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러시아로 떠난 네 남자의 트래블로그 러시아 여행자 클럽
서양수.정준오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면, 흔히 우리는 일본을 떠올립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객관적 현실) 감정적으로 멀게(주관적 적대) 느껴지는 상대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밀착해 있으면서도, 역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한 나라가 있습니다. 이게 가능한 표현일까요? 지구상 육지 비중의 1/6을 차지하고, 동서로 한 없이 길게 뻗어 있어, 머리는 유럽에 두고 긴 꼬리의 끝을 극동에 걸치고 있어, 머나먼 한국과도 두만강 한 자락을 경계로 접하는 러시아가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소련 시절 포함하여 지금의 러시아 공화국까지, 그 이름을 한 번 못 들어 보았다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막상 그 나라를 직접 찾아본 경험이 있거나, 문화나 역사에 대해 한 가지 사항이라도 즉시 들어 보라고 하면, 이게 가능한 사람이 또한 드물 것 같네요. 이국적인 풍물과 개성적인 사람들(특히 아름다운 여인들)을 구경하고 싶어서도 러시아 관광을 꿈꾸는 이들이 많을 텐데, 정작 그 나라로 향발하려면 (이 책의 저자님들처럼) 스킨헤드 족이 무서워 "거기 갔다가 큰 봉변이라도 당하는 것 아님?" 같은 기우에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게 보통이겠어요.



이 책은 네 분, 이제 청춘의 경계에선 제법 멀찍이 떨어진 나이의, 그렇다고 중노년이라 부르기도 뭣한, 여전히 아이들의 영혼을 간직하고 사는 네 남자들이, 평소의 우정과 인문적 사명감(?)에 없는 시간 쪼개어 가며(...) 드디어 러시아 탐방에 의기투합, 현지에 체류하며 업무에 열심인 다섯 번째 엄친아 친구분의 도움을 받아, 저 춥고 아름다우며 살짝 무섭기도 하지만 결국은 친하게 지내는 편이 좋을, 러시아라는 나라를 속속들이(주로 우랄 서부이긴 하지만) 돌아보고 온 유쾌한 기행문입니다.



만약 혼자서 다녀온 러시아라면 이처럼 재미있는 글은 나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책은 5부로 나뉘어 있고, 마흔 개 가까이의 개별 주제를 가진 글들로 짜여져 있니다. 네 분이 모여 각각의 글을 공동 집필한 게 아니라, 꼭지마다 저자가 따로 있습니다(그래서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글에 시점이 다를 수 있으니 - 앞에서 객체였던 수스키 님이 뒷 글에선 "나"로 등장한다든가 - 독자가 괜히 당황할 필요는 없구요). 네 분은 정말 절친 사이인데, 그 감수성이라든가 스타일은 서로 제법 차이가 납니다. 독자는 그래서 책 한 권에서 네 가지 컬러를 엿볼 수 있어서 좋기도 합니다.


혼자서 다녀 온 러시아 기행문 중에 제일 유명한 건 아마 대문호 앙드레 지드의 작품일 겁니다. 그 책의 인문적 (혹은 정치사적) 가치는 둘째치고라도, 러시아란 나라는 어렵고 심각하게 접근하면 할수록, 당사자에게 절망을 안겨 주고 노답의 수렁에 빠져 들게 하는, 거대한 덩치와 배배 꼬인 사연, 깊이를 알 수 없는 과거와 불확실성으로 꽉 찬 미래를 지닌 나라란 사실을 독자들에게 죠. 전 그런 나라를 이해할 때,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듯 가장 가성비 효율적인 접근 방법이, 바로 이 네 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러시아야 우리가 왔다!"며 그저 유쾌하게 다가서는 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실린 사진도 많으면서 집필자들의 수다도 장난 아니게 많은 이 책은, 제가 접한 책 중에 한국인이 쓴 걸로는 가장 부담 없이, 러시아란 나라를 실물 그대로 포착했으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읽을거리였습니다. 아마 저자분들의 인간적 컬러와 개성이 크게 작용한 이유 아닐까 생각합니다


" 점심에 먹을 수 있는 걸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 싸우어(사워)크림을 소스 삼아 한입에 깨물고 두번 세번 혀와 입천장으로 눌러 마지막 풍미까지 빨아먹는 샤슬릭은, 이거 안 먹어 본 사람은 맛을 안다고 어디 가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수스키(서양수)님은 이 요릴 두고 "러시아판 케이팝스타"라고 평하는데, 제일 쎈 자들만 살아남은, 문명 간의 혼전에서 온갖 신산을 다 맛보았던 러시아인들(결국 몽골도 물리치고 오스만, 페르시아도 제압한)이 빚어내고 즐길 만한 요리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 요리의 근원엔(양고기를 주재료로 쓰는 것만 봐도 알듯) 중앙아 유목 민족의 자취가 강하게 남아 있거든요. "그저 한인 식당을 즐기기로 결론을 낸" 주재원 "이노"님은 이 1부 다른 파트에서도 활약이 대단하시더군요.

여성들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남성들이 추레하단 느낌은 이 저자들뿐 아니라 다른 한국인 관광객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세계 곳곳으로부터 찾아 들어온 외국 방문자들에게 정평이 난 사항인가 봅니다. 저는 사실 딱히 그런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물론 러시아 여성들은 아름답고(수스키님 표현으로는 "<보그>誌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 흔히 쓰는 말이긴 하나 마스크바 젊은 여성들에게 잘 들어맞죠), 그렇다고 도도하지도 않은 것이 저 미모에 왜 저리 겸손할까 하는 사랑스러움(혹은 생경함)마저 발산하는 그런 오브제들이죠. 그런데 남자들은... 사실 동유럽 전체를 통틀어 경제가 침체하고 민중이 주체가 되어 역사를 화끈하게 건설한 경험이 부족한지라, 생기가 그리 안 느껴집니다. 성인남성이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대변하고, 여성-어린이들은 어느 나라건 간에 천진하게 순간을 즐기는 경향이기 때문에, 그런 성별 구분적 평가에는 동의하기 좀 힘듭니다.

러시아어에 정통한(광장에서 재잘대는 처녀들의 수다까지 다 번역해 줄 수 있는) 현지 주재원 이노 님의 도움을 받아 "붉은 광장"이 사실은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임을 알고(러시아 古語에서 의미가 변천. 현재는 "아름답다"가 "끄라시바"로 별개의 단어죠), 다시 한 번 네 분은 러시아인의 정신 세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의 시선을 주게 됩니다. 근데 저는 여기서 "왜 러시아인은 '빨갛다'를 '아름답다'와 같은 범주에 넣을까?"라는 의문을 갖기보다, 거꾸로 "러시아인들은 '빨갛다'를 '아름답다'와 같은 범주에 넣는 민족"이란 사실로부터, 귀납적으로 러시아인들의 정신 세계 그 정체를 추론하는 편이 더 실용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왜 너는 밤에 알몸으로 자지?"라고 묻기보다, "밤에 알몸으로 자는 게 너라는 아이구나."라고 이해의 첫걸음을 떼는 게 서로의 소통에 더 기여하는 태도겠죠.

안 어울리는 직업에 종사하다 "때려치운 후" 현재 할랑한 프리랜서로 백수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른 장래를 모색하는 분들답게, 차이콥스키니 체홉이니 하는 본연의 재능을 좇아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친 위인, 그 사적들과 기념물들을 현지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음악 한다고 다 차이콥스키면 연예기획사 연습생들은 다 비욘세 됐겠다." 이러면서 "맥주나 까는" 그들을 보며, 독자는 편안한 아저씨들 특유의, 이국 땅에서도 변함 없이 시전되는 한국적 달관의 제스처에 웃음을 픽 짓게 됩니다.

이분들도 성장 과정에서 러시아 문학의 그 압도적 세례가 끼친 영향이 대단한 듯,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어울리게?) "언제나 세월은 그렇게? 잦은 잊음을 만들지만"을 노래하면서도(나이가 나오죠?), 광장 한켠에서 조우한 아이에게 이름이 뭐냐는 질문에 "알료샤!"란 대답을 듣고 "어, <카라마조프> 셋째 아들 아냐?"란 반응이 바로 나올 정도죠. 이런 문호의 힘이란, 결국 세계로부터 "여전히 시들지 않는 인문학에의 꿈"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한 숱한 영혼들을 관광객으로 흡인하는 현대 러시아 경제의 한 축을 든든히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이라면 고려인 출신 락커 "빅토르 최"의 얼굴이 그려진 그 벽화를 안 찾을 수 없죠. 저는 언제나 저 그림 볼 때마다 묘한 인상을 받는데, 락커 특유의 심각하거나 거친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전형적 표정이 아니라, "내 말 한 번 들어 보지 않을래요?"라고 뭘 권하듯 유혹적(..) 눈빛을 하고 있단 느낌. 표정도 참 옛날 사람 같지 않고 모던하단 말이죠. 외국만 나갔다 하면 한국 공관 욕을 하는 이들이 많은데, 외무공무원들이 질책을 받아 마땅한 경우도 있으나, 어떤 분들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한다는 인상입니다. 네 분은 "상트(쌍뜨페테레스부르크를 말합니다)"에서 현지 총영사관의 도움을 적절히 입은 경험담도 끝무렵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 중간쯤에서 모스크바 우주 박물관을 다소 무리를 범해 가며 찾은 저자들(특히 준스키님)은, 한국 최초 우주인 후보 최종 2인 중 한 명인 고산 박사와의 예전 인연도 잠시 풀어 주는데요. 본인이 훌륭하고 매력이 있어야 좋은 선배와의 네트웍도 형성되는 것이며, 역시 사회적 교분이란 철저히 유유상종이다 싶은 대목이었습니다.



상트 다음의 행선지가, 발트 해 저편의 핀란드 헬싱키더군요. 이곳으로 가려면 물론 육로편 교통도 있지만 여러 모로 애로가 있죠. 사실 핀란드란 나라는 국제정치상 아주 미묘한 위상입니다.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후 소련은 말도 안되는 구실로 이 나라를 침략했는데, 현지인들의 저항 태세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큰 피해를 입고 국제망신을 당했습니다. 히틀러가 이 한심한 꼴을 보고 "아무 걱정 없이 쳐들어가도 되겠군"하고 독소 개전 결의를 굳혔다는 설도 있죠. 전승 후 소련은 핀란드를 공산화하진 않았으나, 해당국 내부 정치에 큰 입김을 불어 넣으며 간섭을 해 왔습니다. 수스키님 표현("내게 핀란드는 좀 뜬금없는 곳)대로, 러시아와 핀란드는 이처럼 묘한 관계에 놓여 있는데, 스타벅스 (현지판) 텀블러를 결국 못 구해서 좌절하는 장면은, 처음 모스크바 마트에서 10시 데드라인에 재수 없이 걸려 결국 술을 못 사 온 첫번째 "좌절"과 데자뷰를 이룹니다. 지난 역사야 어찌되었건, 현지인들이 물정 모르고 좌충우돌하며 머리와 가슴에 남긴 그 첫인상이야말로 당사자들에게는 레알 쌩얼의 진정성을 가집니다.

이 책의 결론을 딱 한 마디로만 요약하자면, "러시아는 예쁜 나라"라는 거죠. 러시아가 이쁜 줄은 이런 가볍고 유쾌한, 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여행자들 눈에만딱 보이는 진실입니다. 마음만 품고 행동을 미뤄 온 많은 후보자들에게 구체적 계획으로 한 걸음 더 재촉해 주는 게 이 여행서의 최고 매력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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