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7
오쿠다 히데오 지음, 정숙경 옮김 / 북스토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정갈한 일식 정찬 코스처럼 모범적이고 깔끔한 단편 다섯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책의 외관이나 편집도, 수록된 작품들의 완성도와 개성마냥 예쁘고 단정합니다.

다섯 편은 모두, 40대, 남성, 대기업 중간 관리직, 성실하고 적당히 유능하지만, 삶의 정열과 독기가 거의 다 사그라든, 평범한 중산층 세대의 가장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나 일본인들이나 사는 모습, 의식 구조, 관행, 루틴들이 너무도 서로 닮아 있기에, 이 단편들의 주인공과 매우 비슷한 처지일 남성들이 읽으면, 몰입, 공감의 눈물, 그리고 달관, 통찰이 고루 서린 미소가 절로 지어질 지 모르겠습니다. 잔잔하면서도 끝에 가서 분위기가 크게 한번 요동치다, 독자의 웃음보를 크게 한번 터뜨린 후에는 흐뭇한 관조 모드로 들어가게 해 주는, 노련하고 "착한" 작품들입니다.



주인공을 하나같이 저런 신분(특히 더 흔할 중소기업도 아닌 대기업 과장들로 잡은 독특합니다)으로 설정했으면서, 품고 있는 이야기의 빛깔과 주제는 각기 다 다릅니다.  어찌 그리 대기업이란 조직의 생리와 풍속도에 사실적으로 훤하신지, 또 그로부터 보편의 교훈과 감동을 잘 끄집어 내시는지..... 이런 것도 읽는 사람마다 감흥은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상당히 착해지는 느낌은 공통이지 싶습니다.

<마돈나>. 단어 "마돈나"의 이 작품 속에서 뜻은 별 것 없고, 새로 입사한 신출내기 여사원을 두고, 상급자, 선배, 같은 또래 여성들이 모두 호감을 보내는 데서, 이 참한 여성이 영업3과의 마돈나로 떠올랐다는 그런 정도입니다. 예쁘긴 하지만 남성 직원 모두를 휘어잡고 마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그런 팜므 파탈형은 아니고, 착하고 일솜씨 좋으며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매너를 지닌 데서 오는 매력의 소유자, 거기서 벗어나지는 않지 싶습니다. 그러나, 애가 둘이나 딸려 있고 15년 전 사내 연애를 통해 결혼한 와이프도 곁에 두고 있는 오기노 하루히코 과장이, 정말 터무니없게도 이 여성에게 반해 버렸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떤 칙칙한 불륜이나 사악하고 불결한 성적 종속 관계 따위를 도모하는 건 아닙니다. 그럴 위인도 못 되고, 다만 혼자만의 상상에서 그녀와 데이트 끝에 적당한 모텔로 데려가는 데까지만 상상하는, 매우 양심적인 40대, 전형적인 일본 아저씨 타입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 "아 제발 티 좀 내지 마시라고요. 무슨 망신을 당하려고..." 같은 조마조마함이, 읽는 내내 독자를 떠나지 않습니다. 결국 마지막엔 큰 촌극이 빚어지고 마는데, 내적-외적 갈등을, 참으로 철없는 사내아이들처럼 해결하는 모습에서 독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 단편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과장 부인 노리코입니다. 중간쯤에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하도 핸섬해서 나도 설레었다"고 말할 때, 저는 잠시 맞바람 비슷한 불길한 기운을 느꼈으나, 다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하니 그것과는 정반대 의미겠더군요. 남자는 영원한 어린이일 수 밖에 없고, 아이의 마음을 다 헤아린 후 그럴 수도 있으니 부끄러워하지도(나 역시 마찬가지니) 불안해 하지도 말라는, 너무도 사려 깊은 배려의 한 마디였던 거죠.

<댄스>애서 저 제목 겸 키워드는 두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비록 대기업 중견 사원으로 그럭저럭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긴 하나, 하나 있는 아들이 근래 부쩍 공부를 소홀히하며 속을 썩이더니, 급기야 전업 댄서의 길을 걷겠다고 포부를 밝혔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궤도에서 착실한 삶을 살아 온 전형적인 중년 가장이 이를 용납할 리 없으나, 꽉 짜여진 듯 빈틈 없는 조직에서 원초적 야성을 모두 잃은 다나카 과장은 이제 아들을 혼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아버지는 최후의 보루"라면서 개입을 아껴 뒀다가 마지막에 나선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의 영이 안 서는 걸 엄청 두려워하는 겁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아이 어머니를 통해 간접으로 전해 오는 녀석의 뜻은 "아버지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길들여지듯 사는 삶이 싫어서 댄서가 되겠다"는 것이니.... 여튼 다나카 과장은 자신이 회사에서 유지하는 스탠스처럼, 현상의 아슬아슬한 유지 쪽을 일단 택합니다. "폭발, 격노, 반항"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고, "대세 순응"만이 유일한 신조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그걸로 생계도 변변히 유지 못 할 것 같은 춤꾼의 길을 걷는 건, 참을 수 있는 선을 넘는 겁니다. 당장의 파국은 피하더라도, 결국 틈을 봐서 저지하고 말 생각입니다. 경제권을 쥐고 있는 부친으로서 무슨 수라도 나겠지요.

다른 의미는 직장 동기이자 같은 과장인 아사노와 관련된 것입니다. 서구형 개인주의가 몸에 밴 스타일인 이 사람은, 상관에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부하직원들에게도 방임형으로 대합니다. 이런 사람이 일까지 못하면 벌써 대리 시절에 조직 밖으로 내쫓겼겠습니다만, 맡은 업무 처리 하나는 또 확실하니 진정 계륵이고, 여직원들 사이에 특히 인기가 좋다 보니 부당한 조치는 위에서 선뜻 취하기가 힘들군요. 다나카와 그를 동시에 부리는 이지마 부장은 언젠 한번 단단히 이 괴팍한 반항아를 중인환시리에 망신을 주어, 자신의 권위를 한껏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입니다. 다나카 과장은 두 사람의 충돌을 막고 조직의 운용이 지금처럼만이라도 매끄럽게 돌아가길 원하는 바람에서 필사적 중재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선택을 하고 말았으니......

<총무는 마누라>는 어쩌면 우리 동양인들이 영원히 떨쳐 버리지 못할, 공과 사의 혼동, 정실주의, 그리고 "우리 못난 것들은 뒤에서 부정부패라도 하는 재미에 살지, 그런 낙도 없다면...."에 결국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탁류에 휩쓸려 들어가는 풍토를, 마치 채만식의 작풍(作風)처럼 새타이어하는 단편입니다. 온조 히로시는 이 작품집에 실린 다섯 편의 (같은 또래) 주인공들 중 아마 가장 유능한 간부이며, 가장 규모가 큰 대기업에 소속된 캐릭터일 겁니다(다들 괜찮은 직장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요). 유럽연합 국적의 기라성 같은 기업을 거래 상대로, 처음에는 해외파가 아니라서 고전도 했지만, 빼어난 적응력을 발휘하여 결국 손 대는 건수마다 주위를 놀라게 할 성과를 거두고 이제 별 달기 직전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총무과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냥 놀면서 보수만 챙기면 그만인데, 현장 최일선에서 감각과 야성을 최고조로 갈고 닦아 온 그에게는, 금쪽 같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며 조직에 해를 끼치는(그의 생각입니다) 것만큼 혐오스러운 게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도(영전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불만스럽거니와, 밥벌레처럼 스포츠 신문, 만화나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직원들을 보면 거의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너희들 영업부에선 지금 얼마나 피말리는 전쟁 분위기로 일선을 뛰는지 알기나 하냐!" 갈수록 태산이라고, 이 총무부 산하 각 부서는 엄청난 비리로 회삿돈을 축내고 있는 실정이 포착되고, 비리 연루 사내외 당사자들은 그를 회유하려 들기까지 합니다. 융통성이 없다거나 성미가 꼬장꼬장해서라기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노른자 지위만 골라 거쳐 온 엘리트로서의 자부심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우리나라도 제발 좀 이래야 하는데). 근데 그는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총무부서는 마누라와도 같다"는 말을 누군가에게로부터 환기 받습니다. 그게 과연 무슨 뜻이며, 온조 과장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되는 걸까요?

<보스>는 여러 점에서,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를 닮아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결말에서, 빙허의 그 작품은 호러, 혐오, 연민의 미학적 효과를 자아내는 반면, 이 작품은 무진장 귀여움의 발산으로 독자와 주인공 시게노리의 닭살을 돋게 하는 데에 있다고나 할까요. 해외파라기보다 정체성이 해외 그 자체인 요코 부장의 실감나는 성격 구현에서 작가는 대단히 빼어난 솜씨를 보입니다. "멸군실에 들어선 바퀴벌레 느낌", "수족관에사 유영하는 시라칸드 기분" 같은 재치있는 표현도 나옵니다.

<파티오>는 오랜 수명의 나무와, 전직 대기업 간부로 이제 생을 정리하는 시기에 접어들어 고독을 즐기는 어느 정체불명의 노인, 그리고 이 두 심상에 자신의 늙은 아버지를 대입, 교차시키는 (역시 성실하고 윗선에 잘 안 대드는 대기업 과장) 스즈키 노부히사의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담담한 문장 속에 잘 담아낸 단편입니다. 이 책에 실린 작품 중 가장 상징 레토릭이 효과적으로 쓰였다는 인상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한결 더, 대기업 내부의 업무 추진 분위기, 현장감을 생생하게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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