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오프 밀리언셀러 클럽 139
데이비드 발다치 엮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탐정 소설, 미스테리, 그리고 스릴러 장르는 지난 백 년에 걸쳐 각각 매혹적인 캐릭터, 주인공 들을 세상에 탄생시켜, 독자를 매혹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모두의 마음에 품게 도와 줬습니다. 그저 주인공 한 명만의 활약으로도 우리 독자들은 그의 동선을 눈과 심장으로 좇으며, 정의의 구현과 악의 패퇴라는 모두의 이상이 가상의 세계에서나마 구현되길, 한편으로 두 손에 땀을 쥐어가며, 한편으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장르 향유자의 특권과 함께 즐거운 기원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좋아하는 한 명의 캐릭터 활약으로도 우리 독자의 가슴은 그 맥박이 가속되고 동공의 그 넓이란 확장된 게 사실었습니다.

 

스릴러 장르는 아닙니다만, 탐정 모험 소설 영역에서 모리스 르블랑이 한 세기 전에, "캐릭터 한 명이 아닌, 만인의 사랑을 받는(혹은 그럴 전망인) 두 명의 주인공을 함께 출연시킨 장편, 단편"을 세상에 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시도의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곤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둘 중 한 캐릭터인 셜록 홈즈의 팬들로부터는 항의가 쇄도했고, 해당 컨텐츠의 저작권자라 할 도일 경은 여러 경로로 불쾌감을 표시했으므로, 이 (일방적) 합동 경연은 축복을 가득 받은 무대에서 이뤄진 게 아닌, 절반의 실패에 가까웠습니다.

 

이 책은 스릴러 장르에서 활약해 왔고 아직 팔팔한 현역이라 할 22인의 유명 캐릭터들이, 11편의 날씬한 단편들에서 둘씩 짝을 이뤄 콜라보의 향연을 보이는 멋진 컬렉션입니다. 백 년 전의 저 사례에서 보았듯, 이미 독자들 사이에서 지명도를 얻은 복수(複數)의 캐릭터들이, 단일 작품에 함께 얼굴을 내비치는 것 자체가 쉽게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며, 법적, 기술적인 여러 문제가 뒤따릅니다. 1) 어느 작가가 집필을 주도하겠으며, 2) 두 작가의 구상이 상충할 경우 누구의 의견을 존중할 것이고, 3) 해당 작품의 판매 수익은 어떤 비율로 배분할지가 매 단계에서 일일이 난제로 부상합니다.

 

이 책은 위 세 가지 애로사항 하나하나를, 기획의 총괄자 격인 데이비드 발다치의 놀라운 수완으로 해결한 결실입니다. 독자의 상식으로는, 이런 책 한 권 안에서 다수의 작가가 자신의 피조물들을 흔쾌히 무대에 풀어 주고, 개성과 지향이 상이한 그들이 용케 두 명씩 짝을 맞춰 조화롭고 유쾌하게 완성도 높은 공연을 펼치게 한다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발다치의 서문에도 나오지만, 위에 적은 장애 외에도 4) 현대에는 인기 캐릭터의 경우 출판사가 계약 기간 중에는 핵심 이해 당사자 중 하나이기 때문에, 영리 목적으로는 작가 본인도 그 처분을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책 소개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제3자 위치의 평론가가 캐릭터 논평을 한 글들을 모은 책이거나, 기 발표 단편 중 서로 어을릴 만한 걸 앤솔로지로 엮은 내용인 줄 착각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책은 상식적으로 나올 수가 없는 성격이거든요. "기적"이라고까지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말입니다.

 

"국제 스릴러 작가 협회"라고, 유력 인기 스릴러 작가들이 그들만의 연맹체를 구성한 실체가 있는가 봅니다. 스릴러란 장르가 미스테리물, 추리 소설과 언제나 선명하게만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작가 한 사람이 강고한 폐쇄적 경계를 형성한 영역 안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 단체가 실제 존재하여 어느 정도 지속적인 결속을 이루고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 단체 안에서 각 작가들이 제법 신사적인 친분도 그간 도모해 왔기에, 이렇게나 유명한 저자들이 일시 듀오를 이뤄 사적(私的)으로 통신을 주고받으며 작품 하나씩을 완성할 수 있었겠습니다. 두 명이 작품 하나를 멋들어지게 만드는 일은 고사하고, 제 생각엔 이런 인기 작가들을 일단 둘씩 짝지우는 것부터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독자들의 눈길을 가장 강렬하게 끈 건, 작품집 첫머리에 수록된, 마이클 코넬리와 데니스 루헤인이 공동 창작한 단편 <야간 비행>이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꿈도 아니고요), 정말 "해리-히에로니무스-보슈", 그리고 패트릭 켄지 두 캐릭터가 동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물론 두 사람 다 범인 잡는 신분(디텍티브)이니, 각자의 사건에서 우연히 공통으로 걸린 문제의 인물 한 사람을 두고 체류지 현장에서 서로 조우하는 내용입니다(이 자는 정말 운이 없습니다. 한 명의 추적자로도 버거웠을 판에...) 전 우스웠던 게, 실제 두 캐릭터가 동일 무대에서 만나고 보니 서로 나이도 따지고, 그 날카로운 눈에 상대의 강렬한 개성과 범상치 않은 기(氣)가 감지되지 않을 리 없으니 제법 신경전도 펼칠 만한데, 두 작가 역시 그 점 감안하여 두 인물의 첫 대면을 다분히 희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에도 적었지만 이런 콜라보에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공동 창작이 이뤄질지는 독자로서 실로 궁금한 점인데, 각 단편 앞에는 편집자가 간단하게나마 캐릭터들의 연혁, 개성, 그리고 아주 짧은 작가론을 적어 둔 글이 있습니다. <야간 비행>앞에는 이 단편이 어떤 경위로 완성에 이르렀는지 알려 주고 있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두 작가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므로, 스릴러 팬들은 읽으면서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전 사실 패트릭 켄지가 범인으로 (억울하게) 몰리는 상황을 예상했고, 책에도 나오지만 두 캐릭터가 워낙 극과 극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다 보니 콜라보에 진심 무리가 따를 텐데... 하는 걱정이 들었더랬습니다. 그들다운 방법으로 독자의 이런 우려를 불식하는 노련한 작가들입니다.

 

스릴러도 법정을 배경으로, 법조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들이 제법 많죠. 미국인들이 법정물에 얼마나 열광하는지를 알면 이는 사실 놀랍지도 않습니다. <팬더를 찾아>는 냉철한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 폴 마드리아니와 열혈 여검사 알렉스 쿠퍼가 같이 나오는 (역시 놀라운) 단편인데, 극중 알렉스가 "내 일도 아니지만 정의를 실현하는 게 나의 직무이기도 하니 이 정보를 알려 주고 당신을 돕는다", 혹은 "법정에서 당신과 여태 맞붙지 않은 게 행운이다(너무 닭살이죠?)" 같은 멘트를 날리며, 이 작품집 중 최고의 케미를 자랑합니다. 이 단편은 1) 콜라보 치고, 2) 단편 치고 제법 큰 스케일과 묵직한 시사성을 자랑해서 두 번 놀랐습니다.

 

편집자는 "현실vs몽환"이란 컨셉으로 이 작품을 요약하고 있지만, 제 생각에는 "남vs여", "선vs악", "과거vs현실"이라는 다차원 대립 구조가 펼쳐지고 있는 게 <웃는 부처>입니다(생각해 보니 "동vs서"도 있습니다). 정신분석 전문의 말라카이(책에는 "말라차이"라고 적고 있는데, "말라카이"가 올바른 현지 발음입니다) 새뮤얼과, 팔팔한 기질의 여형사 D D 워런이 협연하는 완성도 높은 단편 스릴러인데요. 음과 양을 각각 대변한다 할 이 극단적으로 불협화를 이루는 두 명의 캐릭터가, 전혀 협업 아닌 협업으로 범인을 검거하는(사실 새뮤얼은 범인 스탠스에 가깝지 누굴 잡는 입장이 아닙니다) 스토리가 볼만합니다. DD가 제 할 일 마치고 퇴장한 후, 말라카이는 불상을 뒤집으며 일생 동안 추적해 온 비전을 드디어 만난다는 기대에 전율합니다. "말라기", "사무엘" 이름과 성 모두 기독교 구약 예언자 이름에서 따온 캐릭터가, 이 단편에선 불상에 울고 불상에 웃게 된다는 점이 아이러니했습니다.

 

과연 이런 기획, 캐릭터 듀오 콜라보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는 트렌드로 자리잡을까요? 독자 입장에선 상상만으로도 심쿵이지만, 냉정히 현실을 따지고 보면 가능성이 크지 못합니다. 작가가 재벌도 아니고, 아무리 인기를 누려도 재능의 투입 그 상당 비중을 이번처럼 내내 "기부"에 쓸 수는 없습니다(그러고 보니 진짜 재벌이라고 해도 불가능하겠네요.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획은 앞으로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스릴러의 익스프레스 갈라 쇼라 부를 만합니다. 이런 책을 무심히 지나치고도 밤에 잠이 잘 오는 독자라면 그저 그 무신경함에다 대고 뭐라 해 줄 말이 없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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