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복권과 연금복권에 당첨되었어요 - 행복한 이야기
이승훈 외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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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 우리에게 미시경제학을 가르친 L 모 교수님의 말씀 중에 "확률과 기댓값이 그렇게나 낮은 복권 당첨을 꿈꾸며 판매대 앞에 줄을 선, 옷차림도 허술한 이들의 눈빛을 보면 도저히 이해불가"라는 언급이 있었는데요. 결론은 "인간은 기대값이 아닌 (주관적) 기대효용에 의해 의사결정을 내린다."였습니다. 요즘처럼 "행동(행태)경제학"이 방대한 성과를 낸 바탕 위에서라면 아마 더 매끄러운 설명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사실, 번호가 도안과 함께 이미 인쇄된 채 판매소에서 대가를 받고 배부하는 식의  과거 복권이라면, 궁상스럽고 처지가 딱한 이들이 눈치 봐 가며 주로 구매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전히 그런 분들이 다수이긴 해도) 은퇴 후 넉넉한 밑천을 마련해 둔 노인들도, 복권방에 들어가 준비한 번호를 규격 용지에 싸인펜으로 마킹하며 꿈꾸는 듯한 눈빛을 보이곤 합니다. 1) 형편이 어렵지도 않고 2) 앞으로 사실 날도 얼마 안 남았으며 3) 그 정도 재산을 모았으면 1등 당첨은커녕 순위권 입성의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이성적으로 충분히 알만 한 분들이, 그렇게 끈덕지게 복권을 사는 모습은 진정 이해불가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야말로 최신의 어떤 샤프한 이론을 고안해서 누가 설명을 해 줄 필요가 있을 텐데, 그 정도로 머리 좋은 사람이라면 고작 이런 문제를 두고 자신의 소중한 정력과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을 것도 같네요.

이 책은 "로또 혹은 연금 복권에 당첨된 분들의 수기"가 아닙니다. 그런 분들이라면 뜻밖에 닥친 행운 덕에 물 쓰듯 당첨금을 쓰기에 바쁘거나, 좀 더 현명하다면 종적을 감춘 채, 원금은 최소한 까먹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자신의 장래를 설계할 것입니다. 화제가 될 만한 책을 쓰는 작업만큼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잘 드러내는 일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차라리 일류 문인들의 글을 한데 모아 멋진 앤솔로지를 출판하는 게 더 쉽지 싶네요. 이 책은 차라리 그런 책입니다. 서문에 명확하게 출판의 경위가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책에 실린 글들이 문인다운 풍취를 듬뿍 뿜고 있고, 각 글마다 말미에 본명 혹은 필명이 부기된 걸로 봐서, "복권 당첨"을 주제로 삼아 의뢰 후 투고된 작품집, 수필집인 것 같습니다.

서문에 나와 있는 편집인(겸 출판사 사장님)의 말씀으로는, "이 책은 상상만으로도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은 복권 당첨을 주제로 하여", 한정된 시간 동안 이승에서 갖은 영욕울 겪다 한 줌 흙으로 사라질 우리네 인생에 대해, 가능하면 낙관적이고 행복한 상념에 접어볼 것을 독자에게 권하는 취지인 듯합니다. 그러니 "복권 당첨 되는 비결" 같은 걸 기대한 분들은 다른 쪽을 알아보셔야 하겠고, "인생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수필가, 문인들의 생각을 알고 공감하고 싶은 분들이 펼치면 좋을 그런 책 아닐까 생각해요.

필자를 모두 달리하여 총 48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48편의 배열은 글쓴이들의 성명 가나다순에 따르고 있습니다. 복권 당첨이라는 황홀한 소재가 설령 아니었다 해도 원체 글을 잘 쓰시는 전문가들의 솜씨라서인지, 교과서 독본처럼 반듯하고 명료한 문장들이 돋보입니다. 여기에, 제재가 제재이다보니, 붓끝도 그 도움을 받아 유쾌하고 가볍게 움직이며, 읽는 이의 눈 앞에 절로 행복한 상념을 떠올려 주고 있습니다. 복권 제도 운용에 설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이라고 해도, 주제가 그저 복권이라는 탈을 썼을 뿐 실상은 "행복"에 관한 내용이다, 이 정도로 이해하고 읽으시면 누구라도 얻는 게 많은 독서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역 댄스 아마츄어 선수이기도 하다며 자신을 소개하는 필자 강OO 님(남성이십니다)은, 만약 복권에 당첨된다면 예쁜 외국인, 아마 댄스의 본고장 영국 런던까지 가서 염색 않은 노랑머리 여성을 모시고 와 원 없이 프로무대를 누비고 싶다시네요. 현재 스테이지 한 번을 위해 여성 파트너를 초빙하려면, 대부분 배우자들이 있는 현실상 섭외 자체가 어려울 뿐더러, 드레스 협찬 비용 등 추가로 해결해야 할 애로사항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기왕 돈 쓸 것 확실하게 써서, 무대에서 만인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는 그런 파트너를 쓰겠다는 포부인데, 좀 소박하다 싶다가도 중간을 넘겨 읽으니 "당첨금 15억"을 전제로 하셨더군요. 1등이 얼마나 어려운데 그래봐야 공동 당첨자 여럿이 끼면 그 확률의 파고를 넘고서도 고작 손에 쥐는 게 15억이라니(하물며 세후 순수령액은....).... 대회에서 입상한 후라면, 파트너에게 공을 셈해서 후하게 보너스를 주고 남은 돈으로도 댄스 학원 하나를 차리는 데에 부족하지 않을 거라 하십니다. 이 정도면 (첫인상과는 달리) 그 꿈 한 번 대단히 치밀한 예산 하에 세워진 현실주의의 산물 같기도 하네요.

그런 사실이 있은 줄은 몰랐는데, 실제 우리나라에 407억 당첨금을 독식한 사례가 있었다는 게 문OO님의 설명입니다. 이 당첨자는 "더이상 승진 시험을 못 치르게 되어 아쉽다"고 했다는데, 직무에 충실한 외에 열심히 공부해서 직급을 오르는 게 진정 이분의 낙이었나 봅니다. 우리 나라의 사례는 아니고 어느 미혼모가 갖은 고생을 해 가며 아이 넷을 키우다, 역시 거액 1400억의 당첨금을 손에 쥐고 "이제 아이들을 위해 남에게 손 벌릴 일 없어 기쁘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필자(엄OO님)의 말씀은, "성실히 제 인생을 산 자에게 당첨금이 갔으니 정말 보기 드물게 돈이 바른 임자를 찾은 셈이다."고 합니다. 이런 말에 우리가 공감한다는 건, 그만큼 사행심을 부추기는 이 제도가 문제가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른들 말로 그렇게나 길한 꿈이라는 똥꿈을 꾸고 덜컥 복권에 당첨된(꿈을 꾸며 이 수필을 쓰시는) 이OO님은, 당첨금으로 과연 무엇을 할지 목록까지 작성해 가며, 막상 용처를 매기면 금세 바닥이 드러나는 이 돈이란 녀석의 허상도 아울러 짚습니다. 이 글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중 25편 넘는 글들은, 정말로 "내가 당첨이 되었을 경우 우선순위에 따른 지출 방법"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이 "꿈"들이 가상이 아니라 실제였다면 아마 배가 아파서 책을 못 읽을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어차피 모두가 백일몽임을 알고 신나게 꾸는 환상이기에, 다른 분들, 특히 글쓰기가 본업인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엿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충분합니다. 거금이 손 안에 들어 왔으면 하고 요행을 바라는 얄팍한 마음이야 누구나 비슷하지만, 사람 얼굴이 각양각색이듯, 그 꾸는 꿈의 모양새의 디테일로 일단 들어가보면 그야말로 천차만별입니다.

가상의 시나리오, 행복한 미래에 대한 상상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책에는 과거, 1980년대 이전에도 한국에서 성황이었던 복권이란 요물에 대해 회상을 적은 글들도 많이 있습니다.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 성공을 기려, 기금 조성을 겸해서 "올림픽 복권"이라는 게 생겼고, 허름한 슬레이트집이라도 짓고 부모님 아내 자식들과 오붓하게 사는 게 모두의 꿈이었던 시절에는 주택복권이라는 게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복권업을 하면 그건 바로 불법으로, 엄격한 제재와 형벌을 받습니다. 예외적으로 대중들을 상대로 펼쳐지는 이런 복권 사업에 명분이 있으려면, 수익금이 실제로 공공용도에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데, 편집인의 설명에 따르면 "반액은 주택 건설 등 좋은 일에 쓰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나머지 반액을 몰아다가 1등 당첨자에게 안겨 주는 건데.... 이런 사행성 강한 제도의 도움 없이도 온 국민이 진정 행복한 꿈을 무리 없이 평등하게 꿀 수 있는 날이 하루바삐 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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