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님께 따님이 있어서, 생전에 부친의 많은 기대를 모으고 듬뿍 사랑을 받았다가, 투병 중 별세하셨다는, 소위 "참척"의 아픔을 보셨다는 안타까운 사연은 이미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당신의 저작을 통해선 좀처럼 이 말을 잘 안 꺼내시다가, 비교적 최근에 낸 책 중에서 간간히 따님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그 예입니다.
박사님이 워낙에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사요 석학이시다 보니, 사실 그 전후 경위에 대해선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나, 당신의 입으로 직접 그 아픈 마음을 표현하시는 건 극히 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번 이 책이. 온전히 그 화제에만 집중하여 한 권으로 엮여져 나왔네요. 박사님의 책은 어떤 주제와 의도 하에 쓰여진 것이라도, 최소 그 아름다운 문장 하나만으로도 탐독의 가치가 있지만, 박사님의 인간적 면모까지를 존경해 온 독자로선, 따님에 대한 그 간곡한 소회가 담겨 있을 이 책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굿나잇 키스"는 다음 날 아침을 기약하는 달콤한 다짐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잠에서 깨어날 수 없는 이에 대한 비통한 고별의 의식이기도 합니다. 선생의 이 책 제목은 그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다 여겨집니다. 육신을 가지고 호흡, 생동하던 이승에서의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고했지만, 영혼으로서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그 매듭을 결코 풀지 않은 채, 구천과 예토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녀 지간의 애틋한 정을 이어갈 테니 말입니다.
선생 연배의 어르신들이 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을 맑은 흙과 상쾌한 공기가 뿜던 그 정기를 흡수하며 시골에서 자란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설사 자신이 도회에서의 세속적 성취, 즉 "출세"에 성공했어도, 자신의 아들딸들에게 결코 도시의 콘크리트가 내뿜는 독기에 그 혼이 압사되지 않길 기원합니다. 선생님 역시, 장항선편 그 낡은 삼등 열차간에서 지극히 서민적인 메뉴인 삶은 계란을 사먹이며, 금지옥엽이신 따님에게 "인생의 본맛"이 무엇인지 프루스트 효과를 통해 가르치려 했습니다.
선생은 결혼을 하신 후에도 문인 특유의 무책임한(?) 삶을 그대로 이어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던 분이, 딸을 슬하에 보고서야 그 고고히 천상을 향하던 눈을 내리고, 땅만 쳐다보며 일상에 집착하는 "속물(본인의 표현)"이 되셨다는군요. 사실 선생은 워낙 젊은 시절부터 문명을 날린 스타였기 때문에, 세들어 살던 시절에도 집주인이 알아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자신을 두고 그는 스스로 메롭스란 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 알듯 박사님의 따님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 미국 현지에서 법조인으로 활약하기도 한 분입니다. 박사님이 문화부 (초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 따님은 미국 내 흑인 폭동과 관련, 특정인(들)의 변호인으로 선임되어, 현직 관료로서 재외국민의 고충 해결 사무에 잠시 관여하던 부친과 조우하게 됩니다. 이 사건 관련, 박사님은 자세한 사연을 적어 두고 계신데,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참고할 만한 자료도 되겠습니다. 물론 이 대목 회고는 저자 이어령 박사님 입장에서야 돌아가신 따님에 대한 애끊는 부정이 그 저술 동기겠지만서도요.
책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1부가, 이런 식의 절절한 사연의 행렬이라면, 2부는 다소 뜻밖에도 박사님이 직접 지으신 여러 시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박사님 솜씨라 그 완성도야 뭐라 말을 꺼내는 게 무엄할 뿐이고... 3부는 영애 이민아 변호사의 서신, 인터뷰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열림원에서 낸 모든 책이 다 그렇듯 이 책도 디자인과 장정이 참 예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