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기행 - 깨달음이 있는 여행은 행복하다
정찬주 지음, 유동영.아일선 사진 / 작가정신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국(佛國)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되는 아소카 왕의 고사, 행적처럼, 겨레가 발 붙이고 땅을 일구며 사는 나라, 누리 모두가, 부처님의 따뜻한 마음이 뿜는 온기로 덮이고, 또 덥혀지는 그런 장면이 연상되지는 않으시는지. 우리 나라에도 이 단어에서 자기 이름을 딴 사찰이 있습니다만, 군주건 백성이건, 주인이건 머슴이건, 지주건 소작부쳐 먹고 사는 농군이건 간에, 모두가 제 분수를 알고 욕심을 줄이며, 이웃의 가정과 행복, 재산, 감정 소중한 줄 알며 배려하고 사는 따스한 공동체야말로, 사람의 영혼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희구하는 궁극의 이상향입니다.



서방(西方) 정토(淨土)라는 말도 있고, 극락이란 말도 있습니다만, 그런 고장, 지향 등은 왠지 우리가 이생의 터전으로 삼는 곳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에게 평안과 공감을 주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진세(塵世)의 주제로야 백정이든 갖바치이든 그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만민 평등 만인 해탈의 사상을 가르치고 있으며, 또 그런 산[生] 보살들이 사는 땅이 곧 극락이라는 내-현세 일체의 관념(이게 곧 제행무상이지 무엇이겠습니까?)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딴 뜻 없이 하는 말이라도, 내가 사는 세상이 곧 "극락"이라고 터놓으면, 그건 깨달음 없이 진인을 자처하는 양 왠지 무엄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사는 곳을 곧 불국으로 만들겠습니다! 라고 외치면, 이건 군주의 말이건 무지렁이의 다짐이건 그러나 그 울림이 어인 까닭인지 갸륵합니다. 그래서 "불국"은 (원칙적으로야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왠지 대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우리 동아시아 3국에서 입으로 되뇌기에 더 어울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책은, 신작소설 <천강에 비친 달>로 최근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깊이 울리신 정찬주 선생님이, 부탄, 네팔, 스리랑카, 남인도 여러 지방, 그리고 오대산(五臺山. 우타이 산)을 다녀 오고 그 소회와 깨달음을 정리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 네 누리는 소승 불교, 혹은 금강승의 믿음이 승한 곳이고, 오대산은 우리가 잘 알듯 문수보살 신앙이 찬연히 꽃핀, 동아시아 일원이 모두 소중히 여기는 대승 본산 중 한 곳입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 부처님만 보인다고 했듯, 불심 깊으신 작가님이 답사하신 현지의 풍경 미세한 요소 하나하나도, 이런 아름답고 우리의 선한 본성을 일깨워 주는 주옥 같은 기행문이 완성되게끔 일일이 인도와 영감의 손길을 내뻗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책의 맨 앞 장이 부탄에서의 견문과 감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작가님이 일정상 부탄의 팀푸에서 출발하기도 하셨지만, 왠지 이 책은 정말로 부탄인들의 삶, 애환, 역사, 그리고 불심을 다루는 내용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독자 중 저만 그런 느낌을 갖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1장에서 부탄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고 너무도 충격과 각성을 받아서, 이 내용이 책 전체를 대변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과라니 족이 사는 오지를 방문하고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혼을 강타한 그 경각처럼, 저곳이야말로 천국과 같은 곳이었구나!" 저도 고려대 강수돌 교수님의 책에서 부탄인들이 GNP 대신 GNH, 국민 총행복이란 지표를 사용한다는 말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심드렁하게 넘겨 버렸습니다만, 현지를 직접 답사하신 작가님의 서술로 다시 이 사항을 만나고 보니, 이 부탄 사람들은 진정 지상에 극락을 짓고 거룩한, 청정한 삶을 영위, 실천하는 복 받은 민족이더군요. 나라 살림은 인접국에 수력 전기를 수출하는 걸로 유지하고, 난개발과 환경 오염을 극력 방지하며, 이웃 네팔이 정쟁과 왕실 분쟁으로 바람 잘 날 없는 것과는 너무도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부탄 역시 영국의 식민지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나라 자체가 착취할 자원이 빈약하여 큰 대립, 갈등, 차별, 억압 없이 시간을 보내고 인도와 함께 독립했다고 전합니다. 제 생각에 제국주의자들이란, 자원이 빈약하면 인력이라도 쥐어짜내어 이익을 추구하는 족속들입니다. 부탄이 탈 없이 강점기를 보낸 건, 그들이 도덕적인 삶을 유지하고 그들의 기질이 (오랜 기간 동안 외침을 모두 격퇴한 데서 알 수 있듯) 건실, 강건해서, 제국주의자들이 함부로 굴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 같습니다(이 책에 그런 말은 없지만,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든 생각이었습니다). 하나 우리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건, 이 부탄이 반중 성향이 강하다 보니 지독한 친일 정서가 전국민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팔은 우리가 다 잘 알듯 부처님이 태어난 곳입니다. 역설적인 건 현지 인구 종교별 분류를 보면 힌두교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는 우리가 정규 교육 과정에서도 배운 바입니다. 경우에 따라 발생지에서 몰락하고 그 대신 다른 지역에서 교세를 떨치는 세계 종교로서의 불교가 지닌 묘한 입장을 상징하는 사실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작가님은 우리의 그런 상식이나 선입견이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센서스에서 종교를 힌두교라고 적어 낸 주민도, 막상 일상에서는 부처님을 믿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라는 거죠. 하긴 부처님이 나고 자란 고장에서, 부처님 외 다른 신앙을 애써, 번거롭게 유지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 장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듣는 이를 전율케 하는 무서운 사실도 적혀 있습니다. 자신의 비천한 출신을 뜻하지 않게 알고선 카필라 족이 사는 일대에서 잔혹한 살육극을 벌인 비두다바 왕자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참고로 테즈카 오사무의 <붓다>에 나오는 차프라의 이야기와도 살짝 비슷한 점이 있는데, 캐릭터 차프라는 조금도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동요 없이 양심의 길을 걸었다는 게 결정적 차이죠.

인도 아니라 남인도(어떻게 기준을 잡건) 일대만 해도, 웬만한 국가 여럿이 합쳐진 광대한 영역인데다, 각각의 지방색도 천차 만별이라 한 고장 한 주(州)만 둘러보기도 대단히 힘듭니다. 작가님은 서부 해안 고친부터 해서 동남부 해안 일대를 다 주파하고, 인도 아대륙 중앙에 위치한 하이데라바드에서 남인도 순회를 마치셨군요. 대단한 강행군이었을 듯합니다. 정복 황제 호법 군주 아소카 왕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이 지역, 사실 아육왕의 치세에도 이 넓디넓은 고장이 한 가지 풍습, 한 가지 질서를 유지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토록 많은 피가 대지에 흐르고 피비린내가 대기를 물들이며, 사람들의 눈 앞에 저민 살점이 날아다니고 나서야 제국의 질서가 전 지역을 아우르게는 되었지만, 숱한 생령의 희생을 목도한 대왕의 마음도 아수라 지옥이 따로 없었을 텝니다. "불국"의 이념이 대륙 전체에 퍼져 나간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지요. 작가님이 설명하시듯, 아육왕 치세 후 수백 년이 다시 지나서야 우리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전설의 석탈해(신라), 허황옥(가야) 도래는 이보다 다소 앞섭니다.
탈해가 대장장이를 의미하는 타밀어 탈하이에서 왔다는 분석은, 독자의 가슴을 최고 가속으로 박동하게 만들더군요. 작가님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에도, 작가님의 이런 언어학적 소양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거대한 아난존자의 석불이 자리한 스리랑카는 오랜 내전으로 비록 관광지, 성지로서의 개발이 늦어졌지만, 천혜의 기후 조건과 유서 깊은 문명의 내력이 주는 매력, 매혹으로 세계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또한 최근 "경전 원문"을 공부하려는 한국 불자들이, 산스크리트, 팔리 어를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부처님의 육성을 포착하려 주야로 애쓰는 나라이기도 하죠. 작가님이 현지에서 만난 난다 스님, 수만갈라 스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불도를 닦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으나, 이르는 지향점은 결국 하나이다." 이로부터 저 위, 힌두교와 불교 역시 결국 하나라는, 넓고도 깊은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어도 결국은 나를 믿는 것이다." 최근 소승 경전만이 참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일부에서 대립이 일어날 조짐도 있는데, 소승의 본산에서 대덕으로 칭송 받으시는 수만갈라 스님은 이런 한국 불교를 향해 따끔한 일침을 주시고 있네요. "한국 불교는 산에서  그만 내려와야 한다." 정통/이단의 부질없는 편가름은 결국 그 종교의 속됨을 폭로할 뿐입니다.

한국에도 같은 이름(한자까지 같습니다)을 지닌 산이 강원도에 있지만, 중국의 우다이 산은 산서(山西) 성(省)에 위치해 있습니다. 문수보살이 친히 모습을 드러내신 성지로 유명한 이곳은, 우리 한국에서는 신라의 의상대사, 그리고 이후 먼 천축까지 발걸음을 옮기신 혜초 대사의 자취가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불구덩이에 들지 않고 어찌 지혜문수를 만나랴!"는 말처럼, 혹은 스승 달마에게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 던진 혜가의 고사처럼, 궁극의 진리 앞에 현세의 모든 집착과 애욕, 재물과 탐심, 쾌락과 유혹은 일개 티끌만도 못한 허상일 뿐입니다. 묘한 것은, 현지 금각사에 묘장왕 소상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인데, 본디 불교 색채를 중국 현지 토착 신앙이 대거 흡수한 게 도교이며, 작가님의 분석으로는 청대 이후에 도교 요소의 습합이 이루어진 듯하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공안 조주석교가 여기서 다시 인용되는데요. 저 역시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는 이 마지막 행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습니다(하긴 그 궁금증이 풀리려면 수행의 길로 들어서야 하겠지만). 작가님이 새기시기로는 일종의 대승 이념, 즉 나도 깨달음을 얻고, 중생 일체도 같은 길을 걷게 한다,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생각하면 할수록 현세의 유한함, 무상함에 대해 몸서리치게 하는 깊은 가르침인데, 이 부질없음에 대해서도 무한한 자비심으로 절대 긍정할 수 있는 게 또한 부처님의 품 속입니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언제나 진정한 정토, 불국에 한 발을 들일 수 있을지, 아득한 느낌과 먹먹함으로 책을 덮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