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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피그 - 로마의 명탐정 팔코 1 ㅣ 밀리언셀러 클럽 22
린지 데이비스 지음, 정회성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최영 장군이 남기신 말 중에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게 있습니다. 저 말의 "황금"을 "백은"으로 바꿔도 그 타당성이나 깊은 교훈성에 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고대 로마가 변방 경영, 특히 브리타니아 같은 기후도 나쁘고 원주민의 기질도 고약한 땅을 왜 그토록 공을 들여 관리했냐면, 바로 각종 광물이 풍성히 매장되어 있는 고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황금이나 백은 따위를 돌 같이 무심히 보지 않고, 제국 경영의 기초로 삼기 위해, 노예들을 시켜 광석을 캐어 제련한 후 그 결과물을 알토란 같은 덩이(이걸 ingot이라 하며, 이 책에서 번역 없이 "잉곳"이란 음사 형태로 내내 노출되어 있습니다)로 농축시킨 그들. 다만 잉곳을 말끔히 다듬어 본토 로마로 이송해야 할 공직자, 장군들은 그야말로 최영 장군(그들의 시대로부터 1400년 후대 지구 반대편에서 활약한 사람입니다만)의 정신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몸에 배게 한 재목들이라야 했습니다. 아니라면 이거 국가 체제 근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로마 멸망의 원인에 대해 납 중독이다 기후변화다 게르만 족의 외침이다 말도 많지만, 가장 근원적 사유를 꼽으라면 고위 공직자, 사회 지도층의 부정 부패지 딴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 잉곳(ingot)은 자기가 있을 곳에 있어야 그게 정상입니다. 이걸로 국가는 금화, 은화를 주조해서 "시민 여러분 제국 신민 여러분! 그리고 로마의 통치 영역 밖에 있는, 어제 기나긴 핵 협상을 타개하고 30여년 만에 세계와 다시 교류의 문을 연 페르시아 국민 여러분! 로마가 보증하는 이 순도 높은 리걸 텐더로 마음 놓고 물품 거래를 하세요! 불편하게 물물 거래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함량을 믿을 수 없는 다른 나라 불량 동전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저희 제국의 주화는 외국인도 무조건 믿고 쓰는 겁니다!"라고 장담하는 게 가능하죠. 근데 이 잉곳을 뒷구멍으로 슬슬 빼돌리는 못된 공무원, 썩은 장사꾼들이 있다? 그럼 대원군 말년처럼 국가는 부도 수표를 남발하다 기둥 뿌리가 썩어가면서, 서까래 아래 태평스레 살고 있던 국민을 모두 깔아죽이며 붕괴하고 마는 거죠. 외세의 침략은 차라리 부차적 요인입니다.
연산군이 재위할 때 조선은 아직 싱싱하고 건실하게 체제가 돌아가던 효율적이고 젊은 국가였습니다. 마르쿠스 디디우스 팔코가 살던, 그리고 이 패기만만한 공화주의자(거의 반체제 분자처럼 위험한)의 가치를 알아본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림하던 시기 로마도, 네로 같은 광인을 권좌에서 막 몰아낸 소동을 겪었을망정 아직 모든 면에서 잘 돌아가는 젊은 국가였습니다. 그러니까 팔코 같은 젊은이가 타락한 세태에 찌들지 않고 이처럼 건전한 사회관을 유지할 수 있는 거죠(단 팔코는 물론 가공의 인물입니다).
팔코는 로마의 명탐정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1권에서 제가 본 팔코는 그러나 명탐정이라기보다는, 명탐정이 될 재목에 가까운 미완의 대기입니다. 그는 1) 일단 너무 자주 얻어터지고 실수를 저지르며, 죽음의 위기에 세 차례나 몰립니다. 일부는 오판 때문에, 일부는 의욕이 지나치게 앞서서였습니다. 그렇게 얻어 맞고 코가 내려앉고 갈비뼈가 부러지면서도 회복이 빠르고, 외려 끓어오르는 복수욕까지 장착한 채 더 강인한 정신으로 거듭나는 건, 그가 아직 스물 아홉(이 소설에서 서른 번째 생일을 맞습니다)이란 젊은 나이의 사내이기 때문입니다.
2) 그는 명탐정이 되기에 지나치게 잘생겼습니다. 마르쿠스 디디우스 팔코 본인 입으로 떠들질 않아 그렇지, 주위 여성들은 한결같이 그를 "잘생긴 녀석"으로 일단 인식하는 그런 행운아형 타입입니다. 이게 명탐정 노릇하는 데 방해가 되는가 아님 그 반대인가. 최소한 몰래 잠입하고 다니면서 정보를 캐야 하는 그로서는 누군가의 주목을 강렬하게 받는다는 게 방해면 방해지, 자연스럽게 환경 속에 녹아드는 강점으로 활용하긴 힘든 것 같습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하듯 "난 훌륭한 정보원이 아니다."가 맞는 말이며, 그러기에 방세도 제때 못 내고 주인 등쌀에 시달리며 도망 다니다 걸려 가끔 난폭한 채권 추심단(그냥 깡패들) 때문에 몰매도 맞는 겁니다.
3) 그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어떤 때는 반대로 터무니없이 냉혈한 같은 "추리"를 내세워, 범인으로 결코 몰 수 없는 이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독자로서 책을 읽어나가다가 "아니 이 자식이 지금 제정신임?"하고 벙찌기도 했는데, 이게 다 아직 팔코가 경험이 덜 쌓인 형편이라 그렇습니다.
소설 마지막에 팔코를 위협하는 범인은 OOO를 하며 "이게 팔코 네놈의 약점이지!"를 내뱉으며 비열한 시도를 하지만, 팔코는 지지않고 "아니, 오히려 강점인걸!"로 맞받습니다. 저 위에 제가 적은 팔코의 단점들은, 사실 그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이들과 여자들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선량한 남성이며, 무능할망정 한번 정의감이 발동하면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는 무모한 헌신(거의 불구자가 될 뻔한)을 하고도 후회가 없는 진짜 사나이죠. 그가 황제의 군림기에 시대착오적 공화주의자로 남은 것도, 저 최영장군처럼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는" 청렴함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때 안 묻은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한국어 번역판은 400여페이지의 두꺼운 볼륨인데, 언제 다 읽었을지 모를 만큼 재미있고 스케일도 큰 모험담, 그리고 미스테리가 펼쳐집니다. 미스테리의 공식에 잘 맞게 곳곳에 독자를 위한 단서가 숨겨져 있으며,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그게 바로 복선이니 주의를 느슨히하지 말길 바랍니다. 작가는 꽤 유머러스하고, 우스꽝스럽거나 좀 장난이 심한 서술 트릭을 많이 쓰는 편이니 독자는 해당 대목에서 괜히 발을 헛디딘 채 넘어지지 않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