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사랑
김홍신 지음 / 해냄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소리 내어서 읽어 보면 참 예쁘게 조음되는 게 "시울"이란 이름이네요. 한국을 대표하는 (작중 캐릭터) 강시울의 본명은 따로 있었습니다만, 그녀의 첫 연인이 속 깊은 사연을 담아 새로 지어준 이름이, 연예인으로 채 데뷔도 하지 않을 때라 예명도 아닌 채로 저것입니다. 시인이 지어 주는 이름이라 당연히 좋은 감각이 스몄다기보다, 그녀를 향한 홍시진의 사랑이 그만큼 절절했기 때문이겠죠.

"단 한 번의 사랑". 운명적으로 만난 남녀. 이승은 물론 저세상에 가서도 구천의 혼백으로 떠돌망정 서로에 대한 지향과 끌림을 잊지 못하는, 우주와 의식계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연분으로만 존재 가능한 사랑. 누가 "당신은 사랑을 믿습니까?"라고 물을 때, 흔쾌히 "말이라고!"가 대답으로 나올 수 있는 영혼이라야, 이런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고, 또 독자로서 눈물 흘려가며 감상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는 큰 줄기만 따라가면 스릴러처럼도 보입니다. 우선 조진구라는 악당이 등장하는데, 3대를 이어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정치 거물로 군림해 왔으며, 현재도 연예계, 언론계, 검찰, 경찰, 청와대 비서실에 이르기까지 두루 손을 뻗고 있는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나이도 젊고 이처럼 집안의 배경이 막강한데도 당장 의원 배지 하나를 걸머쥐고 양지에서 뚜렷이 행세하지 않는 건, 본인의 자질이 여러 모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조진구가, 홍시진의 운명적 연인 강시울에게 느닷 반해서(일단 처음에는 그렇게 설명합니다), 청혼한 후, 대중의 시선이 한곳에 쏠릴 만한 "세기의 결혼"을 이룹니다.

홍시진의 입장에서는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죠. 한번 만나기라도 해서 진짜 사정이 무엇이었는지 본인에게 들어 보고 싶은데, 이미 남의 여자(...)가 된 이에게 접근도 불가능하고(어디 예사 유력자의 배필이라야죠), 게다가 장차 장모가 될 뻔했던 시울의 어머니도 시진을 꺼리며 못 볼 꼴을 본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예전 채플린의 <라임라이트> 시절부터 익히 봐 오던 테마, 부쩍 커버린 터라 자신의 새 눈높이에 맞는 짝, 인생을 물색하는 여자, 열패감과 불안, 질투에 치를 떠는 남자, 이런 전통적인 비극의 줄기가 대뜸 떠오르지만, 이 작품 중 시진은 출세한 연인에게 느닷 버림 받은 불쌍한 남자라는 점에서 그와는 또 상황이 다릅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시진은 이런 믿음을 놓지 않으나,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이런 태도는 대부분은 전혀 근거를 갖지 못한, 필사적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진이 대책 없을 만큼 착한 사람이라, 그저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데 불과하(다고 우리는 생각하)죠. 시진은 그래서 먼 사찰에서 은거 수도하는 스님을 찾아갑니다. 물론 다 지난 일이라 시진은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했고, 새 애인(시진이 인물도 잘생기고, 시인이 괜히 시인이 아니라서 말빨도 좋습니다 ㅎㅎ 게다가 시진은 대학교수직까지 어떻게 해서[이게 복선입니다. 독자들은 유념하시길] 얻은 터라..... ) 서다정이라는 또 괜찮은 여성 한 명을 만나 잘 사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스님을 찾아가느냐.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져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강시울이 시진과 다정 두 사람을 찾아온 겁니다. 자신은 조진구와 이혼했으며(이미 기자회견까지 해서, 전국민이 다 알다시피합니다), 말기암 환자라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얼마 안 되는 시간 시진과 함께 보내게 해 달라, 특히 시울은 다정에게 간청합니다. 서다정이나 독자나 어이가 없습니다. 악녀가 천벌을 받아 부당하게 누려온 호사를 고스란히 반납당하고, 최악의 신세로 떨어진 후 옛 애인을 찾아와서 의지를 호소한다..... 근데 여기서 독자는 두 갈래로 생각이 나뉩니다.

- 이건 고려할 가치가 없고, 당장 내쳐야 한다. (작중 서다정의 생각이나 강시울 본인의 말처럼) 죽으려면 혼자 곱게 죽지 이미 자리가 잡힌 남녀 사이에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이나마) 끼어들겠다는 게 대체 무슨 심뽀냐.

-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그래도 죽기 전에 착한 마음이 돌아온 게 어디인가.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봐 전 남친의 현재 애인 앞에서 저토록 진정을 털어놓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게다가 서다정 본인도 자인하듯) 기가 막힌 미인이 저처럼 처연한 태도를 보이는데, 까짓것 한번 못 봐 줄 이유도 없다는,....

서다정은 그러나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평균적 독자라고 해도 "예, 사정은 딱하신데, 그래도 이렇게 나오시는 건 대단히 무립니다." 에서 크게 안 벗어날 겁니다. 서다정 본인은 입을 꾹 다물고 참는데, 지금 자신의 입장으로나 연인이 과거에 당했던 처사의 부당함으로나, 격한 감정에 입을 열면 무슨 거친 말이 나올지 몰라서입니다. 그런 상대의 태도를 보고, 강시울은 "다정씨는 정말 좋은 분이군요." 라고 한 마디를 더 합니다.

불가의 수도 중에는 "연비(燃臂)"라는 게 있습니다. 신체 중 일부를 기름에 잔뜩 절인 후, 불에 태워(...) 떠 내는(주로 팔뚝 일부 - 저 臂라는 글자가 팔뚝을 의미합니다) 부처님께 공양함을 일컫는데, 이게 극한(全身을 다 태움)으로 가면 "소신 공양"이 되는 거죠. 시진과 시울 모두 잘 알고 지내 온 무상 스님은, 오른손 손가락 중 넷을 "연비"하고, 지극한 경지에 이미 들어선 고승입니다. 이 스님과 시진이 주고받는 대화가 소설 중에서 놓칠 수 없는 백미입니다. 대략 전체 분량 중 1/6 정도더군요. 노장 김홍신 선생이 자주 쓰는 기교이자, 쉬운 말로 어려운 진리를 잘 풀어 주는 그의 장기이기도 합니다.

김홍신 선생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선한 인물들입니다. 시진 같은 사람과 그렇게 잘 지낸 여인이, 돈과 권세에 팔려 한순간에 사랑을 버릴 가능성이 과연 클까요? 시울이 문제가 아니라, 일이 그렇게 되면 시진부터가 뭔가 주인공답지 못한, 최소한 김홍신의 주인공답지 못한 데가 있는 거죠.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과연 무슨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큰 사정이.... 시울의 결혼에는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짐작도 못할 무서운 음모가 자리했고, 다만 옛 애인을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대뜸 "그게 아니었어요..."를 말하지 못한 건(더군다나 서다정에게 그런 오해를 받고 어디 참을 일이겠습니까), 말 그대로 연인을 향한 진한 애정이 동기로 작용했던 겁니다(이 이상은 스포일러라 적을 수가 없네요).

이후 후반에 들어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급격한 퇴장이 이어지며, 소설은 스릴러 분위기로 치닫습니다. 진상을 알고 난 독자는 전율, 분개, 좌절합니다. 정의는 실현될 기미가 안 보이고, 악인은 최종적으로 승리할 전망이며, 시울은 다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의지와 집념으로 이미 꺼져 버린 생명의 불꽃을 이어갑니다. 이들의 사랑은 결국 먼 구천에서나 최종의 결실을 보는 걸까요.

독자는 아무래도 어느 작품이건 그 후반이 기억에 강렬히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 읽고 난 직후에는 "이렇게 해서 스릴러가 마무리되는군."의 느낌이 지배적이었는데(잠시 저는, 강시울이 병마에서 완전 회복되는 결말도 예상했습니다. 물론 그랬으면 작품의 격이 떨어지죠), 서다정을 통해 구현되는 작가의 마지막 한 수가 그런 생각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들을 영원히 같이 있게 해 주세요...."

결국 소설의 주제는, 영계(靈界)건 물리계건 바탕을 이루고 붕괴를 막는 유일한 동력은, 설사 그게 단 한 쌍의 단 한 번 뿐인 사연이라 해도, 답은 사랑이라는 결론입니다. 음모와 부조리, 거짓과 악을 분쇄하는 것도 사랑이요, 결국 그 잔해와 쓰레기를 포용하는(쓰레기나 장미나 결국 한가지라는 작중 지견 스님의 말처럼) 것도 사랑이라는 겁니다. 책을 덮으며 김홍신이란 거장의 감성과 주제는 세월이 지나도 참 한결같다는 감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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