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 꽉 막힌 세상, 문사철에서 길을 찾다
최효찬 지음 / 와이즈베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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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이란 말을 쉽게 꺼내고 쓰는 요즘의 우리들입니다. 본래 이 단어는 진지한 개념어로서 고안되었다기보다, 무협지 등에 널리 쓰이던 말버릇 비슷한 투가 정식 어휘로 고정된 편에 속합니다. 그래서 "만만치 않은 정신적 저력" 따위를 의미하는 용례와는 대조적으로, 이 단어에선 아직도 다분히 장난스런 뉘앙스가 풍기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여튼 아무리 가벼운 느낌으로 즐기다 덮는 무협지라 해도, 만약 그 주인공들이 실제 세계에 그 초능력을 지니고 등장이라도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내공"을 장난스럽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TV 토론, 대담 프로그램에서 통상의 출연자들이 보이는 기량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며 저 먼 신세계의 경지로 좌중을 휘어잡는 논객들을 우리는 가끔 봅니다. 이때 이런 분들이 소위 "넘사벽"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비결 중 상당 부분이, 세부 기술적 지식에의 숙련도보다는, 당사자의 인문적 소양에 빚지고 있음은 이미 우리들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동종 체급에서 차원이 달라 보이게 만드는 지적 자산, 정신적 역량은, 거의 전적으로 인문의 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구더러 "책 좀 읽으라"며 쓴소리를 할 때, 그 책이란 것의 영역은 대부분 인문 쪽을 염두에 두고 꺼내는 말입니다. 사람의 품격을 업그레이드하는 가장 손쉬운 지름길은 (비록 "손쉬운", "지름길" 같은 말이 다소 反인문적 냄새를 풍길망정) 인문을 파고 새기며 그 핵심, 정수를 내 것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비교적 단시간 내에, 저 방대한 인문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대단히 답하기,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가장 빨리 질러가는 길임과 동시에, 가장 정도(正道)에 가까운 선택이 무엇이냐는 물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책, 그리고 10년 전 출간되어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는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을 지으신 최효찬 선생님은 이에 대해 1) 깊이 있는 나만의 독서 방법 개발 2) 독서를 마친 후 깊이 사색에 잠기기(내면화) 3) 초서(抄書)하기 등 세 가지 방법론을 동시에 실행할 것을 권장합니다. 1)과 2)는 예로부터 동양의 선현들이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치우치지 말고 고루 비중을 둘 것을 강조해 온 바 있으며, 3)은 근래 들어 여러 독서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테크닉입니다.

 

나만의 독서라 함은 추세에 영합하지 않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독서를 의미합니다. 형식적으로, 읽는 시늉만 하는 독서가 아니라, 저자와 지면을 통한 대화를 나누는 중 독자로서의 자신이 끊김 없이 의식이 깨어 있는 능동적 정신 작용을 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독서 후 사색은 이미 읽은 내용을 정신의 합당한 장소에 요긴히 저장하는 내면화의 작업입니다. 배운 바 없이 생각(자아류)만 많은 사람이 위험하듯, 반대로 자기 것으로 충분히 소화도 하지 못한 채 경박하게 단기 메모리의 지식만 조자룡 헌 창 쓰듯 꺼내 쓰는 사람은 실속이 없고 무능하기 일쑤입니다. 두 가지 노력이 고루 균형을 이뤄야 독서의 보람이 있음은 당연합니다. 초서의 중요성은 의식이 이해한 지식과 정보를 무의식의 밭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게 돌보는 데에 있습니다.

 

이 책은 이런 3단계 방법론을 전제로 하여, 머리말 포함 48가지 꼭지를 통해 인문의 달인이 되는 길을 독자에게 지도하고 있습니다. 48개의 챕터들은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위의 3대 지침에 대해 각론을 유기적으로 형성하고 있어, 매일 한 꼭지씩 읽어 나가도 좋고, 마음이 급한 이라면 한 번에 흡수, 소화하겠다는 각오로 통독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인문의 내공화랄까 독자 자신만의 내면 계발을 위해서는 여러 저자들이 각자의 지론을 흥미롭게 펼치고들 있지만, 저는 이 최효찬 선생의 여러 제언, 그리고 체계 잡힌 실천론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다 읽고 나서 추측해 본 바로는, 그의 저널리스트 경력과 아카데미즘 내공이 조화롭게 잘 융합한 결과가 그 비결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정통 인문 영역에선 사실 1순위로 강조하지는 않는 게 "새로움, 창의성"입니다. 법고창신이란 말이 있듯, 설사 새로움을 운위하더라도 그 기반은 반드시 오래 전부터 이어온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주류의 입장에 가깝죠. 하지만 최효찬 선생님은 "일단 과감하게 틀을 깨어 보라"고 주문합니다. 저는 이처럼, 경제의 실무에서 요구되는 바를 인문에 실천적, 실용적으로 적용한다는 그 절실함을 이해해 주시는 게, 현장을 누비던 저널리스트 전력의 인문학자에게만 가능한 것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사실 진정으로 모든 분야를 꿰뚫는 그윽한 내공의 인문 달인은, 틀에 얽매이지 않고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형 지혜인이 그 이상형이거든요.

 

창의력의 발휘로 실무에서 두루 인정을 받고, 큰 성취를 쌓았다 해도 그 인생이 그것만으로 성공하고 가치 있는 삶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인문의 실용적 쓰임새가 1장에서 설명되었다면, 이제 2장부터는 "당사자의 마음 수련" 등 동양적 인문의 본령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능력보다 인성이라는 명제는, 사실 기술적, 실무 능력보다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고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이 곧 인성 내공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능력은 인성"이라는 말로도 해석됩니다, 1장에서는 또한 "자신의 분야에 빠삭해야만 내공의 기초가 쌓인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바로 미루어 보아, 허울 좋은 말로만 자신의 인성을 포장하는 행태는, 능력도 인성도 모두 결여한 소인배의 특성임을 지적하심도 우리 독자가 추론해 낼 수 있습니다.

 

결국 고전을 공부함은, 국지적 실무 능력의 배양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제너럴리스트, 혹은 능력과 인성의 혼연일체 경지에 오른 달인을 지향하는, 장대한 공부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성이란 물론 혼자 있을 때에도 그 진가가 발휘되지만(소위 "愼其獨也"), 그보다는 나 외에 타인들과의 원만하고 능수능란하며 도덕적인 관계 형성에서 결정적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고전에 그토록 많은 처세 요령의 깨우침이 실려 있는 게, 혼자 있을 때에만 군자 성인으로 노릇한다면 벌써 반쪽짜리 인재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한 소이입니다.

 

인생은 알고 보면 허무합니다. 공자가 중심소욕 불유구를 선언했을 때 벌써 그의 나이 칠십, 성인이 도를 깨우치고도 이미 당대인 평균 수명을 훨씬 나이를 지나쳤을 뿐입니다. 청춘의 시절은 이미 간 데 없이, 얼굴에 미운 주름만 가득 남은 채 온전한 마음의 평안만 얻는 게 무슨 소용일까도 싶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럴수록,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뼛속 깊이 깨당고 성숙해질수록 "반전을 꾀하라"고 충언합니다. 사실 무상한 것에 집착하다 보면 정작 세속의 풍진에 그렇게나 애정을 두면서도 막상 노린 바를 손에 못 넣는 게 보통이죠, 마음을 비운 이가 오히려 작심한 낚시꾼보다 성과가 좋습니다.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건 결국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 후 그 허를 틈타 창의적 반전에 성공한 덕분이요. 그런 세속의 실리를 채운 후엔 다시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찾으라는 것, 그래서 두 배는 더 자란 사람이 되라는 게 저자의 충고입니다. 비우고 채우는 건 부질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가 아니라, 오로지 인문의 공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무한 선순환 피드백이라는 말씀으로 새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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