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 2 - 시크릿 스피치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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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롭 스미스는 자신의 서사를 충실히 따라가는 독자를 내내 확실하게 고생시키다가(까다로운 문장으로가 아닌, 주인공의 혹사를 통해서), 마지막에 가서야 "우리의 기대를 역시 저버리지 않는 정의로운 영혼"으로 복권하는 재주를 통해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슬픈 쾌감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 2편에서는 역시 충격적인 인트로를 통해, 러시아 민중의 정신 세계를 오래 지탱해 오던 종교란 요소를 끌어들여, 공산주의 체제가 얼마나 반인도적 방식으로 민중의 해방이 아닌 그 철저한 예속을 꾀했는지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연작이 21세기 아닌 직전 시대에 출간되었다면, 일방적으로 상대 진영을 비난, 폄하하는 블공정한 반공물이라며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겁니다. 소련 체제가 무너지고 수십 년이 지난 시점, 그에 대해서라면 마치 나치 독일처럼 이미 철저한 단죄가 이뤄지고 난 후의 사정이라, 이제 마음놓고 "던전"의 배경대유로 이처럼 쓰일 뿐 이념적 함의가 작품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음을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서두는 지난 1편보다 더 충격적 삽화로 채워집니다. 여기서 사제가 왜 반려자를 두고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러시아 정교는 본래 대처를 허용합니다(장려하지는 않지만). 제자(...) 막심을 인간적으로 무척이나 아낄 뿐 아니라 신봉하는 종교에 대한 신심, 헌신도도 지극히 깊은,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모범적 인격자형 사제 라자르는, 그러나 그 제자에게 이중의 배신을 당합니다. 처음에는 이 막심에게 아내 아니샤를 유혹당하고, 나중에는..... 그렇죠. 이 막심은 MGB의 끄나풀이었던 겁니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던 장면, "너희들, 조국과 인민의 배신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면서 비밀 경찰이 들이닥치고 무지막지한 구타, 구금이 이어지는 그런 소동이, 이 작은 아지트에서도 재연됩니다. 악질적인 배신자가 그 사이에 끼어, 배신도 모자라 체제의 주구로서 극악스런 언동까지 희생양에 대해 추가로 저지르는 모습까지... 지켜보는 독자는 마음이 무한 지옥으로 추락하는 것 같습니다. "막심"이라는 (러시아에서) 흔한 이름을 가진, 외모도 잘생긴(이게 힌트였습니다) 청년이 스승과 상급자에게 이런 저열하고 패륜적이며 인간 사는 세상에서 지극히 예외적이라 할 추악한 배신을 행할 수 있는가?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청년은 젊은 시절의 레오 데미도프였습니다. 독자를 엿먹이는 진짜 반전은 바로 여기죠.

레오 데미도프는 1권 <차일드 44>에서도, 유능할지는 모르나 질이 아주 나쁘게 보이는 방식으로 체제에 충성하는 공무원으로 인트로에 등장합니다. 체제가 나쁘지 그 부속품인 사람이 나쁜 건 아니라고 변호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감싸 주기엔 그가 상황 속에서 저지른 개별 행동이 너무도 잔인하고 집요하며 반인도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의 어린 두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깁니다. 타인의 어린 시절에 입힌 정신적 상흔이, 이후 당사자가 성인으로 자라난 후 그가 속한 사회에 어떤 식으로 잔혹한 복수를 행하며 그 근본의 응보율이 실행되는지는 1권 전체의 핵심 서사로서, 우리 독자가 이미 충격적으로 경험한 바 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이 2권은 그보다 훨씬 전, 아마도 2차 대전(즉 소위 "대조국전쟁")이 종료된 후 국가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레오 데미도프가 공명심과 부풀려진 자아에 도취되느라 아마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무렵일 겁니다. 이런 자가, 또 한 번 영웅의 연단에 높이 세워질 수만 있다면, 그 친부모인들 당국에 고발하여 그 불건강한 허영을 충족시키지 못하겠습니까? 이 시절 레오는 그처럼, 젊은 혈기와 광기어린 국가관이 서로 섞여, 그 눈에 뵈는 게 없는 완장질 중독 괴물이었던 형편이었습니다. 한때마나 이런 썩은 영혼에게 지배받은 자를 두고, 우리 독자는 계속 주인공으로서 신뢰를 보내야 할지 여부를 놓고 심각한 갈등에 빠지는 게 당연합니다. 지지해 줄 가치가 없는 캐릭터에 대고 애정을 퍼붓다 (라자르처럼) 나중에 무슨 배신을 당하게요.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이 새삼 생각나기도 합니다.

1권에서도 숱한 과오를 저지르다 마침내 바른 길로 (다소 영악한 방법을 써서) 접어드는 레오는, 이 2권에서 그의 원죄 중 하나를 다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1권에서 두 아이의 부모를 앗은 죄에 대해 마음 속 깊이 통회하던 그는 (어디까지나 마음 속으로일뿐입니다. 국가의 명령에 의해 행한 결과를 두고 죄의식을 느낀다면, 그건 바로 당성(黨性)의 결핍 증명이요 반역행위이기 때문이죠) 두 아이를 입양하여 친부모처럼 사랑을 베풀려고 합니다. 허나 이도 여의치 않아서, 그와 처 라이사는 은밀하고 끔찍한 개인적 시련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1권에서 "아 왜 레오는 자살하지 않는 걸까" 같은 생각이 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물론 주인공을 죽일 수 없는 상업적 고려에다, 독자에게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안기려는 미학적 고려가 함께 작용한 덕입니다) 이 2권에서는 레오 외에 다른 인물들이, 주로 과거의 행적에 대한 죄의식을 못 이겨 속속 자살하는 설정이 나옵니다. 마치 셜록 홈즈처럼, 레오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상을, 증거와 논리로서 시원하게 밝혀내는 활약상을 짧고 강력하게 초반에 보여 주는데, 이 역시 1권의 장치와 일관성을 유지하는 부분입니다.

레오는 명철한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인물이라, 독자는 이미 알고 있는 사태의 비극적 진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다 하는 확신이 (논리적으로) 다가오면, 망설임 없이 전면 수용하는 게 레오입니다. 아내 라이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러나 레오는 말을 아끼고 또 아낍니다. 저 위 아니샤의 유혹은 아마도 이런 라이사를 만나기 한참 전에 이뤄진, 젊디젊었던 시절 또 하나의 과오일 뿐입니다.

이 2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속죄"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주인공을 끼고 살 필요 있나?"하는 회의감을, 이 2권에서 레오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 그리고 가혹한 실천에 기반하여, 더 이상 독자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지 않게, 자신의 죄과와 함께 말끔히 씻어 줍니다. 혹 1권에서 뭔가 개운치 않은 감정이 남아 있던 분들은, 이 2권까지 마저 읽어 보십시오. 레오 데미도프 시리즈가 단순히 상업적 프랜차이즈가 아니라는 각성이 생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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