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중 등장인물 미란다의 한 대사에서 따온 이 유명한 제목은, 요정계에서 더 근사하고 더 도덕적으로 완결된 세상을 접해 왔을 그녀 입장에서 내뱉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감정 표시입니다. new할지언정, 뭐가 brave하다는 걸까요? 이 소담출판사 판의 번역자 안정효 선생은, 저 영단어 brave의 뜻에 대해, 각주로 부연하고도 있습니다만, 아무리 비천하고 한심한 모럴을 지녔으며 질서 전반을 위협하는 "불안정성" 요소가 상주하고 있어도, 감정을 지닌 필멸의 존재들이 아둥바둥하면서 엮어가는 이 인간 세상만큼, 위대하고 멋진 세상도 다시 없다는 취지의, 더 우월한 존재로부터 나온 찬탄이기에, 이 대사가 그토록 명대사로 평가받는 것이겠습니다.
마법사 프로스페로의 착하고 아름다운 딸 미란다는 그 위대한 희극 속에서, 자신의 눈 앞에 희망적인 양상으로 가득 펼쳐진 미래를 두고 저 감탄사를 터뜨리지만, 20세기에 다다라 물질 문명 발달의 불길한 양상만을 지켜 보고 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창조해 낸 A. 헉슬리는, "우리가 목도하는 이 현상이야말로 진정 멋진 신세계로구나!" "미란다 눈에 그토록 아름답게 비친 누리를 어쩌다가 우리들이 이토록 망쳐 놓았던가!" 같은 소회로부터 저런 작명을 했을 법합니다.
작중 "야만인 선생"은 이런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여, 두 번에 걸쳐 멋진 신세계란 표현을 토해 놓습니다. 한 번은 야만인 유보 구역(reservation)으로부터 인간 세상에 막 귀환했을 때, 다른 한 번은 이 문명 세상에서 이방인인 자신이나 원 주인인 소위 "현대인"들에게나 아무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고 비탄에 젖을 때입니다.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원작 <템페스트>에서도 혹여 우리 미란다에게, 아버지의 본향 인간계(그녀 자신은 한 번도 접하지 못한)로 귀환한 후, 어떤 총체적이고 불가역적인 환멸, 각성이 이후 그녀를 덮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멋진 신세계>는 "다시 찾아 본 템페스트"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이 안정효 선생 번역본은, 기존 텍스트들과 많은 차별점을 보입니다. 원작부터 사실 아주 가독성 좋게 독자를 흡입하는 구조는 아닙니다. 이 작품은 비범한 두뇌와 초인적 통찰력을 지녔던 최고 지성인의 음울한 예언적 계시가 문학의 몸을 빌린 것이니만치, (이미 당대에도 유행했던) 소프트 SF장르의 접근용이성을 현대 독자들이 기대해선 곤란하겠습니다. 내용이 워낙 기발하고 소름끼치는 영감을 제시해서, 준비 안 된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는 것 뿐이지, 본래부터가 술술 읽히는 포맷은 전혀 아닙니다.
안정효 선생은 최대한 많은 어휘와 표현들을 두고, 우리 말로 읽어서 의미가 바로 와닿게 텍스트상 세심한 손질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타 번역본에서 다른 분이 그저 '"오르지, 포지"라고 원문을 노출했던 걸, 이 책에서는 "흥겹고도 흥겹구나"라고 고쳐 놓고 있습니다. "새비지"를 "야만인"이라고 일일이 의역하는 점도 이런 태도와 궤를 같이합니다. 이는 번역가로서 그가 일관되게 유지해 온 원칙의 실천이기도 하겠습니다.
소설은 "포드님", "포드 기원" 같은 지극히 냉소적인 어구에서 알 수 있듯, 효율성과 정연한 질서야말로 문명화한 인간이 추구,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린 비극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합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존재지만, 불멸의 영혼보다 더 아름답고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 홀딱 반한 미란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극한의 합리성이 지배, 통제하는 세상에서 인간 고유의 장점을 모두 잃어버린 비극을 목도한 채, 절망 속에 울부짖는 "야만인 선생"을 통해 헉슬리는 셰익스피어가 시작한 희망의 노래를 이제 자신의 손을 통해 처절한 만가로 바꿔 놓겠다며 지옥 아닌 지옥을 펼쳐 놓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냉철하고 침착한 영국인에 비해, 아일랜드인이니 스페인인이니 하는 부류들은 "피 속에 알콜 함량이 높아 어리석고 감정적"이라는 식의 평가, 통념이 있었습니다. 엄격한 통제와 인위적 조절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제 분수에 충실하여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고유 기능만 수행하게 하는 시스템은, 이처럼 시끄럽고 불안정한 사회보다 오히려 발전한 면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최하 등급의 구성원 역시, 자신들만의 거리낌없는 쾌락의 시간이 주어져 고된 노동의 기억을 잊을 수 있으니, 비록 존엄이 뿌리채 박탈되었을망정 본인들은 전혀 인식을 못한 채 행복할 뿐 오히려 현대의 노동계급보다 나은 처지 아니겠습니까? 위도 아래도 다 만족이며, 기초적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일절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그 누리는 효용도 훨씬 높은 수준이니, "멋진 신세계"가 맞긴 합니다. 보카노프스키 그룹에 편성되어도 좋으니 당장 그리 보내달라는 이들이, 지금 우리 중에도 없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가장 흉칙하고 야만적으로 들리는 세상, 누구나 다 무부, 무모의 존재로 세상에 던져져 지극히 합리적인 시스템 아래서 부속품처럼 소모되다 세상을 마치는 모습, 괴로울 것도 없고 일견 완벽한 감각적 만족, 흠 없는 자기기만이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얹혀 돌아가는 인생이지만, 이게 사람 사는 양상이 결코 아님은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야만인 선생은 이런 더럽고 구원 못 받을 타락한 세상에 잠시나마 몸 담고 더렵혀진 영혼를 씻어내려는 뜻에서, 중세의 편타 고행자처럼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데, 현대인들에게는 이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서커스 관람 이상이 아닙니다. 이 소설은 여러 대목에서 수위 높은 성적 묘사를 시도하고도 있는데, 그게 오늘날 일부 엔터테인먼트 문학에서 꾀하는 의도와는 아무 관계 없는, 오히려 은밀한 쾌감을 기대하는 독자를 꾸짖으려는 계산이었음을 안다면, 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요. 이 소설을 읽고도 남 이야긴 줄로만 아는 우리들이야말로 "소마 1그램"에 취해 고귀한 존재의 본분을 망각한 "멋진 신세계"의 멍청이들에 다름 아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