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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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누미디아 왕국에서 포로로 끌려 온 섭정왕 유구르타가 말하는 내용 중 이런 게 있습니다. "대체 왜, 로마인들은 저처럼 강한가?"

 

누군가의 지속적인 보호 하에 놓이는 신세란, 따지고 보면 "노예 상태"를 바꾸어 부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중해 건너 누미디아는 로마의 피보호국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내정을 스스로 살피지 못하며, 로마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받는 채로, 자신들의 왕을 세우고 내리는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누미디아는 약하고, 로마는 강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대를 이어 명예로운 귀족 가문의 지위를 유지 못 한 시민은, 자신의 대에 설사 큰 업적을 쌓았다 해도, 다른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 했습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장군은 특히 군사 부문에서 남다른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누대의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집정관 등 고위 관직에 당선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에게는, 특정 명망가의 피보호민 출신이라는 누명마저 따라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명백한 독립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구르타의 누미디아는 위신에 크게 상처를 입은 채 섭정이 적국에 볼모로 잡혀 와야 했습니다. 이제 몇 년 후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격에 걸맞은 직책을 따 내지 못한 마리우스는, 이름 없는 퇴물로 원로원 말석이나 지키다 한 줌 재로 화할 운명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유구르타와 마리우스는 공교롭게도 젊은 시절 친한 교분을 쌓은 바 있습니다. 두 청년이 가지지 못한 바를 모두 지니고 있었고, 대신 두 청년이 넉넉히 향유한 바를 전혀 지니지 못했던 "똥돼지" 메텔루스 카이길리우스 역시, 이 두 청년과 같은 또래였죠. 두 청년에게 오물 범벅인 돼지우리에 처박히는 모욕적 경험을 한 후, 이 명문가 자제는 이후 수십 년이 이어질 큰 원한을 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앞으로 자기 재능과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일일이 장벽에 가로막히는 건, 메텔루스가 실질적으로 훼방을 놓은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십 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인생이 풀리지 않은 이유를 잘 압니다. 특정 개인과의 악연이 그 원인이 아니라, 로마라는 사회 체제, 혹은 국가 단위가, 안에서, 혹은 밖에서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그들의 그런 불운이 초래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제거되어도 또 하나의 실력자가 출현, 적의 도전을 막아내는 로마 공화정의 시스템을 유구르타 같은 전제 왕정의 총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는 한번 군주가 무너지면 나라 자체의 운명이 끝이었기 때문이죠. 왕을 제외한 나머지 신민 모두가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노예처럼 굴다 일생을 마치는 체제 바로 그 모순이, 자신의 나라가 약하고 적국이 강한 비결이었음을, 어쩌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마리우스는, 가문의 후광, 그리고 선명한 로마인의 혈통 외, 모든 것을 소유한 멋진 남자였음에도 불구, 바로 그 결격 사유 때문에 일인자 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전성기를 의미 없이 보내는, 참으로 처량한 처지입니다. 그 역시, "강하고 효율적인 로마 공화정"의 탄탄한 저력 때문에, 개인의 야망을 실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정을 다 아는 처지의 그가, 공화정을 전복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반역이나 배덕은, 마리우스 같은 인격자에게 차라리 죽음만도 못한 치욕이기 때문이죠.

 

앙앙불락하는 두 남자 외에, 술라라는 귀족 청년, 흠잡을 데 없는 귀족 혈통에 힙입어 마치 남신으로 착각할 만한 완벽한 외모(마리우스의 말입니다)를 지닌 그는, 이 둘보다는 많이 나이가 어립니다. 이 사람은 능력과 가문의 후광은 지녔으나, 경제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처럼, 이 소설의 초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세 남자는, 각각 무엇인가 한 요소가 부족하여 웅비를 못하는 모습으로, 작가는 파악하여 무대에 캐릭터로서 내세워지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 모두가 잘 알듯, 로마 공화정 하면 두 말이 필요 없는 그 대표적 아이콘이,  바로 줄리어스 시저, 혹은 라틴어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란 이름을 지닌 대 영웅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아는 그 카이사르의 할아버지가, 마리우스, 술라라는 양대 거인의 시대에 함께 산, 중요 정치인으로 내세워지고 있습니다. 작가의 독단이나 상상만은 아닌 것이, 실제 역사상 이 老 카이사르는, 마리우스, 술라에게 각각 자신의 두 딸을 주어, 사위로 맞이하고 그들의 저력을 자신의 가문 자산 일부로 삼은 인물입니다. 이런 분명한 실제 행적만으로도,  앞날을 멀리 내다본 통찰력의 소유자로 평가될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우스는 큰 부호에 군사적 실력까지 겸비한 인물이었으나 나이가 많고 가격(家格)이 너무 떨어진다는 흠을, 술라는 나이와 외모, 가문의 품격 모두 적합하나 개인적 평판이 나쁘고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는 흠을, 각각 가졌습니다. 그저그런 속물 귀족이었다면 그저 세평이 편히 용납하는 바를 좇아 살고, 괜한 모험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텝니다.

 

그러나 카이사르 그는 예사 귀족이 아닌, 대(大) 파트리키의 후손이고 일원이었습니다. 현재 가세가 빈한할 뿐, 만약 다소의 재력이 갖춰져 중앙 정계로 들어서면, 로마의 모든 세력가와 귀족들은 그의 외모 자체가 바로 증명하는, 베누스 신의 직계로까지 이어지는 그의 혈통과 존엄에 대해 곧바로 무릎을 꿇고 말 것입니다. 최소한 로마는 이런 데에 아주 약한 면을 가졌으며, 바로 이런 관습이  반대편에선 저 마리우스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거죠.

 

카이사르의 큰딸 율리아는 마리우스를 두고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기까지 한 그분은, 아빠와 너무도 다르면서도 또한 닮은 분이에요."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이처럼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등장인물들도 알고 우리 독자들도 압니다. 율리아의 마음, 진정을 저보다 더 잘 표현한 말도 없다는 걸. 그녀는 같이 즐길 남자보다, 진심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배필로 바라고 있었다는 걸.

 

이 결혼은 누가 봐도 정략결혼이며, 거의 사업상 거래이기까지 합니다. 이상한 건, 그토록 명예와 염치를 중시하는 카이사르 노인이, 태연하게 마리우스 앞에서 금전적 조건을 흥정하듯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마리우스는? 얼핏 들어 큰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는, 노인 측의 노골적 흥정에, 처음엔 불쾌감을 표현했으나, 곧 상대의 진의와 인격 깊이를 가늠하고선, 마치 이런 제의를 기다렸다는 듯 부대 조건을 달거나 수정하지 않고 모든 사항을 응낙합니다. 이 와중에도 "어린 아가씨가 날 싫어한다면? 다른 젊은 연인을 이미 두고 있다면?" 같은 걱정을 품고, 그 경우 어떻게 해서 부녀가 상처 받지 않게 이 혼담을 무마할지 요량부터 하는, 참으로 속 깊은 사내입니다. 율리아의 말을 조금  패러디하면, "가장 전형적, 노골적 정략 결혼인데. 또 전혀 정략결혼이 아닌 결혼"이라고나 하겠습니다.

 

로마 공화정이 얼마나 튼실한 체제였고, 그 성취한 물질 정신 문명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으면, 이런 고아한 인물들이 대거 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메텔루스 똥돼지는 어떻습니까? 이 자야말로, 공화정의 모순과 부패, 속물성  자가 치유 능력 결여를 한 몸으로 대변하는 듯 질이 나쁜 인간입니다. 술라? 곧 나오지만 그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돈 빼고 모든 걸 다 가진 내가, 돈 때문에 주저앉는데서야 말이 되는가. 귀족의 자부심을 야수와 같은 생존욕구, 근성으로 치환시킨 그는, 이제 한 인간이 어디까지 냉혹해질 수 있는지 그 가장 나쁜 예를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정말 기대되지 않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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