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깊은 떨림 -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세계 명시 100
강주헌 엮음, 최용대 그림 / 나무생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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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에 읽는 시는, 그 읽은 이의 영혼 과육을 살찌우는 태양빛과도 같습니다. 식물이 단지 빛을 주 원료로 하여 광합성이란 기적을 날마다 일궈 내듯, 시는 아마도 들인 수고 없이 나의 내면에서 환희와 재생의 에너지를 거저 빚어 내게 하는 유일한 원천이 아닐지요.

 

책은 세계의 명시 중 우리의 가슴을 때로는 이글거리는 정열로 불태우고, 때로는 번잡한 오뇌로 공연히 달구어진 마음에 시원한 단비로 내려 청량감을 선사해 주는 주옥 같은 작품들로 꾸려져 있습니다. 그 첫째 편은, 당연히도 주제가 "사랑"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지 않고, 그 반대로 신이 우리 안에 있게 하라는 게, 칼릴 지브란의 상냥하면서도 영감 어린 조언입니다. 사랑을 밖에서 찾지 않고, 우리 내면에 마련된 넉넉한 가능성에서 찾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신, 절대 선, 평화, 안식, 그리고 불멸에 다다르는 첫걸음임을, 시인은 우리에게 다독여 주며 이릅니다. 내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면, 사랑은 자연스럽게 나를 바른 사랑으로 이끌러 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 때문에 밤낮으로 뒤척이고 마음을 베이고 아파할 수 있길 기도할 줄 알아야, 그 사람이 사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이런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아픔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사랑을 이용하려고만 드는 이기적인 영혼은 아닙니까.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이미 진정한 사랑이 뭔지 아는 시심이, 이제 다만 자신이 빠진 사랑의 깊이와 폭이 어느 지경인지만을 짧고도 강렬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에 자리를 비워 주기 위해 그(녀)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소소한 기쁨을 다 잊었습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 성인들에 대해 오래 품어 온 외경과 숭배도 한켠으로 밀어버렸습니다. 오롯이 내 사랑을 마음에 채우고 피워 내려면, 바로 그 사랑 외에 다른 감정과 가치가 파고 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시 <If thou must love me>는, 1996년작 영화 <에비타>에 오리지널 스코어로 삽입된 어느 아리아의 창작에 강력한 영향을 준 유명한 작품이죠. 브라우닝은 "다정한 어조, 호감가는 눈빛, 따스한 피부의 감촉" 따위 때문에, 혹은 그 모든 것이 빚어낸 추억 때문에 누굴 사랑하지는 말라고 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사랑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라나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을 위해 행하는 사랑만이, 세월이 부과하는 시련이나 나 자신이 변덕스레 사악하게 부려대는 감정의 침식으로부터 굳건히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풍스런 제목 <O mistress mine>을 달고 있는 젊고 발랄하며 직정적 언사로 가득한 짧은 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입니다. "내일 우리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오늘의 기쁨을 내일로 미루"냐면서, 우리의 이 타오르는 감정에 망설임 없이 정직하자는 게 젊은 그의 제안입니다. 젊은 날은 길지 않고, 신이 그토록 짧은 젊음만 인간에게 허락한 이치가 무엇이겠냐는 거죠. 유전하는 만물이 무상하고도 무상한 법칙에 자신을 맥없이 맡기는 그 모습이 서럽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청춘을 남김 없이 사르면서 사멸해 가는 아름다움을 찰나에서 영원으로 잡아내자는 뜻이겠습니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 서로 같고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pp.37~38에 실린 작자 미상의 시(잠언?)는, 지금껏 두 애틋한 추상과 애타는 구상 사이에서 방황해 온 우리 모두의 공감을 자아낼 만한 모든 정의와 해명을 베풀고 있습니다. "우정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미소(일 뿐이지만), 사랑은 그 마음까지 파고드는 손길"이라고 하며, "따라서 우정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사랑은 사랑 만으로 겨울의 냉기와 죽음의 마수를 떨칠 수 있는 위대한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우정 다음 단계인 사랑을, 설령 설익은 풋사과의 맛으로라도 체험해 본 후에야 온전한 어른이 되고, 나아가 지상에 약한 두 발을 한번 디뎌나 보고 스러진 보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He wishes for the cloth of Heaven>은 예이츠의 작품입니다. 강주헌 선생은 이걸 "하늘에 수놓은 천이 있다면"으로 번역했는데, 여태 감이 잘 오던 의미, 심상이 아주 뚜렷해지는 느낌입니다. "나에게 그런 천이 있다면, 이는 내 꿈이오니, 가난한 내가 당신을 위해 당신 발 밑에 깔아드릴 융단이라곤 이 내 꿈밖에 없습니다" 조금 풀어서 쓰자면 이 정도입니다. 결국 cloth of heaven은 시인으로서 자신이 가꿔 온 모든 꿈과 희망, 이상, 낭만 같은 것입니다. 그걸 사랑하는 이 발 밑에 드리워서 밟고 지나가게 하겠다는 거죠. 다소 피학적, 원망적 어조로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는 소월의 시적 화자와는, 뭔가 기사도적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요.

 

그럼 뭐 이런 사랑에 비해, 우정이란 영 쓸데없는 하급의 모조품이기라도 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포의 영원한 라이벌 롱펠로는, "내가 시위에서 당겨 쏘았으나 내 눈이 그 자취를 미처 좇지 못해(p52)" 잃어버린 화살이, 이제 보니 내 친구의 마음 속에 머무르고 있더라고 합니다. 우정이란 이처럼, 무심히 편안히 교류하고 공감할 수 있고, 애써 단장을 하지 않은 채로도 환대할 수 있고, 뜬금없는 방문이 무례가 아니며, 생각없이 내뱉어도 오해가 생기지 않는 오랜 거실의 안온한 대화와도 같습니다.

 

깊고 깊은 규중에서 험한 바깥 세상의 폭풍을 묘파하고 순치할 줄 알았던 에밀리 브론테는, 오히려 우정을 사랑보다 한 수 위로 놓습니다. 요란스레 치장하고 번잡한 빛깔로 눈을 현혹하지만 12월의 삭풍이 채 오기도 전 맥없이 스러지는 들장미가 "사랑"이라면, 정원을 가꾸는 이 곁에 언제나 있어 줄 줄 아는 진득한 호랑가시나무의 넉넉한 심성에서, 우리는 우정이란 녀석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녀다운 진단이자 고백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의 아쉬움과 가능성을 노래했다면, 로버트 서비스(영국의 역사학자와는 동명이인입니다)은 "외로운 길(The lone trail)"의 고독한 의로움을 말합니다. 어떤 길은 남들이 가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정당함을 갖추고, 사악한 자들의 간교한 발걸음을 겪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를 빛낸다고 합니다. 좁은 문, 외로운 길은 처음에야 일개 희미한 자취로만 눈에 띄다, 어느 새 뜻을 같이하는 밝은 눈의 주목을 받고, 그 빛이 모이고 뜻이 한 갈래로 만나 거대하고 뚜렷한 대로를 이룹니다. 큰 길에는 문이 없다고 했던가요. "좇아야 할 가치가 있고 구해야 할 정의가 있기에" 오늘도 서쪽 하늘은 어제처럼 환히 물들고, 전장에서 스러져 간 불요불굴의 용사들은 "결코 투쟁이 헛되지 않음"을 먼 땅에서 증언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와 향토에 대한 애정, 나아가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영원한 충성까지, 잘 엮인 명시 모음 한 권에서 가장 순일한 이데아의 형태로 만날 수 있었던 그 체험이 너무도 고맙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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