 맞을 확률이 낮은 게 사실입니다.

 

대출금 원본 상환 보장을 위한 제도적 수단은, 서구에서 발전한 근대 민사법상의 저당권 제도와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만, 원본(원금) 변제의 큰 비중을 담보물 환매수로 해결한다는 데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걸 구태여 우리 식으로 따지면 소위 "강한 의미의 양도담보"와도 유사한데, 일단 채권자에게 확정적 소유권이 넘어간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은행이 대출 희망자에게 무조건 소유 부동산에 저당권부터 설정할 것을 강요하고 보는 천편일률적 관행과는 다르더군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게 이슬람 율법의 정신을 꼭 반영하는 취지도 아니라는 게 더 놀랍습니다. 오히려 성공적인 투자 은행의 활동을 위해선 이슬람 색채를 애써 내세우지 않으려 한다는 건데요. 특정 종교의 원리주의 명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별 프로젝트에서 채권-채무자 간의 협업이 더 강조되기 위함임을, 그들은 외부에 표명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1970년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파키스탄의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은, 무리하게 "무이자 계정 전환"을 통해 금융기관의 샤리아식 통제를 강요함으로써, 그나마 잘 돌아가던 경제를 경색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자 없는 은행"이란 착상은, 물론 종교적 명분의 도움을 거부하진 않지만, 종교색을 벗을 때 더 높은 실용성을 갖추게 된다는 겁니다.

 

저자의 통찰은 인류 문명사 3000년에 두루 미치고 있어서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합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대도시에서, 고리대 때문에 저소득층은 지속적으로 노예 계급의 창출원 노릇을 했고(디폴트 시 노예로 떨어짐), 이 때문에 인간 이하의 처지로 떨어져 심각한 사회 부조리의 근원을 만들거나, 반대로 노예 상태에서 탈출, 외부에서 힘을 키워 무력 침입, 문명 파괴를 통해 오히려 신 지배계급으로 대두하기도 하는 악순환이 이뤄졌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 어지러운 문명사의 흥망 부침에, 가혹한 이자 수취 제도가 원인으로 기능했기에, 율법이 이를 금지했을 뿐 그 반대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신약성서에도 나오는 예수의 일갈, "너희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더러운 돈놀이를 하느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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