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다시 사랑하다 - 사랑의 거품이 빠진 사람들을 위한 관계 테라피
린다 캐럴 지음, 정미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단위를 이루는 게 "가정"이고, 그 가정 중에서도 필수 요소, 기둥뿌리를 이루는 실체가 "부부"입니다. 자녀 없는 부부, 가정은 있을 수 있지만, 부부로 이루어지지 않은 1인 세대는 그걸 가정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무리입니다. 물론 편부, 편모 가정도 얼마든지 화목한 분위기와 모범적인 생활을 꾸려갈 수 있지만(실제 역사에서 사대부 포함 만인의 존경을 받은 서포 김만중의 예가 그 대표라 하겠습니다), 원칙이랄까 원형적 가정상에서는 다소 거리를 둔 양상이죠. 나라님이나 고을 수령도, 무지렁이, 촌부, 심지어 백정이라고 해도, 그들이 이룬 부부 단위- 자녀 확장의 가정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일구는 기초 경제 터전이 나라 살림의 근간을 이루고, 인륜과 도덕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근원이 바로 이들 풀뿌리 백성이 이루는 개개 가정임을 결코 무시해선 안 되었기 때문이죠. 가정이 무너지면 그건 곧 국가를 이루는 인륜, 질서의 뿌리가 뽑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어떨까요? 서구인들의 생활 패턴이 물질문명의 글로벌 확산과 함께 급속도로 지구 곳곳에 퍼짐에 따라, 우리 한국도 누백년 누천년 간 유지해 온 생활 풍습과 제도 를 서서히 포기해 가며, 서구형 핵가족을 가정의 기본 단위로 본격 받아들인 지 어언 삼십 년이 다 되어갑니다. 이제 "핵가족"이란 말도 잘 쓰지 않습니다. 가족이라고 하면 당연히 2대 직계혈족만으로 이뤄진 단위를 떠올리기 마련이라서겠죠. 혹은, 1인 가구라는, "핵"보다 작은 소립자가 주변에서 지나치게 자주 눈에 띄곤 하는 현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사람 사는 알콩달통한 재미, 효과적인 경제 활동,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가며 자연스럽게 도달되는 인격의 완성 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그 마음이 잘 맞는 이성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합니다. 이는 쾌락이나 사회적 위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는 방식의 정석과 기본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이게 서양과 동양이 그 근본 이치가 서로 다를 이유도 없습니다.

 

요즘 속된 말로, "(남녀 간의 사이가) 많이 상했네."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음식물이 상했으면 얼른 버리든지, 일부만 선도가 떨어졌으면 빨리 덜어내고 나머지를 살리든지, 어떤 구제책을 찾아야 합니다. 저 표현은 주로 청춘 남녀의 관계를 두고 쓰이지만, 이미 법률관계의 형성(=혼인신고), 혹은 사회적 공인을 받거나 실체를 이룬(사실혼) 기혼자들이라고 해서 결론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젊은 연인이면 차라리 해결책이 간단한데, 기혼자라면 (연령대를 불문하고) 처방이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해지며,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설계가 달라질 맞춤형이라야 바람직합니다. 흔히 결혼에 일단 "골인"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그저 편하게만 대하거나, 밖에서도 "부부끼리 어련히 잘 알아서 할까"처럼 가볍게 여기기 쉽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단 위기에 접어들었다면, 연인보다 적확한 솔루션이 필요한 게 바로 부부 사이입니다.

 

서양의 책들이 보통 그렇지만, 이 책 역시 다양한 사례 연구를 통해, 현대의 부부들이공통적으로, 혹은 특수한 사례 유형에 따라, 곤란을 겪고 속을 쓰리며 때로는 정신과 전문의, 심리치료사, 기타 전문가들까지 찾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입체적으로 정리, 분석, 진단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제 주위의 많은 부부들은, 두 사람만의 관계에 모종의 위기가 감지되거나, "냉전이 열전으로 변해서 화끈하게 한 방 터뜨리고 난 후"에는, 차분히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는 책을 읽곤 합니다. 그런 책들은, 대개 추상적인(추상적이라서 나쁘다거나 부족하다는 게 아니고요) 교훈, 혹은 총론적인 도덕을 독자에게 일깨워 주는 내용이 대부분이죠. 그런 책들을 읽고 초심, 혹은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여, 다시 옛 정을 회복하고 잘 사시는 부부들은 대단한 경지에 오른 분들이시죠. 문제는..... 각자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 온 이들이(그리고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던 분들이), 일단 처음으로 맞부닥치고 나서 서로의 추한 면(혹은 일방이 보고 싶지 않았던 타방의 어떤 면)을 충격적으로 접했을 때, 개인주의 트렌드가 그 성장기를 내내 지배한 세대의 커플이라면 그 간극의 봉합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이런 분들을 위한 책입니다. 지극히 타당한 설교나 훈화로 도무지 해결이 안 되고, 한번 등을 돌리기 시작한 감정이 처음의 설렘으로 회복되지 않을 때, "당신들 두 사람 뿐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다른 커플들이 겪고, 다시 아문 상처의 사연은  이러하다"며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케이스 스터디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잘 정리되고 구체적이라고 해도, 실례 그대로를 (환자이기도 한)독자들에게 툭 던져 주고 나서, 조언이나 다독거림, 가이드 없이 나가버리는 저자는 무책임합니다. 이 책은 추상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포섭했지만, 동시에 그 대표 사례로부터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아파서 절실하기만 했지 문제를 객관화해 볼 여유가 없는 우리 일반 독자들에게, 도식화한 교훈, 처방, 팁, 원칙들을 보기 좋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제목은 "부부"를 겨냥한 것처럼 되어 있고, 사례도 기성 부부들의 이야기가 많지만, 젊은 커플(진지한 사이라면)이 자신들에게 적용해도 충분할 만큼 내용이 알찹니다.

 

방어적으로 굴면 곤란합니다. 남편은 물론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두 사람이 구성과 배열이 다른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고(근친 관계가 아니기에 결합이 가능하죠) 후천적으로는 매우 상이한 성장기를 거쳤다 해도, 일단 유니언을 이룬 이상 감정상으로도 공동 운명체를 이룬 셈입니다. 방어적으로 나온다는 건 "당신에게 입을 상처가 두렵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설사 일시의 다툼에서 상처를 입는다 해도, 그걸 어루만지고 새 살을 북돋워 줄 사람은 다름 아닌 배우자(혹은 진지한 애인)입니다. 심리적 방벽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이는 부부 관계 존립의 기본 이유가 의심스러워지는 거죠. 개개 자존이나 사적공간을 존중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말 "부부는 일심동체"에서, 이 "일심"이 가리키는 건 이 서양인 저자가 쓰는 "방어적 애티튜드는 금물"의 조언과 같은 의미입니다. 나중 일(이 있어도 곤란하겠으나)은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일단 둘 사이에는 흉금을 말끔히 터 놓아야 합니다.

 

이 책이 다루는 부부 관계의 스펙트럼은 실로 넓습니다. 저자는 소설가 로라 먼슨의 자전 소설 한 대목을 인용하며(이 소설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으니 찾아 보셔도 되겠네요), 격렬한 다툼으로 최악의 지경까지 간 자신이, 결국 남편의 요구를 거절하고 이혼을 안 해 준 건, 다름 아닌 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였다는, 다소 충격적인 고백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자식 때문에 못 헤어지는..." 사유가 가장 보편적일 텐데, 먼슨 여사의 의도는 이런 것입니다. "이혼 한 후 두고두고 이혼 당시를 생각하며 상처에 고생할 텐데, 그 장래의 희생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당장 편하려면 그때 바로 이혼 해 주는 게 나았다(이런 표현은 없으나 책을 읽고 제가 추측한 겁니다). 내가 선택한 길은, 남편과 그저 거리를 두면서 불화를 피하는 것이었다. 이런 선택 역시, 누구보다 내 감정이 중요하다는 전제 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런 케이스가 딱 내 얘기다 싶은 분들도 있고, 전혀 아니다 뭔 소리냐 라는 반응이 나오는 분들(여성들)도 있을 겁니다. 남편이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냥 참고 살지"하곤 전혀 동기나 감정의 색채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죠. 이런 경우, 한국의 와이프들처럼 참고 사는 건 오히려 저 먼슨 여사의 남편분일 겁니다. 이분은 아주 전략적으로, 이기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거죠.

 

그럼, 일단 모든 것을 터놓고 살라는 주문과는 서로 어긋나는 것 아닌가? 저자는 부부, 혹은 연인 관계가 지나 오는 stage(혹은 phase)에 따라, 배우자 쌍방 혹은 옆에서 조율해 주는 카운슬러의 역할이 다르다고 봅니다. 일단 개체로서 지켜야 할 아주 내밀한 자아는, 부부 관계 이전에 인간 존재 본연의 이슈죠. 저자는 오히려, 이런 부분들을 잘 관리하는 스킬을 알려 줌으로써, 반대로 성숙한 부부, 모든 걸 다 터 놓을 수 있는 관계의 초석을 다진다는 방법론을 취합니다. "비움으로써 채운다"는 말과도 통하는 바 있습니다. 결국 사랑이란, 둘 사이의 다양한 소통을 시도함으로써 "처음부터 비어 있던 부분을 채우는" 동시에, 나의 내면을 지금까지보다 더 정밀히 헤아림으로써 상대 배우자의 감정과 기대까지를 배려하는 과정이라는 거죠. 이래서, 사랑을 해 봐야, 혹은 결혼을 해 봐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하기 어려울 것 같아도, 본래 사는 게, 인생이라는게 그리 쉽지 않은 걸 어쩌겠습니까. 성숙한 사랑은 성숙한 인격을 전제로 한다는 점 다시 깨닫게 해 주는, 진지하고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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