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정승구 지음 / 아카넷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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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자 정승구 감독님 세대에게는 쿠바라는 나라가 여러 의미로, 그것도 강렬하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영원한 투사의 아이콘 체 게바라가 친구 피델을 도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바로 그 본고장이고, 그 세대가 어려서부터 열광하며 보고 자란 야구라는 스포츠에 무지막지하게 강한 나라이기도 한 나라가 쿠바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체 게바라라는, 너무도 멋지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다 간 불멸의 게릴라, 투사에 대해선, 386 세대가 탐독하던 소위 불온서적에서나 만날 수 있었을 뿐 한국에선 한동안 잊혀졌다가, 15년 전쯤 어느 평전의 히트와 함께 전혀 다른 세대를 중심으로 열기가 리바이벌되었죠. 종주국 미국을 제껴두고 세계 최강의 국대 실력이라는 전설만 자자했던 쿠바 야구팀에 대한 동경, 이미지도, 특정 세대가 아니고선 설사 야구팬이라고 해도 공유하는 자산이 아닙니다. 이렇듯 한국의 특정 세대에게는, 쿠바라는 나라가 정말 각별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요.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금단의 땅이었고, 소련, 중국도 참여한 1988 서울 올림픽에조차 불참한 골수 친북 국가인 쿠바를, 실제로 방문하여 두 눈으로 보고 "호흡"하는 건 소수에게만 허여된 특권이었을 겁니다.



혹시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잠시 설명하자면, 정승구 감독님은 야구 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이십니다^^ 영화감독님이 쓴 책답게 이 책은 그가 순간에 포착한 여러 아름다운 이미지(사진 컷)로 가득 차 있고, 쿠바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근사한 건물(알고 보면 역사  속에서 그들 나름대로 치욕적인 기억이 배었거나, 반대로 자부심이 담긴)들에 대한 예술가적 논평이 빠짐없이 지면을 채우며, 정 감독님과 함께 이 책의 공동 주연인 쿠바의 청춘 커플, 페페와 다리아나는 내내 그를 "디렉또르"라 부르고 있죠.(야구 감독은 영어로 "매니저"입니다)



페페는 정 감독님이 쿠바에 머문 숙소 호텔 여주인 "씨뇨라" 마그다의 아들입니다. 성년이지만 아직도 정신연령이 열 살 정도라며 어머니의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하지만 페페 본인은 "내가 본래 스마트하다니까요!"를 입에 달고 살며 아무 근심 없이, 잘생긴 외모(물라토로서 양친의 좋은 점만 물려받았다고 하네요)에 어울리는 쾌활한 매너로 정 감독님과 거리낌 없는 소통을 이어갑니다. 페페에게는 잘 어울리는 여친이 있는데, 이름이 다리아나인 그녀는 본디 발레리나가 꿈이었으나 교통 사고 이후 감을 잃고 평범한(그러나 여전히 꽤나 미인인) 여성으로서, 이것저것 돈되는 알바를 하며(정 감독은 내내 그 내막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 저 나이에 자기 수입만으로 저런 사치를...?) 젊은 여성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정 감독의 소신은 이렇습니다. "한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그 나라의 젊은이들과 먼저 접촉하고 소통하라." 학자니 관료니 지식인이니 하는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잔영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듣고 알고 싶은 것만 입에 담고 전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꾸밈이 없고, 자신의 나라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누구보다 발달한 감각으로 예리하게 꿰기 마련입니다. 우연한 만남과 인연일 뿐이었지만, 페페와 다리아나는 정 감독 같은 이에게 최적 최상의 가이드가 된 셈입니다.

쿠바는 지난 냉전 시기 동과 서가 가장 첨예한 대립상을 보이며 충돌한 전선이었을 뿐 아니라, 풍요한 북과 빈곤한 남이 교차, 공존하는 상징과도 같았고, 심지어 흑과 백이 뒤섞여 구 식민시대의 모순과 폐단을 그대로 노출하는 적나라한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역사를 지닌 쿠바가, 그 국토 곳곳에 소위 절충주의(eclecticism)의 반영물을 간직하고 있는 모습은 인과의 필연이라 하겠습니다. 정 감독님처럼 예술에 대해 민감한 안목을 지닌 분에게는 무엇보다 이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을 터입니다.



시가 하면 쿠바산이 예나 지금이나 최고로 꼽히죠. 처칠을 찍은 사진 중에 시가를 물고 기관총을 점검하는 포즈를 담은 게 있는데, 처칠의 반대 진영(나치 독일)은 이를 악용해서(특히 선전선동의 대가 괴벨스) 대중 조작에 큰 효과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가 하면 처칠이 (긍정이건 부정이건) 퍼뜩 연상되는 건 아주 자연스럽죠. 이 처칠이 실제 쿠바에 와서, 미-서 전쟁 당시 관전 무관(당시엔 이런 제도가 있었죠) 신분이었다는 건 저로선 처음 안 사실이었습니다. 처칠 이후 기라성 같은 정치인, 연예 스타가 묵고 간 유서 깊은 호텔은, 본의 아니게 세계사 격변의 중심이 된 이 나라의 굴곡 많은 역사를 혼자 몸으로 대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주 늦은 시점까지 노예 제도가 엄존하여 흑과 백이 극심한 분열, 대립상을 보였던 나라가 쿠바입니다. 카스트로의 혁명 후 이런 폐습은 일소되었으나, 그 동생 라울이 집권하며 제한적 개방 정책을 펴고, 관광 산업이 외화 획득원으로 자리하면서, 관광업 부대 서비스직이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큰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자리로 떠올랐습니다. 흑인이나 혼혈보다, 관광객들은 백인 종업원을 선호하기에, 이제 이 나라에는 다시, 생각지도 않았던 섹터에서 불길한 인종차별주의의 망령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세대 간 갈등, 혹은 세대 내 갈등의 새로운 근본 원인도 여기서 비롯하는 기운이 뚜렷하구요.



쿠바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은 건, 역설적으로 이곳이 진정 천국과도 같은 기후와 자연 경관의 혜택을 받은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제국주의가 패퇴하고 난 후엔 미국 마피아들이 이 나라를 자기 뒷마당 텃밭처럼 가꾸며 알토란 같은 수익을 챙겼는데, 마피아 본진의 고향이 시칠리아이며, 그 섬 역시 아름다운 기후와 풍요로운 물산 때문에 숱한 외침의 표적이 되었다는 역사를 생각하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습니다(책엔 그런 말이 없긴 하지만 말이죠).

저는 예전 세계 배구 선수권 대회(지금 하는 월드리그 말고요 그 훨씬 전)에서, 쿠바 선수들이 경기를 하다 감정이 격해져서 상대 소련 선수들과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걸 본 적 있습니다. 더운 지방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다혈질 아닐까 생각하기 쉬운데, 정 감독님 보기로는 지극히 평화주의적인 성격들이랍니다. 저자의 표현으론 "한번 세상을 뒤엎은 경험이 있는 이들 특유의 초연함"이라나요. 모든 게 평등하고, 아프면 국가에서 병이 나을 때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인간으로서 기본 생존 조건이 보장된 이 나라의 현실은,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치료비를 댈 능력이 없을 때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미국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진부한 선전이 아니라, 정말 여러 모로 "천국"을 연상케하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경제 봉쇄와 소련 붕괴 후 큰 시련을 겪은 쿠바인들은, 이제 빗장을 풀고 다시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와 교류를 트려는 모험에 나서려 합니다. 완벽한 국가 후원 체계가 자리한 사회에서라면, 사실 부모도 "세상이 무서운 곳"이라며 세뇨라 마그다처럼 자식 페페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역사가 자신들에게 새로 부여한 시련에 맞서 "레솔베르"의 정신으로 그 도도한 파고를  직시, 감연히 응전해 나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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