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선데이 - 테겔 감옥에서 쓴 자전적 소설 Echo Book 4
디이트리히 본회퍼 지음, 조병준 옮김 / 샘솟는기쁨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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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신학박사이자 목회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드러내어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은 인재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그의 면모는, 나치가 아직 서슬퍼런 칼날을 세계에 향해 휘두르던 때, 대담하게도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체포되고, 끝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행적, "행동하는 양심"이란 유명한 어구의 eponym이 되다시피한 그 결단과 이미지입니다. 그의 거룩한 생애에 대해 알고 나면, 사실 "행동하는 양심"이란 찬사도 그를 설명하는 데에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성이나 영성 어느 면에서도 그는 완벽에 가까운 타의 모범이었고,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 "버젓이 양심을 속이고 일 분 일 초라도 구차한 생을 영위할 수 있겠는가?"와 같은 확신으로, 지상의 악마로 현현한 독재자를 처단하는 게 신의 지상 명령이라 여겼던 그입니다. 우리 같으면 아마 "십계명에도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며, 가급적이면 평화적 수단으로... "운운하며 온갖 구차한 핑계를 대어 가며 결행을 미뤘을 겁니다. 그는 그러나 범속한 위선자, 비겁자들과는 달리, "신이, 악에 부역하고 비루한 현실과 타협하라고 귀한 목숨을 준 게 아니다"라고 하듯, 양심의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 망설임이란 없었습니다. 그의 빼어난 지성, 순결한 양심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이런 결단에 주저함이 없었을 텐데, 둘 다를 갖춘 분이었으니 그 결과야 불문가지 아니겠습니까.

 

목차와 소설이 시작되기 전, 그가 남긴 유명한 시 <나는 누구인가>가 소개됩니다. 처음은 ".... 수인의 제복을 입고 감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자신의 城에서 나오는 영주와도 같다고 한다. 간수들과 나란히 선 나를 두고, 사람들은 마치 그들을 지휘하고 교화하는 것 같다고 한다..... "로 시작하는데, 약간 지나친 자부의 표현이 아닌지 해서 고개가 갸웃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반전이 있더군요. 막상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내면에서는 쉼 없이 회의가 몰아닥치는데, 도대체 어떤 내가 참다운 나인지, 저 시의 제목은 그런 자문(自問)에서 붙여진 겁니다. 

 

이 소설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그닥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여태 구해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신학 이론을 엿보는 것과, 그가 지은 (본질적으로 이야깃거리인) 소설의 감상한다는 건 전혀 다른 시도, 경험이니까요. 그런데 저 앞에 인용된 시에서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듯, 그는 읽는 이의 감흥을 자극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문학적 재능도 빼어난 분이었습니다. 타인의 평가가 아닌, 바로 이 "소설"의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통해서, 독자 본인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역애서 평판 높은 가문인 블레이크 씨네 노부인이, 여느때처럼 지루하고 문제 많은 설교가 낀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합니다. 맞손자 프란츠(프란쯔)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할머니에게 불만을 털어 놓습니다. "너무 뻔한 말만 늘어 놓는 설교 때문에 교회에 가기 싫어졌어요. 다 외울 정도라니까요." "얘야, 중요한 건 새롭고 아니고가 아니라, 올바르냐 그렇지 않냐란다." 하지만 이는 교육상 손자 앞에서 목사의 험담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배려의 발로이며, 실상 노부인도 심각한 문제점을 느낀 나머지 공식 이의를 제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블레이크 가문의 법도는 실로 빈틈없고 엄숙하지만, 그 까다로운 규율은 타인보다 자신들에게 먼저 적용하는, 옛 우리 조선에서도 양반 가문이 누대로 유지해 오던 그런 귀족적 기품이 넘치는 가풍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서양의 교양 있고 품격 높은 신사 계층의 예법을 형성함에 있어, 기독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문의 존경 받는 어른들의 초상을 그림에 있어 필요 이상으로 위엄을 강조하는 건 "졸부들이나 하는 짓"임을 깨우치는 장면에서, 영국의 청교도 윤리, 독일의 루터파 교리가 이들 사회의 건강성에  어느 정도나 큰 기여를 했는지, 새삼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부엌은 그냥 부엌일 뿐, 괜한 위세를 보이기 위해 "응접실(parlor)"라고 부르지 말라는 지도에서, 독일 민족 특유의 건강하고 질박한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기도 했구요.

소설에 나오는 기독교적 색채는 생각보다 짙지 않습니다. 이 정도 컬러는 비기독교인 출신이면서, 본회퍼와 동시대에 활약한 어느 유럽작가에게서도 드러나는 정도입니다. 마치 저는,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 가 사람들>에서처럼,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짜는 수직 수평의 에피소드와 인연을 통해, 진지한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토로, 소통, 해결하는 서사 구조가 대단히 재미있었습니다. 진지하고 선하며 위대한 인품을 갖추기만 한(혹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들의 대화가 죽 이어지는 구성 아닐까 했는데, 시냇가에서 (사유지인 줄 모르고) 놀이를 즐기다 숲지기와 큰 마찰을 빚을 뻔한 블레이크네 아이들이, 헤럴드 브레머 소령과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오랜 가문 차원의 정겨운 교류를 극적으로 이어가는 장면은, 드라마가 살아 있어 독자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여기서 "작가로서의" 본회퍼는 거의 예언자적 지력을 드러냅니다. 프란츠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보일 듯 그 표정이 울적한 걸 보고, 소령은 "그딴 촌뜨기, 자신의 비열하고 사악하며 천한 면모가 자신만의 자랑스러운 개성인 줄 아는 구제불능의 영혼이 어떻게 널 모욕할 수 있겠느냐? 쓸데없는 고민은 어여 정리하고 자신을 아껴라." 며 조언하자(이때 소령은 프란츠 소년과 완벽한 공감을 이룹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헤럴드 삼촌(그 부친과 형제와 같은 사이라며 소령이 이 호칭을 미리 허락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블레이크 씨네 자녀들이 아니었다면, 그 악한에게 꼼짝없이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이처럼 불의한 자들로 가득차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우울해 지는 걸요."

 

이를 듣고 소령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평에서 제가 본문인용 잘 안 하는데 너무 멋있어서 어쩔 수 없네요)


"그놈도 아마 제가 속한 집단에서는 겸손하고 제 할 일 잘 하는 분자였을지 모른다. 작은 완장이 안겨 준 권력이, 그놈을 미치게 한 것이다. 이런 놈들은 약자를 골라 그 희생양의 에너지를 빨아먹으며, 세상을 그들만의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 채우려 한다. 이들에게는 자비를 보여서는 안 되고, 그를 향해 주저 없이 싸워야 한다. 그러려면 너는 강해져야 하고, 너의 건강한 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히틀러가 만약 이 소설을 지옥에서라도 읽을 기회가 있다면, 자신을 향한 듯한 이 준엄한 단죄에 그 자리에서 소변을 지렸을 만합니다.

 

본회퍼는 자신의 주전공인 신학과 직접적로는 무관한 이런 문예작품에서도, 밝고 도덕적인 세계관을 곳곳에 스며들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정신의 고양을 체험하게 합니다. 시골 자연의 묘사도 대단히 생동감 넘치고 구체적이라서, 어떤 대목은 마치 한국의 이효석이나 김유정의 솜씨처럼 선명한 풍경화를 독자에게 보여 주는 듯합니다. 그런 문학적 표현의 예술가의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사회의 모든 악덕은 바로 생명의 원초적 원리에 반하기도 한다는 점을, 섬세한 문장 속에 독자에게 깨우치고 있어 더욱 숙연한 감회를 불러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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