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딸 - 가깝고도 먼 사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심리학
이우경 지음 / 휴(休)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그러더군요. "아버지도 아니고 '딸'은 더더욱 아니면서 왜 봐?" 그런데, 언젠가는 누군가의 귀한 따님을 반려로 맞을 테고, 혹시 어떤 딸의 아버지가 될 지도 모르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면, 역시 제게 해당 사항이 있는 책입니다. 다 읽고 보니 정말 좋은 책이었고, 설사 남성으로서 평생 독신으로 산다 해도(따라서 누군가에게서 딸을 볼 일도 없다 해도), 사회 생활을 하며 여러 여성들과 부대끼고 소통하는 한, 이런 책은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책들을 보면 권위자, 사회 저명 인사들의 추천사가 책 표지 혹은 권두에 길게 적혀 있기도 합니다. 이 중 어떤 경우는 신뢰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건 그냥 안면 봐서, 혹은 인맥의 힘으로 확보한 공치사나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한국 정신과 전문의들 중 대중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인지도를 지니신다 할 이시형 박사님의 추천사가 나와 있는데요. 분량이 길기도 하거니와 정말 글쓴 분의 진정성이 문장마다 그대로 묻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읽고 나서 머리가 꽉 차는 느낌이 들고, 내가 개인적으로 겪어 온 여성들의 이러이러한 행동 패턴이나 기질이 이런 이유에서 연유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파노라마처럼 지면 위에 떠오르는 신기한 체험도 했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딸이라는 인격체에게 그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치는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그럼 딸의 모든 영혼, 성격적 특질은 그저 아버지라는 거대 변수 하나가 좌우한다는 뜻인가?" 같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의 위력은, 그것대로 그냥 인정하는 게 정직한 독자의 자세라고 결국 정리하게 되었구요.

"아버지의 딸"이란 어구는, 심리학 전문용어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영혼, 성격, 기질적 특징, 혹은 정신적 결함 요소를 뚜렷하게 받은 여성"이란 의미 정도입니다. 딸 아니라 아들 역시, 부모의 성격적 영향에서 운명적으로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의 경험, 혹은 주위 지인들의 예를 봐도, 아들의 경우 그 부모님의 유전적 인자, 혹은 부모님이 베푼 양육 환경과는 거의 무관하게, 자신이 독립적으로 겪은 경험 요소(학교, 군대, 직장, 혹은 우연히 어울리게 된 친구들 등)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고, 자신만의 길을 신나게(혹은 비참하게) 걷는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 혹은 어머니의 아들(후자의 경우 마마보이라고 하죠)"이라고만 규정할 수 없는 성인들이 더 많습니다. 어려서 환경이 불우했다고 해도 멀쩡하게 사업 크게 벌이며 잘사는 녀석도 있고, 반대로 그렇게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어도 성격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본전도 못 챙기는 인생도 있습니다.

하지만 딸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의 설명이 아니라도, 우리 주변의 많은 딸들은  성장 환경의 압도적 영향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분이 참 많이 보입니다. 이런 분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더 이상 "누군가의 딸"이 아닌, "누구의 아내" 나아가 "누구의 엄마"로 성장하여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 그늘, 족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거죠. 물론 악영향과 성격 장애가 지나칠 경우, 잘 맞는 반려를 만나기도 어렵고, 결혼 생활을 원만히 영위하는 첫걸음을 떼기가 일단 힘듭니다. 딸의  인생 각 단계에서 아버지가 끼치는 영향은 그만큼이나 큰데, 이 이유로는 저자가 정리, 제시하는 유력한 가설이 있습니다.

융의 비전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생물학적 성(性)에 관계 없이, 아미누스, 아니마, 즉 남성성, 여성성이, 그 정신의 구조를 내부 공존 양상으로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남자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반대로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아직도 남성 위주의 질서가 지배하는 상황이고, "딸"에게 있어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남성은 바로 아버지이며, 처음 만나는 남성상에 따라 딸의 정신에 지리한 남성성이 형성되기 시작되며, 이 남성성의 성숙도에 따라 그 딸의 향후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가 얼마나 원활히 형성될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가설은 이 책 전체의 전제로 기능하기 때문에, 책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언제나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이 책 중에선, 앞부분에선 이를 암묵적으로만 전제하며 내용이 전개되다, 명료한 명제 형식으로는 중반 쯤에 처음 소개됩니다). 책의각 챕터가 자체 완결적으로 잘 짜여져 있고, 가명으로 보호된 실제 인물들이 사례가 흥미롭기 때문에, 독자가 특별히 학구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전혀 없이 잘 읽힙니다만, 내용 전체를 유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 전제를 유념해야겠고요.

아버지가 딸에게 미치는 영향은, 긍정 부정 양면으로 작용합니다. 긍정적 측면, 즉 아버지가 최고의 롤모델로 기능하여, 향후 그 딸이 아무 하자 없는 멋지고 유능한 사회인으로 활약하게 되는 케이스는, 이 책에서 별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의 사정이야 딸의 양육에 있어 부모들이 품는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이니, 주로 "병리적 문제"를 다루는 이 책에서 비중이 높을 이유는 없겠죠(다만 말 그대로 한국형 알파 걸, 즉 명문대 졸업, 고등고시 패스, 공기업 중역 등 실로 화려한 커리어 우먼의 행보를 보여 온 어느 여성이, 우등생 강박, 해피 페이스 신드롬 때문에,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전화한 사례는 하나 나옵니다). 지난 세대 여성들의 경우, 지나치게 엄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아들에 비해 딸을 차별하거나, 같은 딸을 놓고도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를 홀대하거나 하던 아버지가, 이후 딸의 인생 내내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일차 원흉으로 종종 작용하곤 합니다.

책임감이 없이 몽상에만 잠기는 스타일로, 가장으로서의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하는 (발달장애형) 아버지를 둔 딸은, 구타의 습벽이 있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딸 못지 않게, 이후 남성 일반을 적대하는 식으로 자신의 인생에 스스로 장벽을 치는 부정적 행보를 걸어가게 됩니다. 구세대에는 이런 유형이, 특히 한국에서라면 제법 높은 빈도로 등장했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딸도, 성장 기간 동안 부재(不在)한 아버지에 대해, 과도한 기대와 환상을 투사하여, 이후 "이런 아버지에 못 미치는 남자와는 관계를 이룰 수 없다"는 퇴행에서 벗어날 줄 모르면서, 정상적으로 이성과 소통을 진행하지 못합니다. 전자의 경우 어머니에 대해 과도한 충성, 집착을 보이다가, 기대 하나가 틀어지면 배신감 때문에 관계가 악화되는, 극과 극의 행보를 걷기 쉽고, 후자의 경우 어머니와는 피상적인 소통, 이기적인 일방 이익 추구 쪽으로 흐르는 게 보통이죠.

반면, 요즘처럼 "프렌디형 아빠", 혹은 "딸바보형 아빠"가 미디어를 통해 보편적 아버지상으로 등장하는 요즘도, 사랑만 듬뿍 받고 자라는 "신세대 딸"들에게 적잖은 문제를 남길 수 있다는 겁니다. 이른바 "파파걸"의 문제, 즉 언제까지나 아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질 거부하는, 영원한 딸로만 머무려는 여성도, 결국 사회로 원활히 편입되는 데에는 큰 한계를 겪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저자는 특히 폭군형, 독재자형 못지 않게,  이런 한없이 좋은 아빠 역시, 딸이 성숙한 여인으로 자라는 데에 장애 요소가 될 수 있음에 주목합니다.

딸에게 익애를 퍼붓는 아빠 중에는 은근 딸에게 과도한 의존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도 저자는 주목합니다. 저자는 틱낫한 스님의 책을 인용하며, "딸을 보살피며 동시에 딸에게 보살핌을 받는 아빠"는, "자신을 스스로 잘 돌보면서, 딸도 스스로를 잘 챙기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키우는 아빠"보다 훨씬 못하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 대목에서 인용하는 이야기는 실로 충격적이었는데, 저자 역시 "이런 말을 하는 딸은 대단히 잔인하게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현실적이고 현명한 딸"이라고 정리합니다. 사랑을 주는 건 물론 중요하나, 딸은 언젠가 자신의 곁을 떠나 다른 짝에게 맺어져야 할 "여성"으로 길러져야 함을, 아버지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렇게 감상적이고 의존적인 아빠 밑에서, 어떻게 저런 단호하고 지혜로운 딸이 길러졌는지 의문이 들었는데(어찌 보면 책의 취지와는 반대니까요),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책이 쓰여진 의도도, "지나간 아픈 과거를 되씹기보다, 내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분연히, 독기를 품고 일어서는 편이 낫다"라는 교훈을, 모든 불행한 "아버지의 딸"들에게 가르쳐 주려는 데 있으니 말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코델리아, 그리고 근원을 같이하는 동양의 설화 역시, 아빠가 과도한 기대를 품고 여성상을 투사하는 딸은, 그 아버지에게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배은망덕한 딸도 문제지만, 반대로 아버지에게 과도한 죄의식을 품고 "내가 아빠를 떠나면 누가 보살펴 드릴까?" 같은 강박에서 평생 못 헤어나는 딸도 문제입니다. 문제 있는 딸을 길러내는 건, 그 아버지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책은 결국, "무엇을 받고 태어났는가 보다, (변변치 못한 것이라도) 그 받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인용구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아버지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산 딸들이 사례로 많이 나오고, 반대로 활달하고 진취적인 아버지 덕분에 세상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은(물론 정치적으로 극심한 반발도 산) 마거릿 대처의 예도 들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책에 나온 사례들을 읽은 여성 독자들이, 나의 경우는 어느 사례에 해당할지 파악하여,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 큰 지표로 삼는 독후 활동입니다. 책은 심리학 용어를 일일이 원어(영어)로 병기하고 있어서, 개념을 정확히 (타 출처로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 독자가 참조하기 좋게 편집하고 있습니다(저는 이 점이 무엇보다 편하게 다가오더군요). 저자 역시,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계모의 등장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키 크고 서구적인 용모를 한, 이른나이에 가족의 곁을 떠난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남겼는지, 심지어 전공인 심리학을 택하게 된 것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싶어서였다는 고백도 적어 놓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솔직한 공감이야말로, 저ㅏ신이 이 책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게 스스로 돕는 태도겠습니다.

혹시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다룬, 후속작도 저술할 계획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어머니에게 방치되었다고 매사에 푸념하면서도, 자신이 자녀를 낳으면 자녀 교육에 정성을 쏟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일종의 복수?), 발달장애형 퇴행 심리에 빠진 노처녀의 사례라든가, 우리 주변에는 어머니와의 소통이 원만치 못해 힘들어하는 딸들도 많습니다. 위에 인용한 마거릿 대처 역시, 결국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는 실패한 딸입니다(이건 이 책에 잘 나오죠). p119: 5에 perentification → parentification 오타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