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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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 장편은, 서사적 흥미를 충분히 갖추었으면서도, 원숙한 그의 사상과 완성도 높은 문학적 기교(특히 상징)를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포섭한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예컨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어내려갈 때처럼의 가독성을 독자로서 기대해서는 당연히 안 되며, 카뮈 같은 거장의 작품은 독자에게 엔터테인먼트를 선사하려는 게 의도가 아니라, 세상과 인간에 대해 같이 진지한 고민을 해 보자는 제의에서 창작된 겁니다. 그런 작품이 이 정도씩의 "서사적 배려"를 베풀고 있습니다(텍스트에 "스토리텔링"이 담겨 있으니 맨땅에 헤딩 식의 "공부"는 면할 수 있지요). 작가가(그것도 카뮈 같은 거장이) 최소한 형이상학 담론 그 날것의 육질을 감당해야 하는 노고를 극히 일부라도 덜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르트르는 문예적 방법으로 잘난 척 하고 싶을 때나 특별한 변덕이 문득 "실존적으로" 그의 영혼을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곤, 독자들을 향해 이런 수고를 들인 적도 일생을 통해 별로 없습니다.

저자(작가)가 카뮈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장편 소설은 무지하게 재미있습니다. 뜻밖에 닥친 재난의 현장 한가운데서, (특히 실존의 무대가 아닌 가공의 배경이라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필사적으로 제 한 목숨 건져 보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만큼 흥미로운 게 없습니다. "싸움 구경 불구경" 같은 말도 그런 속된 심리를 반영하는 거고, 잘 만들어진 재난영화가 언제나 흥행에 성공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흔히, 위기에 처해 봐야 인간 본성이 나오고 그 그릇이 가늠된다고들 하죠. 숱한 인간 군상들이 절망적 상황에 맞닥뜨린 후, 온갖 직업, 연령, 인종, 계급 등의 배경을 지닌 그들이, 그 조건과 지위로부터 사회가 기대하는 품격, 직무 수행의 수월성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며, 일상의 한계를 훌쩍 넘나드는 극한의 교란 상태에 빠져 들거나, 혹은 초인적인 침착성으로 오히려 평소보다 더 빛나는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 독자들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차피 인간 자체가 부조리의 한복판에 던져진 것이요, 그의 가치는 자신의 시련에 각각 대처하는 방식으로부터 판별, 증명될 수 있을 뿐이다."

배경이 된 "오랑"은 알제리에 위치한 상업 도시이며, 별다른 개성이 없어 작중 화자가 "대체 무엇으로 이 도시를 규정해야 할지 난감할 뿐인" 그런 고장입니다. 하지만 이는 식민체제의 한복판에서 백인 수혜자로서의 지위를 "그저 일상처럼" 누리고 있을 뿐인 입장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고, 객관적으로 오랑은 (책의 역주에도 나오듯) 무역으로 상당한 번영을 누리던 상업 지구였고, 숨 막힐 듯 부가가치 쟁탈의 각축 속에 어디로부턴가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던 본토 프랑스인들이 (현지인의 희생 위에) 마음껏 경제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던 신천지로 자리매김한 지 근 백 년(이 소설의 설정 기준으로)이 되던 활기 넘치는 타운(이라기보단 거진 대도시)이었습니다. 캐릭터 타루가 자신의 기록에서 고백하듯, "모든 질서가 그저 상업적 편의라는 일원적 기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신기함"과 합리성을 지닌, 아마도 파농 같은 트리컨티넨털리스트가 보기엔 지옥과도 같은 모순과 탐욕의 결집체일, 이 오랑은 프랑코포니가 총애하는 지중해 건너편의 성실한 공장이자 납세원천이었습니다.

세상이 부조리하니 페스트 역시 그 부조리의 공식을 따르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전과도 없는 이곳 오랑을, 진정 뜬금없이 날벼락처럼 덮칩니다. 재앙이 왜 성질 고약한 녀석인가 하면, 차라리 사람(들)을 노상 강도처럼 습격하여 "왜 죽는지, 언제 죽는지도 모르게" 생명을 앗으면 나을 텐데, 전조(前兆)를 잔뜩 띄워 사람 속을 썩게 한 후, 희망고문을 한 후에 고통을 안긴다는 점에서입니다. 여기서 아이러니라면, 페스트란 재앙(이자 부조리의 사자[使者] 역시, 사람들을 최대 효율로 괴롭힐 수 있는 공식은 언제나 준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작위"라는 부조리의 주요 본질에선 이탈하고 있다는 점이죠. 다만 인간 입장에서, "그런 악질적인 공식(더 나아가 "질서")"은 "부존재"보다 감당 못할 끔찍한 지옥의 법도이기에, 인식의 역치를 넘어 가까스로 부존재의 이웃 범주에 넣고  마는 것입니다. "패닉"이란 인간의 리액션은 이런 심리적 기제의 산물입니다.

"공식"이라는 화제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 작품에서 카뮈는 소위 "재난 드라마"의 (이후 영화 등의 장르에서 정착한) 극적 기법을 거의 처음으로 창안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을 만합니다. 작품 전체가 하나의 준범 노릇을 하지만, 특히 의사 리유가 갑자기 조젭 그랑(시청 말단 서기)의 호출을 받고 왕진길에 나서는 장면을 보십시오. 여기서 당사자인 리유 뿐 아니라, 우리 독자들 모두 "드디어 페스트의 첫 희생양이 나오려나 보다." 같은 불안이 내심으로부터 고조됩니다. 하지만 현장에 당도하니, 그가 진료해야 할 대상은 심약한 자살 미수자인 코타르였습니다. 여기서 독자는 일시 고조되었던 서스펜스가 가라앉고, 특별한 재난과 무관하게 인생 본연의 루트에서 언제나 매복하고 있는, 좌절, 분노, 우울, 체념 등과 같은 상수(常數)적 장애요소를, 이 긴박한 시국에서도 피해갈 수는 없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불안은 일시 잦아들었으나, 대신 우리 영혼이 언제나 등에 지고 있던 "불편"이 그를 대신하여 수면 위로 솟습니다.

바로 이때, 소설의 서두부터 (피흘리는 쥐 사체를 가지고 놀며)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수위 미셸이, 그 과정도 섬뜩하게("장기가 조여드는 것 같고, 목에서 가래톳이 터질 듯 부풀며, 사타구니가 타들어가는 것 같다") 첫 희생자로 숨을 거둡니다. 이 장면 전환이 제법 급박하다는 점에서, 잠시 안도한 독자(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노련하고 효과적인 극적 충격을 카뮈는 유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새삼 미소(?)가 나온 건, 이분 참 심각한 사상가일 뿐 아니라 능숙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르트르를 두고 같은 평가를 할 수 있을까요? 힘들죠. 그것도 많이. 저는 개인적으로, 철학자나 사상가(이기만 한 위인)들은, 알고 보면 기질이나 스타일은 단순하고 무구한 이들이 많지만, 이야기꾼들은 그  자체로 의뭉스럽고 능청맞은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는 이런 "기교적 서사, 플로팅"을 보고, 다시 앞표지에 나온 인상 찌그러뜨리고 측방 주시 중인 카뮈 사진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눈이 사시라서 의도와 무관하게 옆을 볼 수밖에 없었던 사르트르를 무슨 조롱이라도 하는 듯한(저의 왜곡일 뿐이지만) 제스처로도 해석되어서 말입니다.

진정 공식을 확립한 역사적 작품인 것이, 이후 파늘루 신부의 그 장엄한 설교(강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한번 보십시오. 카뮈의 부조리계(界)에서도 신이란 역시 무대의 중심에 자리할 수 없습니다만, 그나마 "부조리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사이드킥"으로서의 단역은 맡겨집니다(사르트르는 아예 모든 무대에서 말살하고 있지만). 또한 카뮈는 이 신부를 희화화하진 않고, 부조리의 오의를 진정으로 깨닫기 직전, 진지한 인간의 몸부림으로 충분히 긍정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후 대중 영화 제작자들이 이 탁월한 장치를 어떻게 축소 활용, 오마쥬, 패러디(?) 했는지야 후대인들인 우리가 잘 아는 바고요.

여기서 진주인공 중 하나로 평가받아야 할 캐릭터는 타루입니다. 소속과 정체감, 지향이 극중 내내 오리무중인 이 사내는, 무대에서 극에 서사적 팩터를 부여하느라 분주한 다른 인물들과 달리, (물적)실존과 (인간적)실존이 충돌하며 격렬한 비극을 생산하는 와중 그 부산물, 혹은 결실을 자신 개인의 삶에 편입시켜 가며, 외계 창조주의 카뮈의 심경을, 장문의 고백록(장치) 속에서 대변하고 있습니다. 조금 순화된 버전의 뫼르소라 해도 되고, 도스토옙스끼적 주인공이 잠시 북아프리카로 이민을 왔다고 봐도 됩니다. 그는 이 재난 현장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부모, 자신의 유년 성장 배경이, 이후 그의 방랑과 성숙, 퇴행, 저항에 어떤 식으로 상흔과 영전을 남겼는지, 담담하면서도 격정을 감추지 않은 서한 속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타루의 기록은 <까라마조프...>에서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처럼, 서사 중 서사의 형식으로 작가의 의도를 보다 선명히 언술하고 있습니다.

오랑은 실제로 콜레라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작중 시간 배경이 1941년이므로 근 백 년의 시차가 있으며, 이 작품이 실제 발표된 1949년에는 나치 독일의 마수로 프랑스 본토와 식민지가 한 차례 큰 홍역을 치르고 가까스로 진정된 시점이죠. 리유와 신출내기 기자 레이몽 랑베르의 대화에서도 나오듯, "원주민들의 처우" 문제가 아주 잠깐 지나가듯 언급은 되고, 이 이슈에 충분한 도덕적 의의는 (아주 겉치레로나마) 부여는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페스트가 "나치 독일의 침략"이라든가, 반대로 무슨 현지 아프리카인들의 반란 등 불길한 움직임의 징후 그 은유라든가 하는 해석은, 근거가 빈약하고 전혀 환영 받지 못하는 시도입니다(무엇보다 여전히 입김이 강한 카뮈의 유족, 그 남은 지인들이 극력 반대하겠죠). 다만 저는, 이후 카뮈가 보여 준 정치적 스탠스의 변화로 미루어, 본격 해석론의 단초로 삼기까지는 못 한다 해도 어느 정도 저런 주장들을 참고는 할 필요가 있지 않을지 생각도 해 봤습니다. 특히 첫번째 희생양인 미셸 노인의 (보수층에서 특히 환영 받을 만한) 태도라든가("이 건물에서 쥐가 발견된다는 건 내게 수치스러운 일" 운운), 서사의 중심에서 중립적 무색무취의 캐스터 노릇에 열심인 리유의 개성 등을 보아, 왠지 막 그 근간을 위협당하기 시작하는 북아프리카 식민 체제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작품 곳곳에서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페스트야. 페스트였다고. 우리가 페스트를 견뎌냈다니까."

"페스트가 뭐냐고요? 그건 바로 인생이죠."

척박하고 비루한 실존 앞에서 존재의 사치를 부리지 말라. 파늘루 신부가 그 의미심장한 강론을 하기 전후에도, 등장인물들은 "공연히 종교적인 내용을 담아 시민들에게 죄의식을 자극하는 신중치 못한 결과"에 대해 많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재앙은 누군가의 죄 때문에 우리 머리에 닥치는 게 아니라, 조물주(그런 게 있다면)의 랜덤 게임으로 그저 벽력처럼 지상을 휩쓸 뿐이라고, 작품 말미에서 (이미 성숙해 있었지만 한층 더) 성숙해지고 달관에 접어든 이들은 입을 모읍니다. 그래도 시쉬포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듯,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 본 후 꺼멓게 탄 시체로 떨어져도 떨어져야 한다는 게 이 실존주의자의 힘 있는 결론이죠.

카뮈의 문장은 개별 요소가 어렵지는 않은데, 맥락 연결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반면 사르트르는 개별 문장도 어렵고, 실존주의 이름값을 하느라 저작 각각의 해석도 상위 프레임 하나로 싸잡기가 매우 어려운 자유분방 개개약진입니다. 이 소설은 다시 강조하지만 카뮈의 작품 중에선 매우 뚜렷하고 흥미로운 서사 매력을 지녔고, 독자를 비교적 친절한 손길로 심오한 사유에 이끌고 있습니다. "페스트"와 음절 구조("ㅔㅡ ㅡ")가 (물론 우리 한국어 한정으로만) 비슷한 "메르스"가 여전히 한국인들을 공포에 떨고 있는 현 시국에서, 철학과 서사의 롤러코스터로 땀 좀 뻬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읽어 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페스트> 중에서는 번역 가독성이 가장 좋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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