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오브 카드
마이클 돕스 지음, 김시현 옮김 / 푸른숲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의 흑막은 세계 어디에서나 사정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의원 내각제라는 헌정 시스템을 확립한 나라죠. 형식적으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 직위에 머물러 있는 군주를 두고서도, 선거를 통해 뽑힌 다수당의 리더가 국가 살림의 실권을 쥐게 한 건 당시로서는 대단한 파격이었습니다. 이런 체제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고 근 한 세기가 지나서도 예컨대 대륙의 오스트리아 같은 곳은 여전히 전제정의 성격을 떨쳐버리지 못했으며, 실세였던 메테르니히 재상 같은 이도 황실의 이익과 구체제 수호에 충성을 바치는 범위 안에서만 권력자였죠. 얼핏 보아 취약하기 짝이 없는 곡예와도 같은 의원내각제를 오랜 시간 동안 발전시켜 온 영국 헌정사는, 복잡다단한 이해 관계로 대립하는 제 세력 사이에서 막후 조율과 타협을 이뤄낼 수 있는 수완 좋은 리더들의 자취를 필연적으로 그 만신전에다 봉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벤저민 디즈레일리,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 등이 그 예입니다(아무래도 시점이 보수당 인사들 쪽에만 위치하기 때문인지 역대 반대당의 당수들은 잘 거론되지 않더군요).

대처 전 수상(이 책에서 유일하게 실명으로 나오는 인물입니다)이 민심을 완전히 잃은 후에도, 보수당은 그 다음 선거에서 또다시 집권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이 집필 당시 시점에서 근미래를 설정했다고도 보지만, 여러 정황상 이 작품은 1992년에 치러진 영국 총선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맞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작품에선 선거 당일 며칠 전부터도 집권당의 승리가 점쳐졌고, 방송사 주관의 출구 조사에서는 3,40여 석 정도의 차이로 이기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걸로 설정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투표가 종료되고서야 보수당의 승리 결과가 알려져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지요. 의석 수가 종전 140석 차이에서 60여석 차이로 급격히 감소한 것도 소설 속의 가상 세계와 비슷합니다. 소설에서는 프랜시스 어카트 원내 총무(이제는 원내 대표라는 번역어가 더 좋을 것  같지만)가 서리 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데, 실제 역사에선 존 메이저 총리가 서리 출신이기도 합니다.

존 메이저 총리를 모델로 삼은 듯한 작중 캐릭터는 헨리(할) 콜링리지입니다. 화자인 어카트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의 규칙을 바꿔 나가기보단 교활하고 좀스럽게 순응해 가며" 그 자리에 오른, 별반 평가해 줄 것 없는 그릇 작은 인물에 불과합니다. 요즘처럼 매스미디어가 비정상적 권력을 행사하는 현실 속에선, 콜링리지처럼 고만고만한 정치인들이 수상 자리에 번갈아 오를 뿐, 나라의 틀을 건강한 방향으로 과단성 있게 몰고갈 만한 걸물들은 그 전 단계에서 번번히 좌절할 뿐이라는 거죠. 처칠이나 로이드 조지는, 요즘 같았으면 신문과 방송의 집요한 공세에  벌써 낙마하여 야인 신세에 평생 머물렀으리라는 게 그의 전망입니다.

콜링리지를 두고 "대단히 재미없는 인물이라 그의 부인도 아마 다른 데 찍었을 것"이라는 게, 대중의 평판을 대변하는 눈치 빠르고 화통한 스타일의 여기자 매티 스토린의 신랄한 단평의 형식으로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존 메이저 총리를 두고 세간에서 찧어대던 입방아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곡마단 곡예사의 아들인 메이저 총리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자신과 아주 다른 길을 걸으며 가업을 이으려 노력했으나 성과가 좋지 못했던 무능한 형을 둔 점도 콜링리지가 메이저 총리와 닮아 있는 대목입니다. 성품이 악하지는 않으나 룸펜처럼 인생을 허송하던 형의 존재라는 약점을 냉큼 잡아, 이후 파워게임에서 유리한 패로 활용하려는 어카트 총무지만, 당장은 실세인 총리에게 그 명백한 실책을 두고서도 직언을 삼가며 꼬리를 내리는 모습은 독자의 고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언플"이란 말이 요즘은 주로 연예기획사의 행태를 두고 쓰이지만, 과거에는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특히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 씨의 장기였죠) 주로 정계에서 널리 구사되던 술수를 두고 비꼬는 용어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에도 언론사는 정치 게임의 유력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정치인과의 오프 더 레코드 회동을 통해 다음날 기사의 핵심 소재를 잡고, 웨스트민스터 街 전체에 파장을 일으키는 모습은 이미 플레이어 레벨을 넘어섰다고나 해야겠습니다.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교과서적 평가가 무색할 정도죠.

어카트는 민간 홍보 회사 대표 오닐을 통해, 그의 오랜 지기이자 반대당 의원인 켄드릭에게, 집권 내각에 치명적일 수 있는 정보를 고의적으로 흘리게끔 공작을 벌입니다. 어카트는 원내 대표라기보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구 안기부장에나 해당할 만큼 자당 의원들에 대한 각종 약점을 잡고 전선 이탈을 막는 데에 노련한 술수를 구사하는데, 오닐은 민간인이지만 보수당의 하청 업체로 사실상 오닐은 당내인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마약 상용이 약점으로 잡혀 어카트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되는데, 이미 예순을 넘겨 정치적 야망이 조바심으로 변한 어카트는 마지막 용틀임으로 대권을 넘보는 터라, 수단의 청탁을 가리지 않고 휘두를 만큼 코너에 몰려 있는 처지이기도 합니다.

야당이라고 상황이 다를 바 없어서, 결국 이해관계의 궁합 여부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지는 모습은 당의 경계를 따지지 않습니다. 출구 조사 결과 발표 후 웨일즈어로 욕설을 내뱉는 반대당 당수는, 실제로 웨일즈 출신에다 거침 없는 언행으로 구설에 올랐던 닐 키녹을 모델로 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실제 영국의 정당사와 숱한 추문을 알고 읽으면 재미가 몇 배로 늘어나는 멋진 풍자소설이며, 현재 미국 넷플릭스 신디케이트로 방송되는 케빈 스페이시 주연 미니시리즈는 배경과 설정을 미국식으로 통째 번안한 작품입니다.

 

처칠은 이런 명언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 체제다. 하지만 현존하는 그 어느 정치 체제보다도 나은 제도이다." 이 책 뒤표지에는 "민주주의는 과대평가되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21세기에 접어들고도 우리는, 가장 안락하게, 건전하게 의존해야 할 정치시스템을 두고서도 최소한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한심한 정치 모사꾼들의 부패한 행태가 보기 싫어서라도, 이제는 다른 대안 모색에 나서야만 하는 전환점에 도달한 걸까요? 히틀러의 변덕에 국민의 생사가 좌우되는 폭압 행태에 비하면, 그래도 이런 "소인배"들의 잔머리 굴리기 게임이란, 차라리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는 것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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