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음모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존 그리샴의 작품은 언제나 1) 재미있는 이야기의 힘 2) 정의의 승리라는 건전한 주제의식 추구, 이 두 가지 점에서 독자를 흐뭇하게 해 줍니다. "믿고 읽는다"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그의 작품이야말로 그의 이름을 믿고 고른 이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어, 이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베스트셀러작가입니다.

서맨사(Samantha)는 아직 서른을 채 넘기지 않은 여성으로, 두 주(州)에서 변호사 자격 시험에 통과한, 말 그대로 앞날이 촉망되는 재원입니다. 스컬리 & 퍼싱 이라는 미국 유수의 로펌, 업계 제4위에 랭크된 거대 회사에 로스쿨 졸업 후 바로 스카웃된 그녀는, 흠 없는 경력을 관리하며 조만간 어소시에이트로 승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08년 월 스트릿을 강타하며 쟁쟁한 기업들을 연쇄 도산시킨 리먼 쇼크 같은 대형 악재의 파장이, 자신의 앞길에도 짙은 먹구름을 드리울 줄은 아마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그녀일 텝니다.

책 중에도 여러 번 언급되는 "대공황" 같은 건, 그녀의 증조할아버지 정도나 그것도 실업과 궁핍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둔 채 지켜 본 "역사 속의 사건"에 불과했죠. 그런데 이제는, 그녀의 상사 앤디 그룹만이 과장되이 언급하듯, "여기 우리들이 언제 모두 무료 급식소에서 모일 지 모르게 만든" 대재앙의 할퀴는 발톱으로 그녀의 실제 삶에 바짝 다가와 냉풍을 내뿜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해고된 건 아니지만(앤디는 엄청 생색을 내며, 자신의 노력으로 이 지경까지 가는 걸 피할 수 있었다고 떠듭니다), 12개월 무급 인턴으로 회사에서 권고하는 타 조직에서 근무한 후, 상황에 따라 복직할 수 있는 계약직 신분으로 떨어지는 서맨사에게, 간신히 의료 보험 혜택은 남겨진다는 이 조건은 사실상 퇴사 통보만큼이나 큰 굴욕입니다. 자존심 강하고 능력 있는 그녀가 받아들일 만한 오퍼가 못 되죠.


한때 유수의 로펌에서 집요하고 매혹적인 스카웃 제의를 여럿 동시에 받기도 한 그녀지만, 지금은 무료로 장기 봉사하겠다는 인턴 지원도 하루에 열 번을 거절당하는 신세입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똑똑한 그녀로선 나이 서른 즈음에야 처음 겪어 보는 냉대와 무시였겠습니다. 물론 그녀만이 겪는 난리는 아니어서, 로펌에서, 혹은 굴지의 금융 기관에서 일순위로 해고된 젊은 인재들이, 거리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까닭에 초고등 실업자가 구직 시장의 잉여 공간을 가득 채우는 기현상의 와중 흔히 보는 희생자의 한 명이 그녀일 뿐입니다. 여튼 이 뜻밖의 횡액을 계기로, 한 번도 그럴 기회가 없었던 서맨사는 자신의 행운과 사회의 모순, 그리고 자신의 지나온 선택이 과연 진정한 삶의 기쁨과 보람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현명하고 정직한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속 깊은 반성을 가지는 계기로 삼습니다. 작가 존 그리샴이 실제 역사로서의 서브모기지 프라임 파동을 효과적으로 제재화한 노련한 솜씨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대목이기도 하죠.

애팔래치아 산맥 일대는 문학 작품, 그리고 영화 속에서, 무지하고 가난하며 폐쇄적인 사람들이 바깥 세상으로부터의 멸시와 편견을 견뎌 내며, 공고한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사는 모습으로 종종 묘사됩니다. 근친혼, 무모한 원시 생활에의 집착 등 부정적 면모 부각이 주종을 이루지만, 간혹 이 환경적 악조건을 딛고 세상 밖으로 나와 제 앞가림을 하는 데 성공한 소수는, 엄청난 자부심과 카리스마가 결합한 희귀 퍼스낼리티를 앞세워 독자의 이목을 끄는 주인공으로 내세워지기도 합니다. 그리샴의 이 신작에선 도노번 그레이라는 (아직) 젊은 이혼남이 등장하는데, 물론 그는 저런 전형적 애팔래치안으로 세팅되지는 않았고, 똑똑하고 합리적이며 정의감도 넘치는 자상한 지성인이나, 다만 자신의 가족사나 독특한 출신 배경 탓에 가지게 된 다소 비정상적인 집념, 복수심이 정신을 지배하는 유형으로 독자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서맨사는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바쁜 모범생형 삶을 살아온 타입이라 어떤 상처를 받고 그 때문에 엇나간다든가 하진 않았지만, 가정에 불충실하고 부인을 버린 전력이 있는 바람둥이 아버지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는 자상하고 가정적인 남성상을 미래의 배필로 상상해 왔을 법합니다. 배우 지망생과도 잠시 교제를 한 적 있는데, 비전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 인생이었다는 점에서 남자의 돈, 능력은 그닥 보지 않는 편인가 봅니다. 그녀의 부친은, 정말 훤칠한 외모에, 고수익 고위험의 목표만을 끈질지게 물고 늘어지며 살아온 헌터 인생이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가족들에게 자부심도 안겨 주었으나(그 탁월한 능력으로 식구들에 온갖 호사를 제공), 지독히 이기적인 성향, 변호사이면서도 질서와 규범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무법자 스타일로 동시에 근원적 불안감을 심어 준, 애증 교차의 양가형 가장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묘한 종류의 정의감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태생적으로 지닌 반(反)기업 성향을 자기 돈벌이에 활용한, 다소 희귀한 타입의 능력자로, 대기업의 비위와 법률적 실책을 포착하는 데에 초인적 후각을 지니고 있어,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사건을 서민이나 약자, 억울한 희생자 편에서 승소시켜 주는 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상한 방식으로 임꺽정, 조로 플레이를 하는 법정의 의적입니다. 이런 사람이 합법의 경계 안에 얌전히 머물 까닭이 없어, 남편에게 배신당한 처(즉 서맨사의 엄마)가 수집, 적시한 각종 불법 행각이 당국에 제시된 후 그는 졸지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전과자가 되어 버립니다.

서맨사의 인간형은 이처럼, 법의 제약 위에서 놀길 즐기는 프리랜서 아버지와, 유능하나 고지식하고 원칙에 집착하는 공무원 어머니로부터 고루 형질을 물려 받은 구성으로 이뤄졌습니다. 아버지처럼 명예와 위신을 더렵혀가며 부와 스릴, 그리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실현하는 삶은 질색이지만, 공교롭게도 실직자 신분이 되어 커리어 관리를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게 된 후로는, 아빠에게 물려 받은 정의감만(이 과연 맞는지는 의문이지만)은 그 올바른 방식으로 발휘하고 싶은 생각이 더 커졌습니다. "진짜 법률 일"은 지난 3년 동안 정작 맡아보지 못한 채, 따분한 사무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았던 그녀로는, 이번이 오히려 참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입니다. 올바른 사명감과 정의의 회복에 정력을 바치는 모습이 남자답게 여겨지는 도노반 그레이로부터, 그녀는 그간 봉합해 온 상처랄까 제 모습으로 발현되지 못한 자아존중감을 꽃피울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찾을 수 있겠다는 묘한 기대에 들뜹니다.

꼭 납득이 가는 구성만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그렇게 우수한 두뇌를 보유했다는 서맨사가 왜 대형 로펌에서 지루한 페이퍼워크만 수행했는지도 의문이고, 그런 식의 무사안일 커리어로는 이후 고위직으로 승급이 어려울 것이며, 역설적이게도 금융위기 속에서 맨 처음으로 밀려나게 된 건 이런 점에서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무튼 그리샴은 환경 파괴 문제, 계약의 불이행, 법인격의 규율 제도 그 맹점을 교묘히 악용하는 대기업, 혹은 거대 자본의 사악한 행태를, 젊은 남녀 변호사의 일견 가망 없어 보이는 투쟁을 통해, 멋지고 재미있는 또 한 편의 활극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읽고 나면 독자인 내가 정의에 동참하여 뭔가를 같이 해 낸 듯 성취감과 도덕적 만족감을 안겨 주는 그의 작품, 이 신작에서도 그의 내공과 수완은 여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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