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정호승 시인의 이 산문집은 모습을 조금 달리해서 이미 세상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세월호" 언급이 낀 글도 보이는 점으로 봐서 최근에 쓰신 글 여러 편이 업데이트되었음은 눈에 바로 들어옵니다. 구판에서 어느 글들이 빠지기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객체로서 텍스트상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시인의 글을 읽는 독자로서 내 자신이 그간 얼마나 변했는지 더 실감할 수 있었던 독서였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이미 우리 셈법으로 예순 다섯. 넉넉히 노인으로 대접받으실 만한 연세입니다. 시인께서 예전에 쓰신 글 중에는, 성철 스님을 지척에서 뵙고 말씀을 나눈 기록도 있습니다. "큰스님이 열반하신 지 십 년...."이란 대목에서, 당해 기록의 연대를 우리는 어림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꽤 이른 나이에 등단하신 편이고, 시인 스스로도 고백한 적 있지만 "특별히 시대를 앞서가거나 하진 않은", 치열한 현실참여와는 조금 거리를 두신 편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대표 산문을 엮은 이 책의 내용 곳곳에서도 감지할 수 있고, 그 유명한 안치환의 노래 가사 한 구절인 이 책 제목(시인이 직접 작사)만 봐도 알 수 있듯, 시인은 알게모르게 시대의 아픔을 느낀 흔적을 그의 활동 자취 곳곳에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 이 책 구판을 읽을 때에는 "시인은 산문을 써도 이처럼 깔끔하고 아름답게 쓰는구나." 같은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잖게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시인은 당신의 생에서 의외로 아픔이 많으셨고, 그 아픔을 글에다 가감없이, 부끄러워할 것 없이 절절하게 표현을 하셨더랬구나, 이런 생각이 더 먼저 들더군요. 시대의 어둠과 모순에 아파할 줄 아셨던 시인(시인이란 직분의 본 정체성 중 하나겠죠)이었지만, 개인사 곳곳에서 마주친 그 모든 일상의 더러움, 한심함, 그리고 인간 존재 본질에서 빚어지는 악함에 대해, 시인은 우리 평범한 독자들과 다를 바도 없는 여리디여림으로 그 느낌을 털어놓고, 애써 강한 척할 것 없이 영혼의 비명을 그대로 지르고 있었습니다.

 

독자로서 우리가 다 잘 아는 것처럼 시인은 가톨릭 신자이시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희생, 깨달음, 순명, 그리고 아가페적 사랑을 마치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 인간 예수의 삶에 대해, (한때의 사정이지만) 증오와 적의를 드러내는 대목은, 성인(聖人) 비슷하게 저자를 대해 왔던 그의 팬에게는 참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이 글도 예전 판에 수록되어 있었을 텐데 왜 그땐 보지 못했을까요). 이 책에 쓰인 대로, "예수는 성자(聖子) 이전, 사람으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을 그 길지 않은 생애 동안 확실히 보여 주고 떠난" 분. 그런데 그 모범이라는 게, 남아 있는 우리들이 도무지 따라할 수 없는 실천이란 말입니다. 이러니 어찌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이처럼, 인간으로서 발가벗은 정직한 고뇌를 한때 가졌었고, 그 생각한 바 아파했던 바를 지면에다 독자를 향해 적나라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따라못할 바를 과제로 잔뜩 안기고 떠난 인간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신으로서 섭리한 바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십자가라는 말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내 십자가만 이렇게 무거워야 합니까? 왜 내가 처한 환경만 이렇게 가혹해야 합니까? 아마 해당 신앙을 간직한 많은 신자분들도, 이런 못된 반항을 단지 입 안으로나마라도 되뇌고 퍼붓고 울부짖은 기억이 전혀 없지는 않으실 겁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도 몇 배 늘려 느낄 수 있는 시인이기에, 시인 자신의 운명그 부조리에 대해서만 담담하길 기대하는 건, 어쩌면 십자가에 달린 동안 예수에게 조금도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길 요구하는 바나 진배없는 무리일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지극히 이기적인 체험으로부터 자신의 영혼 그 안식을 구하는, 범속한 우리들이나 즐겨 찾을 법할 도피적, 편법적 힐링을 꾀하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게 없고 가난하다 여길 때, 역사(驛舍) 주변에 모여 동병상련의 느낌을 공유하는 맹인들의 모습을 보라고 합니다. 어떤 맹인은 상점에서 파는 굵기의 두 배나 되는 김밥(시인의 짐작으로는 그 아내가 말아 준)을 먹으며, 그 고달프고 모욕적인 현실 중에서 잠시나마 아픔을 잊습니다. 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 저렇게 극한의 궁핍과 불편 속에서 생의 연명을 도모하는 이도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소한 기쁨과 일상 하나하나가 얼마나 경이로운 신의 축복인가?

 

두 다리가 없는 걸인도, 성철 스님의 다비식에 유난히 많이 모인 참배객들이 그날따라 후하게 베푼 선심 덕에, 평소의 몇 달치 벌이를 구걸함에 성공하고 행복한 미소를 띱니다. 대각 성인은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통해, 우리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자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인생이 다 그런 바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걸인은 남들과 달리 자신의 하반신에 달리지 않은 두 다리에 대한 아쉬움을 까맣게 잊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상대적 궁핍 같은 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유쾌하게 떠들며 나누는 환담 속에 어느새 완전 망각의 영역으로 던져 버립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상에서 그토록 불편해하고 못 견뎌하는 물질적 결핍은, 우리 자신이 영혼에다 근원적으로 떠안고 있는 정신적 결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진대, 우리가 일상에서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잊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자신의 과실로 수도관을 터뜨려 놓고는, 도리어 샘퉁한 얼굴로 "피해가 있으면 배상청구하세요."라며 문을 닫고 들어가버리는 어느 이기적인 아줌마. 아마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적반하장"과 "역지사지"가 뒤섞여 "역반하장"이란 실언을 하고, 그 실수를 이 후안무치한 이웃에게 교정받기까지 합니다. 시인은 자기 책이 모두 젖어 못 쓰게 된 봉변과 함께, 인간으로서 최소 공감대까지 말살해 버린 듯한 사람과의 이 황당한 체험이 이후까지 얼마나 깊고 뚜렷한 흔적을 남겼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또 인생입니다. 돈이 없어서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고, 돈이 없어서 마음에 안 맞는 자와 벽을 사이에 두고 참아 내며 살아야 합니다. 시인의 이 두껍고 아름다운 산문집에는, 소재로서 비루하고 구차한 우리네들의 일상이 가감 없이 녹아들어 있는지라, 오늘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삶을 견뎌내야 하는 우리들에게, 그 짊어진 십자가를 경건한 일곱 빛으로 채색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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